55. 상륙(3)-제2/19호주대대구역
제22호주여단의 좌익은 로버트슨 소령의 제2/19호주대대가 맡았다. 대대본부는 베리강 북쪽의 언덕에 있었으며 해안방어선은 페르감강을 경계로 우익은 B중대(키건 소령), 좌익은 D중대(빈센트 소령)이 맡았다. A중대(커즌 대위)는 남쪽의 초아추캉 마을을 지켰으며 C중대(토머스 대위)는 대대예비대로서 대대본부의 바로 서쪽에 주둔했다. 일본군 상륙 당시 대대는 약 370명의 미숙한 신병을 받아들여 전투력이 저하된 상태였다.(대대 정원은 786명이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제2/19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18사단의 우익대였다. 보병제56연대제1대대가 우제1선이었으며 보병제55연대제1대대가 좌제1선으로 상륙했다.
좌제1선인 제55연대제1대대는 B중대의 북쪽 구역에 상륙했다. 이곳을 지키던 소대는 약 50척의 일본군 주정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지원포격을 요청하는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나 야포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이 상륙하면서 중대의 방어구역 전체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55연대제1대대는 큰 피해를 입은 B중대의 우익을 밀어내면서 무라이 강을 따라 진격하기 시작했다.
B중대장 키건 소령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9일 오전 3시에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대대본부를 향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B중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대대본부 서쪽에 주둔 중이던 C중대와 만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B중대의 좌익을 지키던 D중대는 우제1선으로 상륙한 제56연대제11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철수 명령을 떨어졌고 D중대는 대대본부 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앞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후퇴한 D중대는 오전 6시 30분에 대대방어선에 도달했으나 그 과정에서 2개 소대를 잃었다. D중대와의 교전은 제56연대제1대대 입장에서도 상당한 격전으로 대대부관과 제1중대의 제3소대장이 전사하고 제1소대장이 중상을 입었다.
제2/19호주대대장 로버트슨 중령은 A중대에게도 철수명령을 내리기 위하여 정찰대를 파견했으나 접촉하는데 실패했다.
제22호주여단과 제44인도여단의 경계는 초아추캉 도로였다. 제44인도여단은 베리강과 포얀강 사이의 어귀에 일본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여기에 야포의 조준을 맞추고 강력한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실제로 베리강 하구로 진입하려던 일본군은 제56연대제1대대 소속의 주정 5척 뿐이었다. 이 주정들은 제2/15야포연대의 집중사격을 받아 모두 격침되고 타고있던 병사들은 펀자브 대대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제44인도여단의 나머지 전선은 밤새 조용했다.
(싱가포르 섬 상륙.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84
9일 새벽 2시까지 제18사단의 예비대인 보병제56연대의 제2 및 제3대대가 상륙을 마침으로써 제18사단도 상륙에 성공했다.
일본제25군은 야포 160문을 가진 군포병 및 사단포병을 북서해안에 집결시켜 그 화력지원 아래 싱가포르섬 상륙을 성공시켰다. 상륙한 병력은 13개 대대, 예비대는 5개 대대에 달했다.
말레이 사령부는 벤넷 소장의 요청에 따라 오전 6시에 모든 항공기(허리케인 10대, 소드피쉬 4대)를 이륙시켜 상륙한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허리케인들은 이륙하자마자 조호르에서 날아온 84대의 일본기와 싸워야 했다. 치열한 공중전 끝에 1대를 잃은 허리케인 부대가 칼랑 비행장에 착륙하여 재급유를 받는 동안 다시 84대의 일본기가 들이닥쳐 허리케인들은 재차 요격에 나서야했다. 따라서 상륙한 일본군에 대한 공습은 불가능했다.
9일 아침에 북부지구 사령부로부터 전선이 조용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비로소 퍼시발 중장은 북서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이 주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전 9시 30분에 말레이 사령부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12인도여단(파리스 준장)을 서부지구에 배속시켰다.
9일 오전 9시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일본군에게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아마켕을 떠나 텡가 비행장 서쪽의 불림으로 여단사령부를 옮겼다.
그동안 제22호주여단의 일선 대대들은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아마켕 북쪽의 나마지에 농원을 지키던 제2/20호주대대(애쉬톤 중령)는 주로 일본제5사단의 좌익대인 보병제11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2/20호주대대는 북쪽으로 1개 소대를 내보내어 고립된 D중대(리처드슨 대위)의 퇴로를 열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너무 많아 불가능했다.
일본군의 압력이 점점 가중되자 제2/20호주대대는 오전 9시 15분에 아마켕 부근에 있던 제2/18호주대대(발리 중령)와 연결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마켕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이미 일본군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남하 도중 대대의 좌익을 맡았던 에와트 대위의 B중대가 매복공격을 받아 대대정보장교 레논 중위가 전사하고 에와트 대위가 부상을 입었다. A 중대로부터에서 콘포스 소위가 지휘하는 1개 소대가 달려가 매복했던 일본군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못박혀 있던 B 중대의 잔존병을 구출했다. 그러나 잠시 후 더 많은 일본군이 달려와서 교전이 벌어졌고 B중대와 콘포스 소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A중대(메렛 소령)는 콘포스 소대가 B중대를 구하는 동안 자리를 지켰으나 가중되는 일본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오전 10시부터 다시 남하했다. 그때 북쪽 고지에서 쏘아대는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자 A중대는 여러 소부대로 흩어져 버렸다.
북쪽에 고립되어 있던 D중대는 오전 10시 30분부터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많은 일본군과 쉴새없이 교전하면서 남하하던 D중대는 아마켕 부근에서 2개로 갈라졌고 이어서 늪지로 들어서면서 완전히 흩어졌다.
이로써 제2/20호주대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대대원 중 소수만이 불림에 있던 제22호주여단 사령부에 도착했는데 일부는 무기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제2/20호주대대의 장교 중 대대장 애쉬톤 중령을 포함한 7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고 이외에도 다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영연방 보병대대의 장교는 33명이다.)
아마켕 마을에 주둔한 제2/18호주대대(발리 중령)는 주로 제5사단의 우익대인 보병제42연대의 맹공을 받았다. 보병제42연대는 림추캉 도로 서쪽의 언덕을 지키고 있던 A중대(존스턴 대위)와 C중대(오케이 대위)를 공격하여 도로 서쪽으로 몰아내었다. 이후 제2파로 상륙한 보병제21연대의 1개 대대가 보병제42연대를 추월하여 A 및 C중대 남쪽에 있던 D중대(치점 대위)의 배후를 통하여 텡가 비행장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A중대장 존스턴 대위는 A 및 C중대 80명에 제2/10공병중대 병력 50명을 포함하여 130명의 병력으로 반격을 가했다. 존스턴 부대는 일본군에 접근하여 사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돌격했으나 황급히 편성한 일본군 방어선 20m 앞에서 저지당했다. 이때 야포가 지원사격을 해주거나 아니면 바로 남쪽에 있던 D중대가 일본군의 배후를 찔렀다면 승리할 수 있었겠지만 포대나 D중대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전선에서는 전령이 뛰어다니면서 정보와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이런 여건에서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합동 작전을 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존스턴 부대의 반격은 실패했고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이제 버틸 재간이 없어진 A, C 및 D중대는 텡가 비행장으로 후퇴했다. D중대의 남쪽을 지키던 제2/10공병중대(로렌스 소령)는 전선을 지키면서 후퇴를 엄호한 다음 9일 오전 10시 30분에 텡가 비행장으로 후퇴하여 조호르 의용공병대와 연결했다. 제2/18호주대대는 제22호주여단에서 그나마 편제를 유지하면서 철수한 유일한 대대였다.
남쪽을 지키던 제2/19호주대대(로버트슨 소령)는 제18사단 주력의 공격을 받았다. 제18사단은 3개 대대(보병제114연대제2대대, 보병제56연대제2 및 제3대대)를 동원하여 9일 오전 6시에 제2/19호주대대를 포위했다. 오전 7시에 제2/19호주대대는 6대의 브렌건캐리어를 앞세우고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이때 보병제114연대제3대대까지 달려와 전투에 가세했다. 결국 제2/19호주대대의 탈출 시도는 일본군 속사포에 브렌건캐리어 4대를 잃으면서 약 180m 를 전진하고 실패했으며 후위를 맡았던 C중대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이제 전멸을 피하는 방법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방법 뿐이었다. 삼삼오오 흩어져 늪으로 들어간 병력 대부분이 사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로버트슨 소령이 키건 대위와 함께 9일 오전 10시에 텡가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이끌던 병력은 40명에 불과했다. 이후 일부 병력이 추가로 합류했으나 이 시점에서 제2/19호주대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쪽 초아추캉에 배치되었던 A중대(커즌 대위)와 1개 기관총 소대는 테일러 준장의 명령에 따라 방어선을 지키다가 오전 9시 30분에 텡가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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