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일본군의 상륙준비


일본제25군은 1941년 12월 8일에 싱고라, 파타니 및 코타바루에 상륙한 이래 55일 만에1,100km 를 진격하여 말레이 반도를 장악했다. 해상기동 거리는 650km 였다.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에서 95회의 교전을 치렀으며 250개 교량을 수리했다.

제25군이 확인한 영국군 시체는 약 5,000구, 포로는 약 7,800명이었으며 기관차 4대와 화차 55대, 자동차 299대를 파괴했다. 노획품은 비행기 23대, 장갑차 및 브렌건캐리어 235대, 각종 화포 340문, 기관총 551정, 소총 3,222정, 기관차 17대, 화차 및 객차 795대, 자동차 2,723대에 달했으며 이외에도 대량의 휘발유를 포함하여 막대한 보급품을 노획했다.

제25군의 전사자는 장교 102명을 포함하여 1,535명, 부상자는 장교 135명을 포함하여 2,257명이었다. 제5사단이 전사, 병사 및 행방불명 699명, 부상 1,292명으로 합계 1,991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제18사단의 사상자는 약 1,100명,  근위사단의 사상자는 약 900명이었다.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3비행집단의 전사자는 장교 26명을 포함하여 185명이었으며, 부상자는 장교 15명을 포함하여 180명이었다. 항공기 손실 상황은 격추 및 불시착 등으로 66대를 잃었고 영국기의 공습으로 23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21대였다.

격침된 수송선은 2척, 피해를 입은 수송선은 7척이었다.


일본대본영은 전쟁 전부터 조호르 해협의 폭이 넓고 해군기지와 창이 요새를 비롯하여 강력한 방어진지가 많은  싱가포르 섬의 북동해안보다 해협의 폭이 좁은 북서해안이 상륙에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제공권을 장악하면 일본군은 영국군의 눈에 뜨이지 않게 주정에 승선한 다음 기습적으로 해협을 가로질러 상륙할 수 있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정찰을 통하여 영국군이 북동해안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대본영 계획대로 북서해안에 상륙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륙해안은 탄종불로와 탄종무라이 사이였으며 제18사단이 우익, 제5사단이 좌익을 맡을 것이었다. 근위사단은 주력의 뒤를 따라 둑길 바로 서쪽에 상륙할 것이었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우익을 맡은 제18사단은 2개 연대와 1개 대대를 공격에 투입하고 2개 대대를 예비로 보유할 것이었다. 좌익을 맡은 제5사단은 3개 연대를 공격에 투입하고 1개 연대를 예비로 보유할 것이었다. 7km 에 걸친 전선에 투입될 대대가 16개, 예비대대가 5개로서 대단한 병력 집중이었다. 전차제1연대는 제5사단에 배속되었다. 공격대는 1942년 2월 8일 오후 8시에 승선할 계획이었다. 첫번째 목표는 텡가 비행장으로 9일 아침에 점령할 계획이었다. 두번째 목표는 부킷판장마을이었다.

2개 연대와 1개 대대로 이루어진 근위사단은 영국군의 주의를 북동해안으로 돌리는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하여 테브라우 강 서쪽에 가짜 숙영지를 만들고 트럭들이 낮에는 병력과 보급품을 가득 싣고 요란하게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밤에는 몰래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2월 7일 저녁에는 근위사단의 일부가 창이 곶 대안의 우빈섬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의 주력은 주공이 상륙한 후 24시간 후에 둑길 바로 서쪽에서 해협을 건너 상륙할 것이었다. 이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싱가포르 시가지와 창이 곶 사이에서 해안에 도달하여 영국군이 창이 곶으로 철수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차제14연대가 근위사단에 배속되었다.


제25군은 남방군의 요청에 의하여 필리핀을 공격하던 제14군에게 240mm 유탄포 1개 연대, 독립산포병제3연대, 박격제3 및 제5대대를 할애했다. 그리하여 야포 세력은 사단포병과 제25군 직속의 야전중포병제3연대(96식 150mm 유탄포 24문) 및 제18연대(92식 100mm 캐논포 16문), 독립중포병제2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5군의 전력은 보병 28개 대대, 전차 3개 연대 135대, 야포 14개 대대 160문이었다.


(92식 105mm 캐논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Type_92_10_cm_Cannon)


싱가포르 공격을 위하여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의 집적이 이루어졌다. 쿠알라룸푸르에 모인 보급품은 철도를 이용하여 하루에 1,000톤씩 게마스에 도착했다. 트럭이 이 보급품을 바투아남에 만들어진 집적소로 옮겼으며 거기서 다시 조호르 해협까지 운반했다. 당시 제25군이 보유한 자동차는 약 3,000대였다.  싱가포르 상륙 이후인 2월 12일에는 철도가 조호르바루역까지 연결되었고 싱가포르 함락 후인 2월 21일에는 싱가포르 섬과 말레이 반도가 철도로 다시 연결되었다.


싱가포르 상륙에 필요한 주정 숫자를 계산하기 위하여 대본영에서 1월 21일에 제25군 사령부로 좌관급 공병장교 2명을 파견했다. 3일 간의 연구를 거쳐 도출된 숫자는 절첩주(접이식보트) 300척, 중문교 12척, 철주문교 20척, 소발동정 30척이었다. 실제로 확보한 숫자는 95식 절첩주 423척, 노획한 보트 36척, 99식 중문교 18척, 대부양주 5척, 중부양주 20척, 소발동정 35척, 대발동정 1척이었다.


(문교. https://i.ytimg.com/vi/PpHg8OZNWJw/maxresdefault.jpg)


영국고속정이 상륙을 방해를 할 경우에 대비한 계획도 수립했다. 제18사단의 우익에 탐조등을 배치하고 속사포 1개 중대 및 산포 1개 소대를 배치하여 적의 고속정이 나타나면 포격을 가하기로 했으며 제18사단 주정군의 우익에 배치될 주정 몇 척에 기관총을 장비했다.


항공지원을 두고 제25군과 남방군이 대립했다. 남방군은 싱가포르의 적 항공력을 무력화시켰다고 보고 제3비행집단의 중점을 팔렘방 공수작전을 비롯한 수마트라 방면에 두었다. 여기에 대하여 제25군은 제3비행집단이 남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싱가포르 섬 공격에 전념해 주길 원했다. 결국 1942년 1월 29일에 타협이 이루어져 2월 7일까지 전투기, 경폭격기 및 중폭격기 각 60대, 합계 180대가 지원하고 7일 이후로는 전투기 및 경폭격기 각 40대, 중폭격기 60대, 합계 140대가 지원하기로 했다. 제25군은 빈약한 항공지원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으나 당시 제25군의 보급능력으로 대규모 항공작전을 뒷받침할 여력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실제로 2월 13일이 되자 제25군의 지원능력은 140대의 항공기를 지원하는 데에도 한계를 보여 제3비행집단이 자체의 자동차를 사용하여 필사적으로 보급품을 실어날라 겨우 항공작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일본제5사단과 제18사단은 제25군의 명령에 기초하여 2월 3일에 사단명령을 내리고 공격부대 편성, 도하작업대 배속, 자재 정비 및 도항 준비에 들어갔다. 2월 5일에는 도항 세부사항을 확정하고 도항점으로 기재, 자재 및 탄약 등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하작업대는 6일 밤까지 주정들을 도하점으로 옮겼다. 이어서 제1및 제2도항부대의 보병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여 8일 아침까지는 승선 장소에 집결을 마쳤다.


일본군 야포는 2월 1일부터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간헐적으로 교란사격을 실시했으며 2월 5일부터는 섬 북부의 비행장, 해군기지, 도로교차점, 포대, 전방방어선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의 야포도 대응사격을 가하여 제25군 포병대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기도 했으나 포탄 부족으로 주력 야포인 25파운드 포는 하루에 20발씩만 사격하도록 엄격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2월 5일 밤에 일본군이 섬의 북동해안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자 상륙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영국제3군단은 조호르 해협을 건너 정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집결 중인 일본군을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말레이 사령부는 북서해안을 담당한 호주군에게 정찰을 명했다.

7일 밤이 되자 전선이 혼란스러워졌다. 약 30명의 일본군이 주정을 타고 둑길 바로 서쪽에 상륙하려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아 주정은 침몰하고 병력들은 사살되었다. 창이 곶 대안의  우빈섬에는 야전중포병제18연대제1대대의 화력지원 아래 근위사단의 일부가 상륙했다. 섬을 지키던 제4노퍽대대의 분견대는 창이 곶으로 철수했다.


제22호주연대는 2월 7일 밤에  말라유 강과 펜다스 강 사이에 정찰대를 파견했다. 내륙으로 2.4km 까지 정찰하고 돌아온 정찰대는 놀라운 소식을 가져왔다. 일본군 대부대가 고무농장에 집결하고 있었으며 도로는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로 가득했다. 정찰대는 상륙주정이 보관된 곳까지 침투하지 못하여 주정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서부지구 사령관 벤넷 소장은 일본군이 북서해안에 상륙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소식은 통신의 미비로 8일 오후 3시 30분이 되어서야 퍼시발 중장에게 도달했다. 벤넷 소장은 해협 너머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포격하기 위하여 항공정찰을 요청했으나 이제 영국군에는 그런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행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부지구 포병대는 정찰대가 보고한 8일 새벽의 위치를 근거로 8일 오후에 해협 너머의 일본군에 대하여 맹목사격을 실시했다. 일본군의 상륙이 임박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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