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싱가포르 섬 방어(1)-해안포와 대공방어
싱가포르 섬은 길이가 50km인 조호르 해협으로 말레이 반도와 분리되어 있는데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1km 가 채 되지 않는다. 영국은 가장 좁은 곳에 방죽길을 만들어 섬과 말레이 반도를 연결했다. 해협의 서쪽 입구로 진입하는 것은 만조시 작은 배만 가능했고 그나마 위험했으나 동쪽에서는 해군기지까지 전함도 진입이 가능했다.
섬의 크기는 동서로 43km, 남북으로는 21km 정도이다. 지형은 울퉁불퉁한 편이며 중앙에는 해발 164m의 부킷티마를 비롯한 몇 개의 고지가 있다. 이 고지에 올라서면 섬 대부분을 볼 수 있다. 고지 남쪽에는 길이 6.4km 의 파시르판장 능선이 있어 서쪽으로부터 싱가포르 시로 통하는 접근로를 감제했다.
싱가포르 시는 남해안에 있었다. 도시의 북쪽으로는 수 km 에 걸친 주택지가 있었으며 해안에는 약 10km 에 걸쳐 상업항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동해안을 제외한 해안선으로 시내와 강이 흘러 들어가며 1940년대에는 대부분 맹그로브 습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섬 내에는 몇 개의 훌륭한 도로가 있었으며 대부분 싱가포르 시로 연결되었다.
싱가포르 시의 인구는 1941년 당시 약 55만이었으나 개전 이후 피난민이 몰려들어 함락 당시에는 약 2배로 늘어나 있었다. 대부분의 인구가 싱가포르 시와 주변에 몰려 있었으며 나머지는 도로 교차점에 형성된 큰 마을을 비롯하여 섬의 다른 지역에 비교적 균등하게 분포했다.
(싱가포르 섬. https://en.wikipedia.org/wiki/Singapore#Geography)
평화시 싱가포르 섬의 일일 물 사용량은 약 1억 1000만 리터로서 이들 중 7700만 리터는 섬 중앙에 있는 3개의 저수지에서 공급받았다. 모자라는 양은 둑길을 통과하는 송수관을 통해 말레이 반도로부터 하루 최대 4500만 리터까지 공급받았다. 1942년 1월 중순이 되자 섬의 인구가 2배로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레이 반도로부터의 물 공급이 끊기고 섬의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물 공급량이 하루 약 6800만 리터로 줄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싱가포르 섬의 영구방어시설은 모두 바다에서의 공격으로부터 해군기지를 지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섬의 북해안에는 방어시설이 없었다. 이는 당연한 일로 싱가포르 방어의 목적이 구원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해군기지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종방어선은 남부 조호르였다. 따라서 안 그래도 빠듯한 예산은 싱가포르 섬의 북해안 대신 남부 조호르에 방어시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다. 영국원정군이 프랑스에서 대패한 직후인 1940년 7월에 유사시 극동에 함대를 파견하는 안이 사실상 폐기되었을 때 싱가포르 북해안에 대한 방어시설 건설을 서둘러야 했으나 아무도 그런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놀라운 점은 일본군이 1941년 12월 8일에 말레이를 침공한 이후에도 싱가포르 섬 북해안의 방어시설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ABDA 최고사령관 웨이벌 대장의 거듭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퍼시벌 중장은 싱가포르 시민들의 사기 저하를 이유로 섬의 북해안에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일본군 상륙 이후 실로 6주 이상이 지난 1942년 1월 23일에야 섬의 북해안에 방어시설 건설을 위한 정찰을 실시했고 그로부터 5일이 지난 28일에야 싱가포르 섬 방어계획을 웨이벌 대장에게 제출했다. 이후 2월 초부터 방어시설 건설에 들어갔으나 이미 늦었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훗날 싱가포르 섬의 방어시설은 육군성의 계획에 따라 건설하게 되어 있었고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싱가포르의 행정기구나 해군이 말레이 사령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따랐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의 상륙 이후로는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싱가포르 식민상 더프 쿠퍼의 지원을 받아 싱가포르 섬 북해안에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당시 퍼시발 중장이 처했던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개전 이후에도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건설되지 않은 사태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현장 지휘관이었던 그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말레이 반도로부터 영국군의 주력이 철수하기 전까지 싱가포르 섬의 방어는 싱가포르 요새 사령관(singapore Fortress Commander)인 케이스 시몬스 소장이 책임지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를 상실한 후 퍼시발 중장은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를 재편했다. 해안방어는 계속 요새사령관이 맡았으나 대공방어는 말레이 사령부가 직접 지휘했다.
(싱가포르 섬의 15인치 해안포. https://en.wikipedia.org/wiki/Johore_Battery)
해안포대는 해군기지와 해협의 동쪽 입구를 지키는 창이화력사령부(Changi Fire Command)와 케펠 항 및 해협의 서쪽 출구를 지키는 페이버화력사령부(Faber Fire Command)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사령부가 가진 해안포는 15인치 5문, 9.2인치 6문, 그리고 6인치 16문이었다. 일본군이 북쪽으로부터 침공했기 때문에 이들 해안포는 원래 예상했던 바다가 아닌 북쪽으로 포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우선 해안포 중 15인치 포 1문을 포함한 일부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 또한 해안포는 대부분 함정에 효과적인 철갑탄을 보유했고 지상군에 효과적인 고폭탄은 부족했다. 그나마 고폭탄을 많이 가진 9.2인치 해안포가 1문당 약 30발의 고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측이 어려웠다. 관측병과 포대를 연결할 통신장비가 부족했으며 제공권을 빼앗겨 항공관측도 불가능했다.
(싱가포르 해안포대의 위치. http://www.avalanchepress.com/GunsOfSingapore.php)
섬의 남해안에는 적의 상륙에 대비한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창이로부터 약 32km 에 걸친 방어선에는 약 550m 마다 콘크리트 특화점이 있었으며 대전차 장애물 및 나무로 만들어진 대주정 장애물, 18파운드 야포, 지뢰와 철조망이 해안을 지켰다.
(1942년 초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말레이 반도에서 대량의 대공포가 철수했다. 그리하여 1월 말이 되자 싱가포르 섬의 대공포는 중대공포 4개 연대, 경대공포 2개 연대에 달하여 총 150문에 달했으며 탐조등 1개 연대가 밤하늘을 밝혔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를 잃으면서 조기경보기능이 쇠퇴하여 대공포의 효율은 크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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