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말레이 반도 상실


1942년 1월 26일 저녁에 퍼시발 중장은 ABDA 최고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서해안에서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고 동해안에 일본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1주일 이내로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24시간 후인 27일 저녁에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에게 개인적으로 전문을 보내어 서해안에 전개한 부대의 주력이 포위되어 제압당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어 3-4일 이내로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또한 전투기는 9대만이 살아 남아 싱가포르의 비행장을 유지하기가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웨이벌 대장은 그날로 답신을 보내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하라고 허가했다.


28일 아침에 제3군단 사령부에서 퍼시발 중장, 히스 중장, 그리고 벤넷 소장이 참가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퍼시발 중장은 기존의 철수 계획을 하루 앞당겨 30일 밤에 모든 병력을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철수를 앞당긴 결정은 현명했다. 실제로 일본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스쿠다이를 일찍 점령하여 제3군단 주력을 포위격멸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제3군단 주력을 조호르에서 격멸하면 조호르 해협을 가로질러 위험한 상륙작전을 실시하지 않고도 싱가포르의 소규모 수비대를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영국군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섬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서 도로와 철도가 지나는 둑길(Causeway)을 거쳐 철수해야 했다. 따라서 둑길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다. 남부 조호르로부터 대공포들이 둑길로 집결하여 공습에 대비했다. 둑길의 말레이 반도 쪽 입구인 조호르바루는 제2고든대대를 배속받은 제22호주여단이 야포의 지원을 받아 지키고 둑길 입구 자체는 250명으로 줄어든 제2아길대대가 지켰다. 제말루앙을 지키던 제22호주여단이 조호르바루 방어명령을 받고 제말루앙을 떠남에 따라 일본군이 29일에 제말루앙을 점령했다.

 

(남부 조호르.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262)


제9사단은 빨라진 철수 시간표에 따라 세데낙에 있던 제8여단을 29일 밤에 450.5 마일 철도이정표 지역, 쿨라이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까지 철수시켰다. 이것으로 제22인도보병여단의 운명이 확정되었다.

간선 도로 상의 나마지에 농원을 떠나 31마일 이정표 지역의 아예르벰반으로 철수한  제27호주여단은 29일 아침에 일본보병제21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저공비행하는 항공기와 야포의 지원을 받아가며 거세게 몰아 붙였다. 호주군은 제29 및 제30야포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백병전까지 불사하는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의 맹공을 막아내었다. 하루 종일 격전이 이어진 끝에 저녁이 되자 결국 지친 일본군이 공격을 중단했다. 호주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25명으로 전투의 격렬함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29일 저녁에 제27호주여단은 사전 계획에 따라 방어선을 떠나 쿨라이 서쪽 5km 지점인 23마일 이정표 지역으로 철수했다. 호주군의 기세에 눌린 일본군은 철수 행렬에 간간이 포격을 가할 뿐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 30일 오후에 제27호주여단은 쿨라이 부근의 21마일 이정표 지역으로 이동했고 제8여단은 쿨라이 시내로 들어가서 자전거를 타고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 정찰대를 쫓아내었다. 30일 밤에 서부부대는 세나이를 거쳐 테브라우 환상도로를 따라 둑길로 향했다. 따라서 제11사단은 스쿠다이에서 둑길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를 따라 철수할 수 있었다.

서해안을 지키던 제11사단도 철수를 시작했다. 베눗을 지키던 제53여단은 29일 아침에 이동을 시작하여 그날 밤에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했다. 폰티안케칠을 지키던 제28여단은 29일 저녁에 스쿠다이로 이동한 다음 30일에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했다.


1월 31일 오전 5시 30분까지 제3군단 주력은 싱가포르에서 징발하여 조호르바루로 파견한 버스를 타고 둑길을 건너 싱가포르 섬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교통통제는 훌륭하여 조호르바루의 병목지점에서 적체 현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철수를 24시간 앞당긴 덕분에 일본군의 추격은 아직 닿지 않았으며 달이 밝았음에도 철수 행렬에 대한 일본기의 공습도 없었다. 제3군단의 주력이 철수를 마치자 후위를 맡아 조호르바루를 지키던 제22호주여단이 오전 7시부터 철수했으며 이어서 둑길 입구를 지키던 아길대대마저 철수하여 오전 8시 15분에 마지막 병사가 둑길을 건넜다.


이어서 둑길을 파괴했다. 둑길의 길이는 약 1km 이고 폭은 20m 정도였다. 대량의 폭약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병대는 해군의 폭뢰까지 사용하여 폭파시켰다. 그 결과 둑길의 약 50m 구간이 사라지고 바닷물이 들어찼다. 사실 썰물시에는 끊어진 부분의 깊이가 1.2m 정도였기 때문에 걸어서 건널 수 있었으나 공격로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영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일본제5사단이 남하했다. 철도를 따라 남하하면서 제22여단을 분쇄한 일본보병제9여단은 31일 새벽 1시에 쿠라이 시가지 북쪽에 도달했다. 간선도로를 지키던 제27호주여단을 남쪽으로 쫓아낸 보병제21여단은 30일 새벽 2시에 아예르벤밤을 점령했고 다음날 쿠라이에서 제9여단과 만났다. 이후 제9여단은 철도를 따라, 제21여단은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두 부대 모두 31일 저녁에 조호르바루에 도착했다.

서해안의 근위사단도 진격을 시작했다. 근위보병제4 및 제5연대가 29일에 베눗, 30일에 폰티안케칠을 점령했으며 31일 저녁에 싱가포르 섬의 서북방에서 조호르 해협에 도착했다.

제18사단은 30일 저녁까지 제5사단의 북쪽인 클루앙에 집결하여 싱가포르 공격을 준비했다.

이제 영국군은 말레이 반도를 완전히 빼앗겼으며 일본군이 조호르 해협에 도달하면서 싱가포르 해군기지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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