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제15여단의 탈출


1942년 1월 24일 아침 현재 제3인도군단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동해안에서는 동부부대가 메르싱 강을 경계로 일본군과 접하고 있었다.

간선도로에서는 서부부대가 포진해 있었다. 제9사단(제 8 및 제22인도여단)은 제5 및 제88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아 클루앙을 지키고 있었고, 제27호주여단은 제2/15야포연대와 제155야포연대 1개 포대의 지원을 받아 아예르히탐을 지켰다.

서해안에서는 폰티안케칠에 사령부를 둔 제11사단이 제135야포연대와 제155야포연대 1개 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제15여단은 바투파핫에서 일본군과 접하고 있었고 제28여단은 폰티안케칠에 있었으며 제53여단은 스쿠다이를 떠나 베눗으로 이동 중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1월 24일에 싱가포르 섬으로의 철수를 위한 개략적인 명령을 내렸다.


23일에 바투파핫으로 돌아온 제15여단은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근위보병제4연대의 주력이 24일 밤에 바투파핫의 북쪽 및 북동쪽으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가해왔다. 25일 아침에 제15여단장 찰렌 대령은 제11사단장 키 소장에게 다시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키 소장은 25일 오후에 퍼시발 중장과의 회의에서 메르싱-클루앙-바투파핫 방어선을 포기한다는 결정이 날때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그동안 남쪽을 살피러 갔던 제15여단의 정찰대가 셍가랑 북쪽의 고무농원에 숨어있던 1개 대대 규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말라카에서 주정을 타고 남하하여 16일에 바투파핫 남쪽에 상륙했던 근위보병제4연대제1대대였다. 찰렌 대령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키 소장은 즉시 히스 중장에게 제15여단의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역시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제53여단은 25일 아침에 탄약을 실은 트럭과 함께 베눗에 도착했다. 당시 제53여단은 3개가 아닌 2개 보병대대(제6노퍽 및 제3/16펀자브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대대는 4개가 아닌 2개 보병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베눗에서 제3기병연대의 2개 중대와 1개 야포대가 배속되었다. 듀크 여단장은 베눗에 사령부를 차리고 1개 중대를 렝깃에 수비대로 파견한 다음 제6노퍽대대에게 탄약트럭을 호위하면서 셍가랑으로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8시에 노퍽대대의 선두가 셍가랑에 도착했을 때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서 노퍽대대의 후위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시내로 들어갔다. 일본군은 그 지점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으며 25일 저녁까지 셍가랑-렝깃 도로에 몇 개의 바리케이드를 더 만들었다.


1월 25일 오후 3시 25분에 서부부대사령부에서 퍼시발 중장이 주관하는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25일 밤을 기하여 방어선을 약간 물리기로 결정했다. 서해안의 제15여단은 바투파핫을 떠나 셍가랑까지 후퇴할 것이었다. 서부부대는 간선도로 상의 사용강 정류장-48마일 이정표 선까지 철수하고 동부부대는 제말루앙까지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서해안을 담당한 제11사단은 제3군단 직속에서 벗어나 서부부대 휘하로 들어갔다. 


(남부 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46)


제15여단은 1월 26일 오전 4시에 강상포함 드래건플라이의 포격 지원 아래 근위보병제4연대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바투파핫을 떠나 아침에 셍가랑에 도착했다. 셍가랑 남쪽에는 이미 일본군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상태였는데 도로 양옆은 늪지라 차량은 통과가 불가능했고 보병도 겨우 통과할 정도였다. 제15여단은 26일 오전에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려고 3번이나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드래건플라이와 같은 급의 강상포함인 그래스호퍼. https://en.wikipedia.org/wiki/HMS_Grasshopper_(T85)


베눗에 있던 제53여단장 듀크 준장은 26일 오전 10시 30분에 렝깃 북방에 일본군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직후 제11사단장 키 소장이 여단사령부에 들이닥쳐서 지금 장장 병력을 보내어 렝깃 북쪽의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라고 윽박질렀다. 시간에 쫓긴 듀크 준장은 제대로 작전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 채 동원할 수 있는 장갑차, 브렌건캐리어, 포병을 끌어모아 트럭에 태운 보병과 함께 제135야포연대장 벤함 소령의 지휘 아래 오후 12시 30분에 렝깃 북쪽으로 파견했다. 이 부대는 렝깃 북쪽에서 일본군의 바리케이드를 공격하던 중 강력한 역습을 받아 포병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벤함 소령을 태운 브렌건캐리어는 전투 와중에 바리케이드를 통과했다. 


26일 저녁에 근위보병제5연대가 바투파핫과 셍가랑을 우회하여 렝깃을 공격했다. 렝깃을 지키던 1개 중대는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자정이 되기 전에 렝깃이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이로써 4개 대대(영국대대, 제5 및 제6노퍽대대, 제2캠브리지셔대대)로 이루어진 제15여단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렝깃 북쪽의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벤함 소령의 브렌건캐리어는 이후 5개의 바리케이드를 더 통과하여 27일 오후 12시 30분에 셍가랑에 도착했다. 벤함 소령의 보고를 들은 제15여단장 찰렌 대령은 자신이 이미 포위되었으며 편제를 유지한 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15여단은 26일 오후에 모든 화포와 차량을 파괴하고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을 적십자 기가 걸린 건물에 수용한 다음 도보로 셍가랑을 탈출했다.


탈출 행렬은 크게 두개로 나뉘었다. 약 1,20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은 지형에 익숙한 말레이 경찰대 장교의 안내를 따라 해안도로 동쪽을 따라 내륙으로 탈출하여 27일 오후에 완전히 지친 상태로 베눗에 도착했다. 


찰렌 대령이 이끄는 주력은 해안도로 서쪽을 따라 해안 쪽으로 탈출했는데 26일 밤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나 발이 묶이고 말았다. 찰렌 대령은 정찰대를 이끌고 다른 길을 찾아보다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여단지휘권을 이어받은 모리슨 중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가 27일 정오 경에 셍가랑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해안에 도달했다. 여기서 모리슨 중령은 작은 보트 하나를 구해 여단부관인 라만 소령을 제11사단 사령부가 있는 폰티안케칠로 파견했다. 라만 소령은 27일 밤에 무사히 폰티안케칠에 도착하여 제11사단장 키 소장에게 상황을 알렸다. 키 소장의 보고를 받은 말레이 사령부는 제15여단을 해상철수 시키기로 결정했다.


싱가포르에서 달려온 포함 드래건플라이와 스콜피온이 몇 척의 주정과 함께 해상철수를 실시했다. 철수작전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1월 28일 밤부터 31일 밤까지 4일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2월 1일 아침까지 해안에서 기다리던 약 1,500 명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로써 육로로 철수한 병력을 합쳐 약 2,700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비록 화포, 차량 및 장비를 모두 잃고 부상자들을 남겨두고 와야 했지만 제15여단에서는 파릿술롱에서 포위당했던 제45여단의 3배 가까운 병력이 탈출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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