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항공작전(1942.1.15-31)
1942년 1월 15일 - 24일에 걸쳐 연합군 항공기의 숫자는 평균 폭격기 74대, 전투기 28대였다. 여기에 대하여 일본군은 태국 남부와 말레이에 폭격기 250대와 전투기 150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빈약한 연합군 항공력은 대부분 싱가포르로 접근하는 증원선단 호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버팔로 5-6대 정도로 이루어진 편대가 세가맛 및 무아르 전선을 기총소사하기도 했고 전투기의 호위를 받는 폭격기 소수가 무아르와 게마스 남쪽의 일본군 수송대나 병력을 폭격하기도 했다. 또한 소수의 허드슨, 블레님, 빌데비스트 등이 쿠알라룸푸르와 쿠안탄 비행장을 야간폭격하여 약간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월 20일에는 자바에 배치된 미육군항공대의 B-17 중폭격기 5대가 팔렘방을 경유하여 2,400km 를 날아와 승게파타니 비행장을 폭격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이런 폭격은 규모가 작아서 의미있는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서부부대가 세가맛에서 철수하면서 말레이 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비행장들이 사용불가 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카항 및 클루앙 비행장은 1월 23일까지 인원 및 운반가능한 장비를 철수시켰으며 24일에는 건물, 장비, 연료를 모두 파괴하고 활주로에 구멍을 뚫었다.
이로써 연합군 항공력은 싱가포르 섬의 4개 비행장에 집결했다. 이 상태에서는 표적이 제한되고 비행장에 비행기들이 몰려있어 한번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비행기들을 분산해야 했다.
우선 네덜란드 비행기들이 자바로 돌아갔다. 이어서 23일부터 27일에 걸쳐 블레님 3개 비행대대와 허드슨 2개 비행대대가 지상요원들과 함께 자바로 떠났다. 28일에는1월 7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던 카탈리나 비행정 3대가 자바로 날아갔으며 일부 비행기들은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로써 1월말까지 육군이 통제하던 소드피시 3대를 제외한 모든 폭격기들이 싱가포르를 떠났다.
일본군은 1942년 1월 15일부터 싱가포르에 대한 공습을 다시 강화했다. 27대 이상의 일본폭격기가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매일 싱가포르를 폭격했으며 어떤 날은 여러번 폭격하기도 했다. 주요 목표는 비행장 및 해군기지였으나 가끔씩 시가지도 폭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1942년 1월 한달동안 싱가포르에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 600명, 부상 1,500명 정도이다.
허리케인을 장비한 제232전투비행대대는 1월 20일에 첫 전투를 치렀다. 그날 90대 이상의 일본폭격기가 싱가포르를 폭격했고 허리케인이 날아올라 폭격기를 호위하던 일본전투기와 교전했다. 3대의 허리케인이 격추되어 대대장을 포함한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기는 1대가 격추되었다. 다음날인 21일에 100대의 폭격기가 시가지를 폭격했을 때 다시 허리케인이 날아올라 요격하다가 2대가 격추되었다. 이틀 동안 영국조종사들은 일본기 14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22일에 인도차이나에서 27대의 해군폭격기가 날아와 6,600m 고도에서 싱가포르를 폭격했다. 영국군은 15분 전에 경고를 받고 허리케인과 버팔로를 띄웠다. 이들은 폭격기를 호위하던 제로기와 격돌했고 허리케인 5대와 버팔로 4대가 격추되었으며 일부 기체는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연합군 조종사들은 일본기 6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1월 15일에서 31일까지 연합군 항공기 26대가 파괴되고 10대가 손상되었다. 연합군 조종사는 같은 기간에 일본기 26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허리케인의 성능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허리케인은 6,000m 이상의 고도에서는 제로기보다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으나 그 이하 고도에서는 속력과 기동성에서 밀렸다. 게다가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필요한 흡기필터를 장착한 상태여서 최고 속력이 시간당 50km 정도 줄었다. 1월 8일에 51대가 도착한 허리케인은 1월 28일이 되자 17대가 파괴되고 13대가 수리 중이어서 21대만이 가용했다. 버팔로는 6대만 남았다.
(호커 허리케인.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Hawker_Hurricane)
증원선단이 싱가포르로 접근하면서 21에서 30일 사이에 연합군 공군은 선단 호위에 만전을 기했다. 매일 8대의 허드슨과 글렌마틴 폭격기가 나투나 제도까지 날아가 적의 함대 출현에 대비했다. 그동안 카탈리나 비행정은 싱가포르 남쪽에서 대잠초계 활동을 했다. 선단이 전투기 행동반경 내로 들어오자 6대의 버팔로가 하루종일 선단 상공을 지켰다. 이외에도 폭격기와 뇌격기가 적의 함대 출현에 대비하여 즉각 이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활주로에서 대기했다.
이러한 호위 덕분에 증원선단은 무사히 도착했다. 1월 22일에 제44인도보병여단(제6/1, 제6/14 및 제7/8펀자브대대)이 인도군 보충병 7,000명과 함께 도착했으며 24일에는 제2/4호주기관총대대가 1,900 명의 호주군 보충병과 함께 도착했다. 29일에는 제18영국사단(사단사령부, 제54 및 제55보병여단)이 도착했다.
제44여단의 훈련상태도 제45여단과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다. 1941년 6월에 제44여단이 창설될 때 대부분의 부대가 인원부족으로 많은 병력을 징집병으로 충당해야 했으며 인도에서의 훈련은 전적으로 중동에서의 사막전투에 대비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창설 이후 12월까지 6개월 동안 대규모의 우유짜기로 그나마 제대로 훈련받고 경험있는 장교와 병사들을 급속히 팽창하는 인도 육군의 다른 부대에 뺏겼다. 우유짜기로 유출된 숫자는 정원 786명의 보병대대에서 평균 250명에 달했는데 그 빈자리는 다시 경험없는 신임 장교와 훈련소에서 갓 나온 신병들로 채워졌다. 신병들의 복무기간은 보통 4-5개월 정도였으며 일부는 심지어 훈련소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승선하여 말레이로 왔다. 따라서 경험이 풍부한 고참병사는 거의 없고 신병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장교 또한 마찬가지로 보병대대의 장교 33명 중 전쟁 발발 전부터 근무했던 정규 장교는 평균적으로 3명 뿐이고 나머지는 전시 비상계획에 따라 대량으로 속성 배출되어 임관된 장교였다. 이런 비상 임관 장교 중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이 12개월을 근무했는데 이는 부하들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를 배우기에도 빠듯한 기간이었다.
7,000 명의 인도군 보충병은 훈련상태가 더 엉망으로 대부분 기초군사훈련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징집병으로 지휘관을 맡을만한 고참병사나 부사관, 장교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보충병들은 싱가포르 도착 후에 추가 훈련을 받아야만 했으며 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인도육군이 급팽창하던 상황에서 기존 부대로부터 경험이 풍부한 장교와 병사들을 빼돌려 새로 편성되는 부대의 기간 전력으로 삼는 우유짜기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로 파병되는 부대 입장에서 우유짜기는 자살을 강요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주군의 경우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훈련상태는 양호하여 바로 싱가포르 북해안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주보충병 1,900명의 훈련상태는 충격적이었다. 일부는 입대한 지 15일 만에 승선했다. 당연히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병사는 거의 없었으며 일부는 소총 다루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애송이들을 파견한 호주군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중동에는 독일군과의 전투로 단련된 호주군 16,600 명이 있었으며 호주 본토에는 민병대 87,000 명이 맹훈련 중이었는데 이들 중 12,500명은 개전 직후 AIF 로 편성될 만큼 훈련 상태가 좋았다. 따라서 호주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기초군사훈련도 마치지 못한 징집병 대신 실전경험이 있는 고참병이나 최소한 충분히 훈련받은 정예병 1,900 명을 파견하는 것은 가능했다.
1942년 1월 동안 싱가포르의 민간인 노동력 동원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민방위 사령관은 3군의 요청에 따라 노동력을 징발하여 필요한 곳에 투입할 임무를 맡았으나 수행이 불가능했다. 민간인 노동자들은 일본기의 공습이 집중되는 비행장, 해군기지 및 케펠항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는데 민방위 사령관에게는 강제로 일을 시킬 권한이 없었다. 결국 민간인 노동자가 가장 많이 필요한 이들 시설의 공사는 해당 부대가 병사를 동원하여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싱가포르의 전쟁위원회는 법을 바꾸어 민간인에게 강제로 일을 시킬 권한을 민방위 사령관에게 부여했다. 하지만 실제로 민간인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려면 총칼로 위협하기보다 위험수당을 주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는데 문제는 정부가 인부에게 지급할 수 있는 임금 상한선이 본국의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말레이 총독과 3군 사령관이 함께 런던에 임금 상한선의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정부가 1월 31일에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2월부터는 민간인 노동력의 사용이 원활해졌으나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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