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바투파핫의 위기


1942년 1월 19일에 ABDA 사령관 웨이벌 대장은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면서 만일 조호르를 상실할 경우 싱가포르가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전했다.

다음날인 20일에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 벤넷 소장, 그리고 요새사령관 프랭크 시몬스 소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극비리에 조호르 철수 계획을 알렸다. 이에 따르면 동부부대는 메르싱, 서부부대는 아예르히탐, 그리고 제11사단은 서부해안도로를 거쳐 조호르 남부의 조홀바루에 도달한 다음 해협을 건너 싱가포르로 철수할 것이었다. 철수 과정은 제3인도군단이 조율할 것이었다. 철수 도중 후위부대는 적절한 곳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칠 것이었다.

웨이벌 대장은 20일 저녁에 런던의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영국군이 빠른 시일 내에 메르싱-클루앙-바투파핫 선에서 물러나 싱가포르 섬으로 후퇴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한 후 21일에 자바에 있는 ABDA 사령부로 돌아갔다.

영국참모본부는 말레이의 상황에 대해 논의한 후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 방어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안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1. 해안포를 육지로부터의 침공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2. 조호르 수로를 가로지르는 방죽길을 파괴할 것

3. 섬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보트와 주정을 파괴할 것

4. 해안에 배치된 기관총 일부를 섬의 북쪽 방어선에 옮길 것

5. 상륙한 적군의 예상 진격로를 따라 여러 개의 독립적인 방어 진지를 설치할 것

6. 차량화된 강력한 기동예비대를 확보할 것


처칠 수상은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없다는 전문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의 땅은 인치 단위로 끝까지 지켜야 하며 시가지의 폐허 속에서 기나긴 전투를 치르기 전에는 항복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웨이벌 대장에게는 싱가포르 절대 사수를 명했지만 사실 처칠 수상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21일에 참모본부에 비밀 각서를 보내어 싱가포르로 향하고 있는 증원선단을 버마로 돌리는 문제에 대하여 참모총장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 비밀 각서를 받아든 영국군 수뇌부는 싱가포르 상실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참모본부는 퍼시발 중장에게 싱가포르를 초토화할 수 있도록 폭파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으며 해군성은 말레이 해군사령관에게 해군병력 및 해군공창 기술자들의 철수계획을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퍼시발 중장은 폭파준비를 한다면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려서 통제불능 상태가 될 것이라면서 적이 싱가포르 섬에 상륙하기 전에 폭파준비를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답했다. 참모본부는 받아들였다


21일 밤에 런던에서 열린 국방위원회에서 참석자들은 싱가포르로 가고 있는 증원선단을 버마로 돌릴 것인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증원선단이 도착해도 싱가포르 함락을 겨우 2-3 주 정도 지연시킬 정도라면 버마로 돌려야 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어쩌면 3개 여단과 보충병 7,000 명에 달하는 증원군이 일본군의 전진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린 것은 호주정부였다. 처칠 수상은 21일 밤에 있었던 국방위원회의 논의 사항을 호주정부에 비밀로 했으나 수완좋은 호주 연락관이 처칠 수상의 각서를 몰래 읽어보고 즉시 커틴 호주수상에게 보고했다. 23일에 격노한 커틴 수상이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강력하게 항의했다.

커틴 수상으로서는 화를 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호주는 이미 제8호주사단을 말레이로 보내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추가로 기관총대대 1개와 보충병 1,900 명이 싱가포르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6 및 제7호주사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하기로 약속하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싱가포르를 포기한다는 사실을 호주정부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마침 당시 라바울이 함락되면서 국가안보에 대한 호주국민들의 불안감이 최고로 높아져 있었기 떄문에 만일 호주정부가 영국의 싱가포르 포기를 덥썩 받아들였가는 국민의 분노를 사서 정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


물론 호주 수상이 화를 내었다고 하여 처칠 수상이 증원 선단을 그대로 싱가포르에 보낸 것은 아니었으며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증원군이 일본군을 막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커틴 수상의 전문은 처칠 수상에게 싱가포르를 포기할 경우 맞닥뜨릴 외교적 후폭풍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이 싱가포르를 포기할 경우 똑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탄 반도에 틀어박혀 처절하게 싸우고 있던 미군의 사기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처칠 수상은 필리핀에서 싸우고 있는 미군의 사기를 꺾음으로서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결국 증원선단은 예정대로 싱가포르로 향했다.


웨이벌 대장은 20일에 싱가포르에서 퍼시발 중장과 회담했다. 그는 일본군이 싱가포르 섬의 북서쪽 해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여기에 가장 강한 제18사단을 배치하고 북동쪽에 제8호주사단을 배치하라고 권고했다. 퍼시발 중장은 일본군이 북동쪽 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보고 제18사단을 북동쪽에, 제8호주사단을 북서쪽에 배치하는 안을 제시하여 웨이벌 대장의 동의를 받았다. 결국 웨이벌 대장이 옳았다.

퍼시발 중장은 23일에 싱가포르를 북부, 서부 및 남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제18사단이 북부, 제8호주사단이 서부를 맡았으며 남부에는 주로 인도부대들이 예비대로 주둔했다.


그동안 바크리와 파릿술롱 사이에서 제45인도보병여단을 분쇄한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은 상황을 판단했다. 제5사단의 진격 속도가 빨라 이제는 용펭을 점령하더라도 간선도로 상의 영국군을 포위하기에는 늦었다. 따라서 근위사단은 해안도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위보병제4연대가 바투파핫을 공격하는 동안 근위보병제5연대는 바투파핫-아예르히탐 도로를 건너 동쪽으로부터 렝깃을 점령함으로써 바투파핫의 영국군을 포위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하여 북상하려는 영국군을 차단하기로 했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1942년 1월 21일 오후에 제11사단장 키 소장과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이 바투파핫에 있는 제15여단사령부를 방문했다. 여단장 찰렌 대령은 후퇴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히스 중장은 바투파핫이 토브룩이 했던 것처럼 적의 진격을 막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열흘치 식량을 가진 제15여단이 일본군에게 포위되더라도 바투파핫에서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21일 저녁이 되자 일본군이 바투파핫의 북동쪽에서 제15여단과 접촉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 일부가 바투파핫-아예르히탐 도로의 72마일 이정표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22일 오전 6시 30분에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가 바투파핫 쪽에서, 제5노퍽대대가 아예르히탐 쪽에서 협격을 가하여 바리케이드를 뚫었다. 이날 하루동안 보급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뚫린 도로를 통하여 바투파핫으로 들어갔으나 제5노퍽대대는 아예르히탐을 지키느라 바투파핫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23일에 호주군이 아예르히탐에 도착하자 찰렌 대령은 제5노퍽대대를 바투파핫으로 불렀다. 그러나 23일 새벽에 일본군이 다시 72번 이정표 지역을 봉쇄했다. 제5노퍽대대는 봉쇄를 뚫는데 실패하여 바투파핫에 가지 못했다. 23일 정오에 제5노퍽대대는 키 소장의 명령에 따라 버스를 타고 탄약을 실은 트럭과 함께 아예르히탐을 떠나 바투파핫 남쪽의 폰티안케칠로 갔다. 24일에 북상하여 바투파핫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23일 하루동안 영국군은 클루앙-아예르히탐-바투파핫 선으로 물러났다. 부킷펠란독 북쪽에 주둔중이던 제53여단은 23일 오후에 철수하다가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24일 새벽에 아예르히탐에 도착했다. 제2로얄대대를 제27호주여단에 넘기고 2개 대대(제3/16펀자브대대, 제6노퍽대대)로 줄어든 제53여단은 24일 오전 중에 아예르히탐을 출발, 베눗을 지나 남부 조호르의 스쿠다이로 향했다.


그동안 바투파핫을 지키던 제15여단장 찰렌 대령은 처절한 고립감을 맛보고 있었다. 시가지 북쪽의 일본군은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는데 아예르히탐으로 통하는 도로는 막혔고 남쪽으로 뚫린 도로도 언제 막힐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23일 아침에 제11사단과의 무전마저 끊겼다. 자신의 처지가 바크리에서의 제45여단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찰렌 대령은 23일 오전에 제15여단을 이끌고 바투파핫을 떠나 남쪽 셍가랑으로 향했다. 도중에 제11사단과의 무전이 복구되었다. 제11사단장 키 소장은 찰렌 대령에게 정지명령을 내렸으나 차마 바투파핫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내리지 못하고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보고했다. 이제 조호르 작전을 총괄하게 된 히스 중장으로서는 바투파핫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바투파핫이 함락되면 제말루앙-클루앙-아예르히탐-바투파핫을 잇는 방어선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럴 경우 카항과 클루앙의 비행장이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데 그건 증원군을 실은 선단이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히스 중장은 퍼시발 중장과 상의한 후에 제15여단에게 바투파핫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제15여단은 23일 저녁에 바투파핫으로 돌아와 텅 빈 시가지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일본군 정찰대를 쫓아내고 다시 시가지를 점령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