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무아르 함락
1942년 1월 15일 아침에 무카이데 지대가 게마스에서 패배하자 제5사단 주력이 나섰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은 보병제9여단(보병제11 및 제41연대)에 무카이데 지대를 편입한 후 간선도로를 따라 게마스를 거쳐 바투아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보병제21여단(보병제21 및 제42연대)는 남서쪽 아예르쿠닝 방면으로 우회한 후 오피르 산 서쪽의 제맨타를 거쳐 세가맛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병제9여단은 무카이데 지대를 패배시킨 제2/30호주대대를 몰아내고 오후 10시에 게마스를 점령했다. 일부 병력이 철수하는 호주군을 추적했으나 후위부대의 빈번한 역습 때문에 주력을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16일 하루동안 부대를 정비하면서 공격 준비를 마친 보병제9여단은 17일 아침부터 바투아남의 제27호주여단 방어선에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서해안에서는 근위보병제4연대가 1월 14일 오후8시에 말라카를 점령했다.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다쿠마 중장은 무아르 강을 무사히 건너기 위하여 2개 연대를 따로 진격시켰다. 해안을 따라 진격한 근위보병제4연대가 무아르 시가지 정면에서 영국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근위보병제5연대가 무아르 강 상류에서 밤에 몰래 강을 건너 동쪽으로부터 무아르 시가지를 공격할 것이었다. 무아르 강을 건넌 후 제4연대는 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바투파핫을 점령하고 제5연대는 내륙으로 진격하여 용펭을 점령할 것이었다. 바투파핫에서 영국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제4연대 제1대대가 해상기동할 것이었다. 제1대대는 바투파핫 남쪽에 상륙하여 숨어 있다가 제4연대 주력이 바투파핫을 공격하면 해안도로를 점령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무아르 강을 지키던 영국군은 제45인도보병여단으로 1942년 1월 3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12일에 무아르에 배치된 제45여단은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완편 상태였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신병으로 이루어져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다. 여단장 허버트 던칸 준장은 제8호주사단장 베넷 소장의 명령에 따라 휘하 대대를 배치했다. 제7/6라지푸트소총대대는 무아르에서 조락까지 14km 의 전선을 지켰고 제4/9자츠대대는 그리섹에서 렝가까지의 24km 를 지켰는데 양 대대는 2개 중대를 다리 너머에 배치하여 유사시 대대가 양분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제5/18왕립갈월소총대대는 예비대로서 바크리 부근에 주둔했는데 1개중대는 심팡제람에 있었고 추가로 파릿자와에 분견대를 파견했다.
베넷 소장은 제45여단의 배치에서 초심을 잃었다. 제45여단의 원래 임무는 일본군이 무아르 강을 건너 최단거리로 용펭을 점령함으로써 서부부대의 보급로가 차단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넷 소장은 원래 목적을 잊어버리고 무아르 강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틀어막으려는 욕심으로 제45여단을 너무 넓게 배치했다.
무아르 시가지는 11일부터 매일 폭격을 받았다. 15일 아침에 일본군이 출격하여 케상-승게마티 지역에 주둔 중이던 라지푸트 소총대대의 2개 중대를 제압했는데 라지푸트 대대본부에서는 강 건너편에 파견한 중대 2개가 전멸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전 11시에 근위보병제4연대가 무아르 시가지 건너편의 강둑에 나타나 주정 몇 척을 띄우려고 하자 영국군이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의 신경이 온통 제4연대에 쏠려있는 동안 근위보병제5연대는 무아르 강 상류에 몰래 접근했다. 15일 밤 11시에 제5연대 제3대대가 무아르 강에 도달했다. 제3대대는 주변을 샅샅이 뒤져 작은 보트 3척을 찾았다.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넌 선발대는 남쪽 강둑에 매어져 있던 원주민들의 좀 더 큰 주정 몇 척을 찾았다. 이 주정을 이용하여 16일 오전 3시까지 제3대대 전체가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 인도군 순찰대가 이들을 발견했으나 겁을 먹고 도망쳤다. 황당하게도 이 병사들이 보고도 안하고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영국군은 기습을 당하기 전까지 일본군이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6일 동이 트자 근위보병제5연대 주력이 계속하여 강을 건너는 가운데 제3대대는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잠시 후 제3대대는 야영 중이던 제7/6라지푸트대대의 1개 중대를 만나 기습했다. 걸어총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영국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이어서 무아르 방면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오전 11시에 심팡제람에 도착하여 갈월대대와 라지푸트 소총대대에서 각각 파견된 2개 중대를 공격했다.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제45여단장 던칸 준장이 예비대로서 바크리에 주둔 중이던 갈월대대에게 1개 중대를 심팡제람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중대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바크리로 되돌아갔다. 그동안 갈월대대장은 부하를 이끌고 직접 정찰을 나섰다가 일본군을 만나 전사했다.
심팡제람을 지키던 2개 중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일단 막아내었으나 오후 들어 점점 더 많은 일본군이 밀려들었다. 결국 2개 중대는 심팡제람을 포기했다. 갈월중대는 큰 피해를 입고 바크리로 후퇴하던 도중 와해되었고 라지푸트 중대는 무아르로 후퇴했다.
무아르에서는 근위보병제4연대가 16일 오후에 주정을 타고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제65호주야포대가 포격을 가해 주정 1척을 격침하자 나머지는 되돌아갔다. 오후 늦게 근위보병제5연대 일부가 동쪽으로부터 무아르를 공격했다. 동쪽에서 공격해 온 일본군에게 영국군의 주의가 쏠리는 틈을 타서 근위보병제4연대가 무아르 강을 건넜다. 무사히 강을 건넌 제4연대는 무아르 시가지로 진입하여 중대 규모로 약화된 라지푸트 소총대대를 제압하고 대대본부를 점령했다. 라지푸트 대대장과 부대대장이 전사했으며 제65호주야포대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영국군은 파릿자와를 거쳐 바크리로 후퇴했다.
그리섹-판초르-조락 지역에 흩어져 있던 자츠대대는 16일 오전에 일본군이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대장은 반격을 위하여 흩어진 휘하 중대들을 무아르-렝가 도로의 12마일 이정표 지점에 집결시켰다.
16일 저녁이 되자 자츠대대를 제외한 제45여단은 무아르 강 전선에서 밀려나 바크리로 후퇴했다. 16일 하루만에 갈월대대는 1개 중대와 대대장을 잃었으며 라지푸트 소총대대에는 장교 2명을 포함하여 122명 밖에 남지 않았다.
무아르가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서부부대사령관 베넷 소장은 제27호주여단으로부터 제2/29호주대대를 파견했다. 당시 베넷 소장의 언행을 보면 그가 무아르를 공격한 일본군 병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29호주대대는 1개 중대와 1개 소대가 감편되었으며 대대장 존 로버트슨 중령은 베넷 소장으로부터 적의 병력이 약 200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는 2개 연대로 이루어진 근위사단 주력이 진격하고 있었다. 제2/29호주대대는 17일 오후에 바크리에 도착하여 시가지 서쪽에 방어선을 폈다.
1월 15일 오후 6시에 말라카를 떠나 해상기동으로 남하한 근위보병제4연대제1대대는 16일 오전 8시에 바투파핫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등대 부근에 상륙하여 근처에 펼쳐진 고무농원에 숨었다. 말레이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바투파핫 남쪽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듣자 서부부대의 보급로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데 서부부대에는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퍼시발 중장은 서부부대와 제3군단의 담당 구역을 변경하여 바투파핫을 포함한 서부부대의 보급로를 제3군단의 책임 지역에 넣었다. 동시에 불과 사흘 전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제53영국보병여단(듀크 준장)에게 아예르히탐으로 가서 제3인도군단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1월 17일 낮에 제53여단이 아예르히탐에 도착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제53여단을 제11사단에 배속했다. 제11사단이 조호르에 도착하자 히스 중장의 명령에 따라 제8여단장이었던 베르톨드 키 준장이 파리스 준장을 이어 사단장이 되었다. 파리스 준장은 원래 직위인 제12여단장으로 돌아가 여단을 재건하기 위하여 싱가포르로 갔다. 키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듀크 여단장은 제2캠브리지셔대대를 바투파핫으로 보내어 영국대대와 교대시켰다. 그리하여 바투파핫을 지키는 병력은 제2캠브리지셔대대, 제3기병연대의 1개 중대, 제1독립중대 및 말레이대대의 1개 중대가 되었다. 제6노퍽대대는 18일 아침일찍 용펭-무아르 도로가 좁아지는 78.5마일 지점에 있는 부킷펠란도와 부킷벨라를 점령하고 2개 소대를 전방에 파견했다. 1개 소대는 파릿술롱의 다리를 지키고 다른 소대는 주변 도로를 순찰했다.
17일에 서부부대사령부에서 베넷 소장, 키 준장 그리고 퍼시발 중장이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세가맛을 포기할 경우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반드시 방어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세가맛을 방어하려면 무아르 지역을 지켜야 했다. 따라서 16일에 무아르 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45여단을 강화해야 했다. 베넷 소장은 동해안의 메르싱을 지키던 제22호주여단으로부터 제2/19호주대대(찰스 앤더슨 중령)를 떼내어 제45여단에 배속했다. 대신 제53여단의 제5노퍽대대가 메르싱으로 파견되었다. 제2/19호주대대는 19일 오전 10시에 바크리에 도착했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제22호주여단의 정찰대가 1월 14일부터 엔다우 북쪽에서 일본군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6일과 17일에 엔다우와 메르싱은 폭격을 받았으며 호주 정찰대는 해안에서 일본군이 집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17일에 제2/19호주대대를 서쪽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엔다우를 포기하고 메르싱 강에 기대어 메르싱을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17일 밤에 제22호주여단은 메르싱 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호주군은 후퇴하면서 엔다우-메르싱 도로의 모든 다리와 메르싱 강의 모든 선착장을 파괴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19일 아침 6시를 기하여 동해안을 담당하는 동부부대를 창설하고 테일러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부부대는 제22호주여단(제2/18 및 제2/20대대), 제5노퍽대대, 자트/펀자브대대, 제2/17도그라스대대, 조호르의용대 2개 중대, 조호르의용공병대로 이루어졌다. 임무도 바뀌어 동부부대는 메르싱 대신 남쪽의 제말루앙-코타팅기 도로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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