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쿠알라룸푸르 함락
1942년 1월 4일에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이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에게 제안을 했다. 제3인도군단이 남하하여 조호르에 진입할 경우 자신의 지휘 아래 두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제8호주사단이 일본군 주력이 남진 중인 조호르 서부를 맡고 제3군단이 조호르 동부를 맡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과 제8호주사단의 결합이 지휘 및 행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낳을 것이며 전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말레이 반도를 가로질러 동서로 대규모 부대이동을 실시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베넷 소장의 제안을 거부했다.
다음날인 1월 5일에 퍼시발 중장, 히스 중장, 그리고 베넷 소장이 세가맛에서 회담했다. 참석자들은 쿠알라룸푸르를 잃으면 방어선을 메르싱-세가맛-무아르 선까지 단번에 끌어내려야 한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중간에는 도로망이 발달하여 일본군의 전차가 쉽게 방어선을 우회할 수 있었다. 다만 쿠안탄을 지키던 제9사단의 철수를 위하여 제3군단은 쿠알라룸푸르 지역을 1월 14일까지는 유지해야 했다. 퍼시발 중장은 이를 위하여 제45여단을 제3군단에 배속했다. 제45여단은 1월 3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말라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3군단은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후퇴하여 조호르 서부를 방어하고 제8호주사단은 조호르 동부를 맡을 것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를 가지고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에게 다음과 같이 날짜별로 후퇴 가능한 선을 제시했다.
1월 10일 : 쿠알라쿠부, 14일 : 울루얌, 16일 : 세렌다, 21일 : 세렘반-포트딕슨, 24일 : 탐핀
물론 이 시간표는 지켜질 수 없었다.
(말레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152)
서부 조호르로 남하할 일본군 주력과의 전투를 자신이 지휘하겠다는 베넷 소장의 제안은 다른 경로로 실현되었다. 슬림강 전선이 붕괴한 7일에 ABDA 최고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슬림강 패배의 보고를 들은 웨이벌 대장은 제3군단이 지속적인 전투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웨이벌 대장은 제3군단에게 쿠알라룸푸르를 최대한 오래 방어하되 일본군이 총공격을 실시하기 전에 도로와 철도를 사용하여 단번에 조호르 남부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3군단은 철수하기 전에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기 위하여 보유한 모든 폭약을 사용하여 다리와 도로를 철저히 파괴할 것이었다. 조호르에서 일본군의 주공을 저지하는 임무는 베넷 소장이 맡고 제3군단은 후방에서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할 것이었다. 동부 말레이에서 철수하는 제9인도사단과 1월 3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말라카에 주둔 중인 제45여단은 베넷 소장의 지휘를 받을 것이었다. 이러한 웨이벌 대장의 명령은 4일에 베넷 소장이 퍼시발 중장에게 제안한 내용과 비슷했다.
웨이벌 대장의 명령에 따라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 및 베넷 소장과 일련의 회의를 거친 후 1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세부 명령을 내렸다.
1.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부부대(Westforce)를 창설한다. 서부부대는 제8호주사단, 제9사단(제8 및 제22인도여단) 및 제45여단으로 이루어져 바투아남-무아르 선을 따라 조호르의 서북부를 방어한다.
2. 제3인도군단은 엔다우-클루앙-바투파핫을 잇는 도로와 그 남쪽인 조호르의 서남부와 동부를 방어하면서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한다. 동해안 메르싱에 주둔 중인 제22호주여단은 제3군단 휘하에 들어간다.
3. 제11사단(제15 및 제28여단)은 조호르에 주둔하면서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한다. 제12여단은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하여 재편성 및 재무장을 실시한다.
영국군이 조호르 방어계획을 짜는 동안 일본군도 조호르 점령을 위하여 일선으로 증원부대를 보내고 있었다. 1월 8일에 제5사단 보병제21연대가 많은 행정부대와 함께 싱고라에 상륙했다. 근위보병제5연대는 태국을 떠나 10일에 이포에 도착했다. 남방군 사령부는 보병제114연대를 중심으로 한 제18사단의 잔여 부대를 1월 말까지 엔다우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해군은 아남바스 제도를 점령하여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42년 1월의 전반기 동안 말레이에 전개한 일본기들은 제11인도사단을 공격하고 제3인도군단의 보급로를 공습했다. 이러한 공습으로 인한 직접 피해는 가벼웠으나 병사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사기를 떨어뜨려 제3군단의 패배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이때 일본군은 전투기의 호위없이 폭격기만으로 공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습 규모는 주로 3-4대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또한 공습 목표를 상급 부대에서 일관된 원칙에 따라 선정하지 않고 조종사들이 즉석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는 영국군에게 그나마 다행으로서 웨이벌 대장은 만일 일본군이 제공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했더라면 제3군단이 1942년 1월 전반기에 붕괴했을 것으로 보았다.
소규모의 영국 및 네덜란드 공군은 제3군단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1월 7일에 싱고라의 정박지와 철도 조차장을 폭격했으며 이포, 승게파타니 및 쿠안탄 비행장에 대해 소규모 공습을 반복했다.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섬에 대한 사진정찰과 함께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말레이 동해안과 북수마트라에 대한 정찰도 매일 실시했다.
일본군은 1월 둘째주부터 영국군 항공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섬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다. 연합군의 버팔로 전투기가 일본기를 잡으려면 7,200m 상공에서 대기하다가 기습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30분 전에 경보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빠른 전진으로 전방 관측소가 남쪽으로 밀려나고 레이더 성능은 아직 미흡하여 공습 30분 전에 경보하기는 어려웠다.
대공포의 대응도 한계가 있었다. 일본기는 대공포를 피해 주로 6,000m 높이에서 폭격했는데 이 고도까지 포탄을 쏘아올릴 수 있는 3.7인치 대공포는 40문이 채 되지 않았다.
1월 12일 오전 10시에 일본제12비행단의 전투기 71대가 호위하는 제7비행단의 중폭격기 68대가 텡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제488네덜란드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8대가 날아올라 압도적인 열세를 딛고 요격을 실시했으나 일본기를 격추하는데 실패했다. 오후 2시 30분에 제12비행단의 전투기 70대가 날아와 셀레타 비행장을 기총소사했다. 네덜란드의 버팔로가 다시 요격하여 1대를 격추했다. 이날 하루동안 버팔로 2대가 격추되고 5대가 손상을 입었다. 조종사 중 전사자는 없었으며 부상자는 3명이었다.
13일에는 전투기 20대의 호위를 받는 80대의 일본해군폭격기가 싱가포르를 공습했다. 마침 증원군을 실은 호송선단이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었으나 상공에 구름이 끼어 발각되지 않았다. 일본기는 구름 위에서 어림잡아 폭탄을 던졌는데 대부분 바다에 떨어졌으나 일부가 시가지에 떨어져 민간인 약 200명이 죽었다. 버팔로 20대가 요격했으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3대가 격추되었다.
호송선단은 최대한 빨리 하역을 실시한 후 싱가포르를 떠났다. 제18사단의 제53보병여단, 제6중대공포연대, 제35경대공포연대, 제85대전차연대가 상륙했다. 또한 상자에 포장된 허리케인 전투기 51대와 조종사 24명도 상륙했다. 허리케인은 최대한 빨리 조립한 다음 비행장으로 보내 비행시험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허리케인을 사용하여 중부 말레이에서 제공권을 잡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동안 중부 말레이에서는 쿠알라룸푸르의 함락이 눈 앞에 다가왔다. 슬림 강에서 대패하여 탄종말림을 포기하고 쿠알라룸푸르 북방까지 밀려난 제11사단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제12여단은 와해되었고 제28여단 또한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셀랑고르를 지키던 제15여단이 간선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일본군 주력을 막아야 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에게 10일 밤까지 쿠알라룸푸르를 방어한 후 11일 0시를 기하여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세렘반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쿠알라룸푸르 주변의 방어구역을 3개 지구로 나누었다. 간선도로지구는 제3/17도그라스대대를 증원받은 제28여단이 담당했다. 바탕베르준타이-라왕 도로를 포함한 중앙지구는 제22여단으로부터 제5/11시크대대를 증원받은 제15여단이 맡았다. 해안지구는 자트/펀자브대대와 제3기병연대가 담당했다. 제15여단과 제28여단은 담당 지구를 10일 오후 4시까지 지킨 다음 쿠알라룸푸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쿠알라룸푸르를 10일 자정까지 지킨 다음 11일 0시부터 차량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슬림강 전투에서 대승한 여세를 몰아 추격했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은 전투에 지친 보병제42연대 대신 와타나베 츠나히코 대좌의 보병제11연대를 선두에 세웠다. 보병제11연대는 8일 오후 4시에 제11인도사단 사령부가 있던 탄종말림을 점령한 후 남하하여 10일 아침부터 중앙지구와 간선도로지구의 영국군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15 및 제28인도보병여단은 일본제11연대의 강력한 공격에 맞서 10일 오후 4시까지 담당 지구를 방어한 다음 쿠알라룸푸르로 철수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제15여단의 제1/14펀자브대대와 제28여단의 제3/17도그라스대대가 전멸했다. 일본제11연대는 11일 오전 6시에 라왕을 점령한 다음 쿠알라룸푸르를 향하여 전진했다. 영국제11사단은 11일 0시부터 쿠알라룸푸르에서 철수를 시작하여 마지막 부대가 11일 오후에 쿠알라룸푸르 남쪽의 카장을 통과하여 철수했다.
해안지구에서는 7일 오전 3시에 이포를 출발한 근위보병제4연대가 클랑을 노리고 남하했다. 제4연대는 9일 밤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셀랑고르 강을 건넜다. 셀랑고르에서 제4연대제3대대는 주정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고 제4연대 주력은 동진하여 10일 오후가 되자 클랑 부근에 걸린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는 자트/펀자브대대장 찰스 테스터 소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자트/펀자브대대, 제3기병연대, 그리고 제73야포대로 이루어진 영국군은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 다리를 지켰다. 오후 4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영국군이 동쪽 바투티가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추격하여 밤까지 격전이 벌어졌으며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11일 오전 1시에 바투티가에 도착했을 때 영국군의 병력은 약 2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들은 바투티가에서 버스를 타고 카장을 거쳐 남쪽으로 철수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제4연대가 11일 정오에 클랑을 점령했다.
셀랑고르에서 주정에 타고 남쪽으로 향한 제4연대제3대대는 포트스웨튼햄 앞바다를 지나 11일 오후 5시 30분에 마리브에 상륙했다. 제3대대는 제11인도사단의 퇴로를 막기 위하여 쿠알라룸푸르 남쪽의 카장으로 돌진했다. 일본군은 11일 오후 9시에 카장을 점령했는데 몇 시간 전에 영국군의 마지막 부대가 통과한 후였다.
쿠알라룸푸르를 지키던 영국군이 철수하자 보병제11연대가 11일 오후 4시 30분에 쿠알라룸푸르 북쪽에 도달했고 오후 8시에 시가지로 진입하여 관공서를 점령했다. 다음날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이 쿠알라룸푸르에 사령부를 차렸다. 말레이연방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를 점령함으로써 제25군의 제1단계 작전이 끝났다.
제3인도군단과 북부 말레이에서 활동하던 영국항공부대의 근거지였던 쿠알라룸푸르에는 막대한 양의 보급품이 있었다. 영국군은 최대한 많은 보급품을 철도나 도로를 통하여 싱가포르로 빼돌렸으며 그러지 못한 보급품은 파괴했다. 쿠알라룸푸르와 포트스웨튼햄에 있던 막대한 양의 석유를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메웠고 비행장의 건물들은 파괴되었으며 활주로에는 구멍이 뚫렸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림강에서의 패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여 막대한 보급품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제3군단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철수를 계속하여 13일에는 후위부대가 탐핀에 도착했다. 제3군단은 13일 밤까지 서부부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클루앙-렝감 지역으로 후퇴했다.
동부 말레이를 지키던 제9인도사단은 슬림강 패배 이후 예정보다 빨리 서부 말레이로 철수했다. 11일에 제9사단의 선두인 제8여단이 기차를 타고 바투아남에 도착했으며 12일에는 사단 주력이 탐핀에 도착하여 서부부대사령관 고든 베넷 소장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이제 서부부대가 제3군단을 대신하여 북부 조호르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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