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슬림강 방어선 붕괴


1942년 1월 7일 아침에 일본군이 트롤락 지구에서 제12여단을 유린하는 동안 남쪽의 탄종말림에 사령부를 둔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상황 파악에 애를 먹고 있었다. 말레이 주둔 영국군의 고질적 문제인 무전기 부족 때문에 제11사단사령부와 제12여단과의 통신선은 철도를 따라 부설된 민간전화선 뿐이었는데 오전 6시 30분에 슬림강의 철교를 폭파하면서 끊겼다. 따라서 파리스 준장은 트롤락 지구에서 일어난 재앙의 규모를 몰랐으나 격전이 벌어졌고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전 7시에 캄퐁슬림 남쪽의 야영지에서 대기중이던 제5/14펀자브대대와 제28여단에게 설정된 방어선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제28여단 소속 대대들이 방어선으로 출발했다. 캄퐁슬림 부근의 방어선으로 북상하던 제2/9구르카대대는 오전 8시에 도로에서 일본전차대를 만났으나 공격당하기 전에 편제를 유지한 채로 도로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일본전차대는 제2/9구르카 대대를 무시하고 남쪽으로 사라졌다. 제2/9대대는 캄퐁슬림 방어선을 점령하고 후속할 일본군을 막을 채비를 서둘렀다.


잠시 후 일본전차대는 클러니 고무농원으로 이동 중이던 제2/1구르카대대를 따라잡았다. 도로에서 이동 중에 기습을 당한 제2/1구르카대대는 제압되어 붕괴했다. 일본전차대는 이어서 클러니 농원의 도로 양측에 방열하고 있던 제137야포연대의 2개 포대를 덮쳤다. 일본전차는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불과 몇 분만에 영국 포병대를 전멸시키고 다시 전진했다. 오전 8시 40분이 되자 일본전차대가 슬림강 지구의 동쪽 끝인 슬림강 다리에 도착했다.

당시 슬림강 다리는 40mm 보포스 대공포 4문을 보유한 홍콩싱가포르포병대 제16경대공포대의 1개 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후퇴한 병사로부터 일본전차대가 오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포수들은 대공포를 황급히 도로 쪽으로 조준했다. 잠시 후 일본전차대가 나타났다. 포수들은 선두 전차가 90m 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격을 가하여 여러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대공포중대에는 철갑탄이 없었으므로 일본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일본전차가 반격을 개시하자 대공포중대는 큰 피해를 입고 제압당했다.


슬림강 다리를 건넌 일본전차대는 오전 9시 30분에 다리 남쪽 3km 지점에서 북상 중이던 제155야포연대를 덮쳤다. 선두에 섰던 연대본부는 제압당했으나 뒤따르던 야포가 방열에 성공했다. 4.5인치 곡사포 1문이 빗발치는 일본전차의 기관총 세례를 무릅쓰고 불과 30m 거리에서 사격을 가하여 선두 전차를 파괴했다. 이 일격이 6시간 만에 제12여단을 와해시키고 제28여단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본전차대의 진격을 막았다. 위협을 느낀 일본전차대는 일단 물러났으며 오전 내내 제155야포연대의 포격에 시달리다가 오후가 되자 슬림강 다리를 건너 후퇴했다.


(슬림강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80)


남쪽의 탄종말림에서는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이 상황을 몰라 애태우고 있었다. 제12여단과의 연락수단인 전화선은 오전 6시 30분에 끊겼고 얼마 후 제28여단의 무전기도 일본전차에게 파괴당했다. 파리스 준장은 상황파악을 위하여 제11사단의 제1일반참모(GSO1 = General Staff Officer 1)인 해리슨 대령을 차에 태워 북쪽으로 파견했다. 해리슨 대령은 북상하다가 탄종말림으로 철수중이던 제350포대의 병사를 만났다. 제12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트롤락 지구에 배치되었던 제350포대의 패잔병들은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가 와해되었으며 일본전차대가 고속으로 남하 중이라고 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던 해리슨 대령은 운전병에게 계속 가자고 말했다. 슬림강 다리를 건너 클러니 고무농원으로 향하던 해리슨 대령은 동진하던 일본전차대와 만났다. 일본전차가 쏘아댄 기관총에 차량은 벌집이 되고 운전병이 다쳤지만 해리슨 대령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나무 뒤에 숨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일본전차대를 보며 해리슨 대령은 슬림강 다리가 함락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알릴 방법이 없었다. 이후 해리슨 대령은 자전거를 하나 주워서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클러니 고무농원에서 파괴되거나 버려진 야포를 보았고 농원 서쪽의 도로에서는 제2/1구르카대대가 제압당한 흔적을 보았다. 잠시 후 캄퐁슬림에 있는 제28여단사령부에 도착한 해리슨 대령은 영국군에게 일어난 재앙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파리스 준장은 오전 8시 30분에 놀라운 보고를 받았다. 일본전차대가 트롤락 지구를 통과하여 고속으로 남하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탄종말림 북쪽에 대전차포대를 배치하고 휘하 병력에게 전차 경보를 내렸으며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보고했다. 히스 중장은 즉시 라왕에 주둔 중이던 제15여단으로부터 제2/16펀자브대대를 떼내어 탄종말림으로 보냈다. 오전 10시에 제155야포연대로부터 슬림강다리 남쪽 3km 지점에서 일본전차대를 저지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파리스 준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그는 이날 아침에 벌어진 재앙의 규모를 알게 되었다.


오전11시에 제28여단장 셀비 중령은 캄퐁슬림 동쪽의 언덕에 제12여단장 스튜어트 중령과 함께 사령부를 차렸다. 제12여단은 4개 대대를 모두 잃었으며 제28여단은 제2/1구르카대대를 잃고 2개 대대만을 가지고 있었다. 셀비 중령은 2개 대대와 패잔병들을 지휘하여 캄퐁슬림을 7일 오후까지 지키다가 저녁이 되면 철로를 통하여 남쪽인 탄종말림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7일 오후가 되자 캄퐁슬림 북쪽에 일본보병제42연대의 제1 및 제2대대가 집결했다. 저녁이 되어 제28여단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이 추격하여 후위를 맡은 제2/9구르카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슬림강의 철교는 오전에 파괴되었지만 제3공병중대가 널빤지로 끊어진 부분을 연결했다. 따라서 차량이나 장비는 모두 버리고 철수해야 했다. 일본군이 추격하자 겁에 질린 제2/2구르카대대 병사 여러명이 강에 뛰어들었다가 급류에 휘말려 익사하거나 실종되었다.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병사들은 19km 를 걸어 8일 오전 3시에 탄종말림에 도착했다. 이날의 전투로 제12여단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제28여단은 전력이 1/3로 줄었다.

1942년 1월 8일 현재 제12 및 제28여단 소속 소총대대의 병력 수는 다음과 같다.(소총대대의 정원은 786명이다.)

제12여단 -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 : 113명,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 : 94명, 제5/2펀자브대대 : 81명, 제5/14펀자브대대 : 135명

제28여단 - 제2/1구르카소총대대 : 약간명, 제2/2구르카소총대대 : 약 400명, 제2/9구르카소총대대 : 약 350명

전사총서에 따르면 일본군의 전과는 확인한 영국군 시체 약 300구, 포로 약 1,000명이며 노획품은 야포 37문, 고사포 6문, 브렌건캐리어 84대, 차량 약 600대이다.


슬림강 전투는 일대 재앙이었다. 이 패배의 결과로 중부 말레이의 상실이 빨라졌으며 북부 조호르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여 당시 싱가포르로 접근하던 증원군이 무장하고 전투에 대비할 시간을 벌겠다는 계획이 결정적인 차질을 빚었다. 얼마 후 유효한 전력으로서의 제11사단은 사라졌다.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11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 전력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떄문이었다. 당시 제11사단에는 대전차포 연대가 있었으나 최전방의 제12여단에는 1개 대전차포중대만 주어졌다. 사단이 보유한 대전차지뢰는 1,400개가 넘었으나 제12여단에 주어진 건 24개였다. 제12여단은 이런 빈약한 대전차 전력과 몇 개의 대전차 장애물만 가지고 일본군과 맞서야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파리스 준장이 사단의 주방어선을 탄종말림으로 생각하고 슬림강 방어선은 단순한 임시지연지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슬림강 방어선의 목적은 도하점의 다리를 끊어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단순히 슬림강의 교량을 폭파하여 시간을 끌 생각이었으면 공병대와 엄호를 위한 약간의 병력만을 보내면 충분할 것을 2개 여단이나 배치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강력한 대전차 전력은 탄종말림에 남겨두고 2개 여단에 빈약한 대전차 전력만을 붙여 임시지연지역에 지나지 않는 슬림강 방어선에 배치한 것이 참패를 불러왔다. 


여단장들 또한 대전차포가 부족하면 주어진 야포를 대전차전력으로 전용하는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통신불량도 참패의 원인 중 하나였다. 무전기가 없어서 여단사령부는 휘하 대대의 상황을 알기 어려웠고 결정적인 순간 사태에 개입할수 없었다. 

결국은 주요 도로를 따라 전차를 대담하게 운용하는 전술에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인데 일본군이 이런 전술을 사용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영국군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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