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쿠안탄 함락


영국군과 일본군의 주력이 말레이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제9인도사단은 제8인도여단을 쿠알라리피스-제라툿 방면에, 제22인도여단을 쿠안탄에 배치하여 동부 말레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보병제56연대를 주축으로 한 다쿠미 지대는 1941년 12월 19일에 쿠알라크라이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트렝가누는 18일에 제56연대 제7중대가 이미 점령한 상태였다. 다쿠미 지대는 트렝가누를 통과하여 마랑, 둔군, 파카를 거쳐 25일에 추카이를 점령했다. 그동안 다쿠미 지대는 23일에 제22인도여단 정찰대와 접촉했을 뿐 영국군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남하 경로에는 걸어서 건널 수 없는 하천이 10개 정도 되었으나 영국군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에 공병이 만든 다리와 주정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건널 수 있었다. 다쿠미 지대는 12월 26일 정오부터 추카이 남쪽에서 케마만 강을 건넜는데 다리를 만들 수 없어 주정을 타고 건너야 했다. 케마만 강은 한번에 2개 중대를 수송할 수 있는 주정대가 1번 왕복하는데 40분이 걸리는 큰 강이었으나 영국군의 방해가 없어서 무사히 도하를 완료했다. 다쿠미 지대의 주력은 예상보다 빠른 27일 저녁에 쿠안탄 북방 25km 지점에 도달했다.

남방군은 보병제55연대를 쿠안탄에 상륙시킬 생각이었으나 다쿠미 지대의 전진이 빨라서 위험한 적전 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가 사라졌다. 결국 제55연대는12월 28일에 코타바루에 상륙하여 다쿠미 지대를 따라 쿠안탄으로 남하했다.


(쿠안탄)


쿠안탄에 배치된 제22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의 임무는 쿠안탄 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다. 비행장은 쿠안탄 강가에 펼쳐져 있었다. 페인터 준장은 해안으로부터 공격과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모두 대비해야 했다. 제2/18왕립갈월소총대대는 제2/12FFR(Frontier Force Regiment)대대의 1개 중대를 배속받아 쿠안탄에서 북쪽으로 18km 에 걸친 해안선을 방어했다. 제5/11시크대대는 쿠안탄 강을 지켰다. 제2/12FFR대대는 여단의 예비대로서 제란툿 도로에서 24km 서쪽에 떨어진 감방 부근에 주둔하면서 파항 강 상류 쪽에서 접근하는 통로를 방어했다. 여단은 제5야포연대와 제88야포연대의 1개 포대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는데 야포의 일부는 쿠안탄 강의 동쪽에 있었다. 비행장은 강의 서쪽, 해안으로부터 14km 떨어진 간선도로 부근에 있었다.


(말레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152)


서부 말레이의 전황이 악화되자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은 제9사단이 동서로 뻗은 제란툿-라우브-쿠알라쿠부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일본군의 좌익을 공격해 주길 원했다. 따라서 그는 제22여단이 쿠안탄 비행장을 지키려다가 큰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했다. 히스 중장은 28일에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만일 일본군이 북쪽으로부터 쿠안탄 비행장을 위협하면 전초와 정찰대를 제외한 제22여단의 주력은 쿠안탄 강 너머로 후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바스토우 소장은 페인터 준장을 찾아와 히스 중장의 의도를 전했다. 그러나 쿠안탄 비행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모든 병력을 쿠안탄 강 너머로 철수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해안을 지키던 제2/18왕립갈월소총대대는 그대로 전선을 지켰다.

그러자 29일에 히스 중장은 바스토우 소장에게 명백하게 철수를 명령하는 전문을 보냈다. 명령문에서 히스 중장은 퍼시발 중장 또한 쿠안탄 비행장 사수보다는 제22여단의 보존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쿠안탄 강 북서쪽의 병력을 모두 쿠안탄 강 너머로 철수시키라고 적었다. 나중에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이 자신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말했다. 당시 퍼시발 중장은 제22여단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오랫동안 일본군이 쿠안탄 비행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쿠안탄.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72)


바스토우 소장은 다음날인 30일에 페인터 준장에게 히스 중장의 명령을 전했다. 제2/18왕립갈월대대가 철수를 시작했을 때 다쿠미 지대의 주축인 제56연대가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다. 제56연대장 나스 요시오 대좌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제1대대가 해안을 따라 배치된 갈월대대의 주력을 견제하는 동안 제2 및 제3대대가 자보르 방면으로 우회하여 북쪽으로부터 쿠안탄 시가지를 공격, 점령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다. 제56연대 주력은 쿠안탄 북서쪽에서 다시 갈라져 제2대대가 북쪽에서, 제3대대가 북서쪽에서 쿠안탄 시가지에 접근했다. 퇴각하던 영국군 갈월대대의 2개 중대가 쿠안탄 북쪽에서 일본군 제2대대에게 차단당하여 전멸했다.


살아남은 갈월 대대의 병력들은 쿠안탄 시가지 남쪽의 나루터에서 쿠안탄 강을 건너 남쪽으로 철수했다. 쿠안탄 시가지에 진입한 일본제3대대가 나루터를 공격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으나 갈월대대의 후위부대가 치열한 시가전 끝에 막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포격을 받아 제3대대장이 중상을 입고 제12중대장이 전사했다. 한편 일본기들은 쿠안탄 강을 건너 병력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영국군 나룻배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나룻배 절반을 잃으면서 31일 새벽까지 모든 야포와 차량, 그리고 나루터에 도착한 병력을 강을 건너 철수시켰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일본제56연대가 31일에 쿠안탄 시가지를 점령했다.


이때 증원군을 실은 선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쿠안탄 비행장을 최소한 1942년 1월 5일까지 지키라는 명령이 제22여단에게 떨어졌다. 이제 병력이 300명 수준으로 떨어진 제2/18왕립갈월대대는 비행장에 집결했다.

일본군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1일 오후에 제56연대 제1대대가 쿠안탄 비행장의 북서쪽에서 쿠안탄 강을 건넜고 2일에는 제2 및 제3대대가 비행장 북쪽에서 강을 건넜다.


2일 저녁에 서부 말레이의 영국군이 캄파르 방어선을 포기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제 제9사단은 파항 지역에서의 철수를 위하여 쿠알라리피스-라우브-제란툿 지역에 집결해야 했다. 제22여단도 쿠안탄 비행장을 포기하고 제란툿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2여단은 비행장의 건물과 장비들을 파괴하고 활주로에 구멍을 뚫은 후 3일 오후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추격을 시작했고 오후 8시에 제56연대제1대대가 영국군을 따라잡았다. 후위를 맡은 제2/12FFR대대장 아서 커밍 소령은 1개 중대를 이끌고 2번에 걸쳐 도로에 매복하여 쫓아오는 일본군에게 기습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격전 끝에 중대는 병력이 40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추격하던 일본군도 제1대대장이 부상을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자 추격을 단념했다. 덕분에 여단 주력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커밍 소령은 빅토리아 십자장을 받았다. 제22여단은 4일 밤에 마란을 통과했으며 6일 밤에 제란툿 나루터를 거쳐 라우브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제 제22여단의 병력은 2/3로 줄어들었다.


제22여단이 철수하자 3일 밤에 일본군이 쿠안탄 비행장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영국군이 뚫어놓은 활주로의 구멍을 메우는 등 비행장을 정비하여 11일부터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해졌다.

다쿠미 지대는 쿠안탄 전투에서 영국군의 브렌건캐리어 7대, 자동차 57대, 박격포 7문, 기관총 13정, 그리고 탄약, 연료 및 보급품을 노획했다. 포로는 564명, 확인한 영국군 시체는 약 760구였다. 다쿠미 지대의 사상자는 약 150명이었는데 지휘관의 손실이 컸다. 제1 및 제3대대장이 부상당했고 중대장 2명이 전사했으며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개전 당시 보병제56연대의 대대장 3명 중 1명은 전사하고 2명은 부상을 당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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