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증원(2) - 한계


1941년 12월 25일까지의 증원결정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의 항공기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빅토리아포인트의 상실로 인하여 전투기는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당시 전투기가 있던 가장 가까운 항구인 더반에서 싱가포르 사이의 거리는 8,000km 나 되었다. 폭격기는 증원경로를 따라 싱가포르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증원경로는 멀고 위험했으며 중계지점의 지원 능력이 빈약하여 많은 폭격기들이 중간에 탈락했다. 실제로 12월 12일부터 이집트에서 블레넘 폭격기 18대가 출발했으나 12월 25일까지 싱가포르에 도착한 것은 7대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도중에 추락하거나 불시착했다.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해도 조종사들에게 현지 적응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포장되어 배로 수송된 허리케인 51대는 1942년 1월 8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나 이 전투기들을 조립하고 시험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2월 26일에 처칠 수상은 중동 총사령관 클로드 오킨렉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허리케인 전투기 4개 비행대대와 1개 기갑여단을 말레이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12월 31일에 더반에 입항한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이 포트수단으로 가서 허리케인 48대와 조종사 48명을 실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도미터블은 이후 지중해에서 파견된 호주구축함 3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동쪽으로 항진하여 수마트라나 자바로 허리케인을 날려보내고 허리케인은 급유를 받은 후 싱가포르로 향할 것이었다. 이러면 전투기의 조립 및 시험 기간을 없애 실전 투입을 앞당길 수 었다. 

또한 미제 경전차 50대로 이루어진 제7기갑여단도 말레이로 향할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12월 29일에 참모본부는 중동으로 향하던 중 더반에 입항한 제21경대공포연대, 제77중대공포연대, 그리고 허리케인 3개 비행대대를 위한 비행대 지휘부와 지상요원들을 싱가포르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클로드 오킨렉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Auchinleck)


말레이에 대한 위협이 커지면서 호주의 불안감이 높아졌다. 싱가포르에 주재하던 영연방판무관 비비안 보우덴은 12월 26일에 호주정부에 암울한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 여기서 그는 당시까지 결정된 영국의 증원 계획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싱가포르를 구하기 위해서는 당장 중동으로부터 충분한 숫자의 최신형 전투기와 실전경험을 가진 다수의 조종사들이 달려와야 했다. 또한 지상병력은 여단 단위가 아니라 사단 단위로 증원해야 했다. 싱가포르에 파견된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은 12월 18일과 23일에 호주 육군본부(Army Headquarter)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때까지 확정된 증원 병력으로는 전투에 지친 병력들을 교체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평가했다.


1942년 1월 1일에 영국참모본부는 새해를 맞아 전쟁 상황을 평가하고 대응 방침을 결정하여 전쟁내각의 승인을 받았다. 방어 면에서 싱가포르 방어와 인도양의 해상보급로 유지는 영국본토방어 및 해상보급로 유지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우선순위를 받았다. 공세 면에서 제1목표는 여전히 독일 타도였으며 따라서 극동에 대한 증원은 일본의 전진을 막는 수준으로 제한했다. 리비아에서의 공세는 극동에 대한 증원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추진하기로 했다.

참모본부는 이러한 상황판단에 따라 극동에 증원할 병력을 말레이에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 버마에 2개 사단과 1개 경전차대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2개 사단으로 결정했다. 또한 말레이의 목표 항공력을 8개 경폭격비행대대, 8개 전투비행대대, 2개 뇌격비행대대, 버마의 목표 항공력을 6개 경폭격비행대대, 6개 전투비행대대로 정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유지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진주만 기습과 말레이 해전으로 일본해군은 서부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고하게 틀어 쥐었으며 영국해군이 유럽과 지중해 전선에서 빼낼 수 있는 모든 함정을 싱가포르에 투입해도 간단히 분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참모본부는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참모본부의 결정에 따라 부대들이 싱가포르로 향했다. 봄베이에 기항 중이던 제18사단의 나머지 병력들이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중동 사령부는 제7기갑여단을 싱가포르로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주정부는 영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제6 및 제7호주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호주군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인도 총사령관 웨이벌 대장은 버마를 지킬 병력을 확보하는데 애를 먹었다. 인도로 오기로 했던 제18사단은 통째로 싱가포르로 갔으며 제17인도사단의 2개 여단도 싱가포르에 뺏겼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제17인도사단의 1개 여단 뿐이었다. 이론상으로는 1942년 상반기에 제14 및 제19인도사단이 준비될 것이지만 이들은 훈련도 부족하고 장비도 모자랐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증원병력이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도착 마감일은 제45인도여단의 경우 병력은 1942년 1월 3일, 장비는 6일, 제53영국여단(차량 및 야포 없음), 추가 허리케인 및 야포연대는 13일, 제44인도여단, 제2/4호주기관총대대 및 제8호주사단 증원병은 25일, 제18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31일, 그리고 제9 및 제11인도사단의 보충병은 2월 5일이었다.

제7기갑여단은 1월말까지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었다. 60,000 명의 병력과 8,000대의 차량을 보유한 호주군단의 수송을 위해서는 3개의 커다란 선단이 필요했다. 호주군단의 선두는 아무리 빨라도 2월 초가 되어야 호주를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증원 병력들은 서류에서만큼 강하지 않았다. 제44및 제45인도여단은 장비가 부족했으며 훈련을 마치지 못하여 전장에서 제 역할을 하려면 몇 달간 추가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훈련 부족은 제18사단도 마찬가지여서 중동에 도착한 다음 추가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또한 제18사단의 선발대인 제53여단은 긴 항해 끝에 차량, 야포, 그리고 적절한 정비 시설 없이 도착할 것이었다. 병사들은 좁은 수송선에 갇혀 수주간 항해하면서 체력이 약해졌으며 정글 전투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완전히 훈련되고 실전 경험이 있어서 충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대는 제7기갑여단과 호주군단이었으나 이들은 수송 순서가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촉박하고 선박은 부족했으므로 참모본부는 비록 전투력이 떨어지더라도 즉시 동원할 수 있으면서 말레이 부근에 있는 부대를 먼저 수송할 수 밖에 없었다.


개전 초기에 일본군이 버마 남단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가장 필요한 전투기의 증원이 지장을 받았다. 전투기는 상자에 포장하여 수송선에 실어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수송선의 느린 속력에다가 하역 후 조립 및 시험하는 시간 때문에 실전 투입이 늦어졌다. 수송선의 부족으로 충분한 지상요원 및 부품을 공급할 수 없어서 정비능력이 저하되었고  일본기가 지속적으로 비행장을 공습하는 바람에 새로 도착한 항공기의 전력화에 큰 지장을 받았다. 이런 요인들이 겹쳐서 항공력을 증강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극동에서 제공권을 확보할 수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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