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캄파르 전투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포트스웨튼햄에 기지를 둔 페락전대의 고속정 몇 척이 12월 28일에 트롱 부근에 로즈부대 병력을 침투시켜 일본군의 보급로를 공격했다. 습격조는 해안도로에 매복하여 일본군 트럭 몇 대와 장교를 태운 승용차 1대를 파괴한 후 포트스웨튼햄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여기에 고무된 영국군은 이런 공격을 반복하려 했으나 일본군이 이틀 후에 포트스웨튼햄을 폭격하여 페락전대의 기반인 보급함 쿠닷을 격침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페락전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싱가포르를 떠나 북상 중이던 고속정 5척이 공습을 받아 모두 격침 또는 좌초되자 페락전대는 두번 다시 그런 침투작전을 실시할 수 없었다.
히스 중장이 방어선으로 선정한 캄파르의 동쪽은 부장멜라카라고 부르는 정글로 뒤덮인 언덕이었다. 부장멜라카는 디팡 남쪽에서 시작하여 남북으로 14km, 동서로 10km에 걸쳐 있었으며 서쪽으로 간선 도로(Trunk Road)가, 동쪽으로는 사훔 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북서쪽은 탁 트인 주석광산 지대로 소화기의 사계가 1km 이상에 달했고 남서쪽에는 시슬리 고무농장이 있었다. 적이 캄파르를 우회하려면 바다를 통하든지 아니면 페락 강을 타고 내려와 남서쪽의 텔록안손을 점령해야 했다.
(캄파르 전투 상황도.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48)
캄파르 방어선의 중핵인 제15여단은 제88야포연대 및 제273대전차포대의 지원을 받아 캄파르 마을을 통과하는 간선도로를 따라 종심깊은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제28여단은 제155야포연대와 제215대전차포대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사훔도로에 종심깊은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28여단은 사훔도로를 지키는 동시에 일본군이 캄파르 마을을 공격하면 측면에서 적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적이 바다나 페락강을 통하여 텔록안손에 도달하여 캄파르 방어선의 후방을 위협할 경우에 대비하여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에 제137야포연대와 제215대전차포대의 2개 중대를 붙여 비도르에 주둔시켰다. 또한 제1독립중대를 텔록안손에, 제3기병연대를 우탄멜린탕에 배치했다. 제5/14펀자브대대, 1개 산포대, 그리고 1개 대전차포대는 사단예비대로서 테모에 주둔했다.
(페락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27)
12월 30일에 부장멜라카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제2/2구르카대대가 일본군의 정찰대를 발견했다. 같은 날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이 사단예비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제2/1구르카대대를 테모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제12여단장 셀비 중령은 최전방의 제2/2구르카대대를 후퇴시켜 제2/1구르카대대가 쓰던 방어선에 투입했다.
다음날인 31일에 영국군 정찰기가 서해안을 따라 남하 중인 일본군 주정을 발견했다. 이 주정은 보병제11연대 중심의 와타나베 지대를 수송하던 주정대의 일부였다.
일본제5사단장 마쿠이 다쿠로 중장은 제25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2월 25일에 보병제11연대장 와타나베 츠나히코 대좌에게 해상기동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페낭 섬 점령을 위하여 싱고라에서 소발동정 약 40척을 철도와 도로를 통하여 서해안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페낭 섬 점령이 현지에서 징발한 주정을 사용하여 실행되었기 때문에 소발동정은 하릴없이 알로스타 부근에 묶여 있었다. 일본군은 여기에 페낭에서 노획한 증기선과 주정 약 20척을 합쳐 해상기동을 위한 주정대를 편성했다. 제11연대를 주축으로 한 와타나베 지대는 단번에 쿠알라룸푸르까지 남하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31일에 좀 더 북쪽인 쿠알라셀랑고르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캄파르의 방어가 강력하여 제5사단 주력의 남하가 늦어질 가능성이 크고 쿠알라룸푸르 부근 해상에서 영국함정의 활동이 활발하며 페락전대의 기지인 포트스웨튼햄의 방어가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출항지인 루뭇에서 쿠알라셀랑고르까지는 직선으로 130km, 항해거리로 150km 가 넘는 거리였다. 아무리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해도 호위함정 1척도 없이 허약하고 느려터진 주정 60척에 1개 연대를 태워 150km 가 넘는 거리를 단번에 해상으로 기동한다는 것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도메이 통신사의 종군기자로 말레이 전투 당시 제25군을 취재했던 시노하라 시게루는 훗날
"이 해상기동은 '무식하면 용감하다' 는 경우로서 바다를 모르는 육군이니까 가능했던 발상"
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무모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군이 이토록 단순무식하게 해상기동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영국군이 허를 찔려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와타나베 지대가 주정을 타고 루뭇을 출발한 시간은 31일 새벽 1시였다.
31일 오후에 페락강을 감시하던 제1독립중대의 정찰대가 루뭇과 심팡암팟에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했다. 영국군은 캄파르 마을의 남동쪽인 시슬리 고무농장 부근에서도 강력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했다.
파리스 준장은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여 31일 저녁에 테모에 주둔 중이던 사단예비대(제5/14펀자브대대, 제2/1구르카대대, 제7산포대)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캄파르-창캇종 도로에 배치했다.
캄파르 공격을 맡은 보병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은 포위 작전을 구상했다. 즉 보병제41연대가 캄파르의 영국군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동안 보병제42연대가 서쪽으로 우회하여 영국군 방어선의 좌익을 들이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회로는 가와무라 소장의 생각보다 훨씬 험난했다. 보병제42연대는 캄파르 강 주위의 늪지대를 헤치면서 3일 간의 힘든 행군 끝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목표 지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는 늦었다.
보병제41연대의 공격은 1942년 1월 1일 아침 7시에 시작되었다. 사단중포병제5연대제2대대가 30분 간의 준비사격을 실시한 후에 제41연대가 전차제6연대에서 파견된 중형전차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캄파르 마을 북쪽에서 간선도로를 지키던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에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격전이 하루종일 지속되었으나 영국대대는 필요한 때 필요한 곳을 정확하게 때려주는 영국군 야포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일본군 선두는 아직 영국대대의 방어선인 톰슨 능선의 북사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날 사훔도로 쪽은 하루종일 조용했으므로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28여단에게 제2/2구르카대대를 부장멜라카의 남쪽인 슬림강 쪽으로 파견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서해안에서는 1일 오전 9시에 페락강 하구에 배치된 제1독립중대의 정찰대가 앞바다를 남하 중인 일본군 주정을 다시 발견했다. 이번에는 싱가포르에서 폭격기들이 날아올랐으나 현장에 도착하자 주정대는 사라진 후였다. 영국군에게 포착된 것을 깨달은 와타나베 대좌는 주정을 타고 쿠알라세랑고르까지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제5사단 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가까운 버남 강 하구에 상륙하겠다고 건의했다. 마침 제5사단 주력에 의한 캄파르 공격이 지지부진했으므로 제5사단장 마쿠이 중장은 와타나베 대좌의 건의를 받아들여 버남 강 하구에 상륙한 다음 동쪽으로 진격, 승카이를 점령하여 캄파르를 방어하고 있는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라고 명령했다.
와타나베 지대는 1일 오후 7시 30분부터 버남 강 하구의 우탄멜린탕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우탄멜린탕을 지키던 제3기병연대를 쫓아내고 순식간에 시가지를 점령했으며 상륙 30분 만인 오후 8시에는 선두가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교차로에 도달했다.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에게 제137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아 텔록안손에서 비도르 및 타파로 접근하는 통로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제11사단의 후방을 위협하자 파리스 사단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캄파르에서 철수할 허가를 요청했고 히스 중장은 이 요청을 퍼시발 중장에게 전달했다. 당시 영국군은 싱가포르로 증원되는 병력을 실은 선단의 안전을 위해서 중부 말레이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버틸 필요가 있었다. 퍼시발 중장의 계획에 따르면 말레이 동해안을 지키던 제9사단이 쿠안탄 비행장을 1월 10일까지 방어하고 그 이후에는 제란툿 서쪽으로 철수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영국군은 말레이 동부에서 철수한 제9사단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쿠알라쿠부를 1월 15일까지 지켜야 했다.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이 쿠알라쿠부를 1월 15일까지 지킨다는 조건으로 제11사단의 캄파르 철수를 허가했다.
(1941년 12월 7일 말레이의 영국군 배치 현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lim_River)
캄파르 북쪽의 일본군은 2일 아침부터 강력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날 공격에서도 톰슨 능선에 펼쳐진 영국대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2일 오후에 기습적으로 톰슨 능선 남쪽의 그린 능선을 점령했다. 이로써 방어선이 위험에 빠졌으나 영국대대의 예비대인 1개 중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을 그린 능선에서 몰아내어 파국을 막았다. 영국대대장 찰스 모리스 중령의 지휘는 훌륭했다. 모리스 중령은 2개 대대를 합쳐 급조한 영국대대를 이끌고 일본군 주력의 맹공을 이틀 동안 막아내었다. 영국대대의 방어선은 아직 튼튼했다. 게다가 영국대대는 제15여단의 전초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대대의 남쪽인 캄파르 마을에는 3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15여단의 주방어선이 펼쳐져 있었다.
문제는 서쪽이었다.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다쿠마 중장은 캄파르에서 고전 중인 제5사단을 돕기 위하여 요시다 지대(근위보병제4연대제3대대)를 파견했다. 요시다 지대는 1월 1일에 이포를 떠나 주정을 타고 페락강을 남하하여 2일 아침 7시에 기습적으로 텔록안손에 상륙했다. 텔록안손을 지키던 영국제1 독립중대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쫓겨났다.
그동안 제12여단은 텔록안손에서 동쪽으로 6km 떨어진 지점에 제2아길대대를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종심깊은 방어선을 폈다. 일본군에게 쫓긴 제1독립중대와 제3기병연대가 오전 9시에 제2아길대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데공으로 후퇴했다. 우탄멜린탕에 상륙한 와타나베 지대는 텔록안손에 상륙한 요시다 지대와 합류한 다음 2일 오후 2시부터 제2아길대대의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주정을 이용하여 제2아길대대의 후방에 상륙하려 했다. 제2아길대대는 포위되지 않으려고 서서히 5km 를 후퇴하여 2일 저녁에 텔록안손에서 동쪽으로 11km 떨어진 곳에 방어선을 폈다.
2일 저녁이 되자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캄파르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파리스 준장의 철수명령에 따라 사훔을 지키던 제28여단은 남쪽의 타파로, 텔록안손의 동쪽을 지키던 제12여단은 아예르쿠닝으로 철수했다. 이틀간 일본제5사단 주력의 맹공을 막아낸 제15여단도 철수 명령에 따라 2일 오후 9시에 캄파르를 떠나 비도르로 남하했다.
다음날인 3일 저녁까지 제12여단과 제28여단은 모두 제15여단이 지키는 비도르를 통하여 남쪽인 슬림강 유역으로 철수했고 이어서 제15여단도 비도르를 떠나 승카이로 철수했다. 영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일본제41연대가 3일 저녁에 타파를 점령했으며 우탄멜린탕에 상륙했던 와타나베 지대와 텔록안손에 상륙했던 요시다 지대도 동진하여 아예르쿠닝을 점령했다. 이로써 캄파르 방어선도 무너졌다.
캄파르 전투 기간을 통하여 영국 항공세력은 제한적인 정찰 이외에는 지상전투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반면 일본기들은 영국군에게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여 지상전투를 직접 지원했다. 이러한 항공공격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가벼웠지만 반복되는 일방적인 공습은 영국군을 피로하게 만들고 사기를 떨어뜨렸다.
당시 살아남은 영국군의 항공력, 특히 전투기들은 증원군을 실은 선단이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하도록 엄호를 제공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42년 1월 3일에 제45인도보병여단을 실은 첫번째 증원 선단이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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