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극동 총사령관 교체
1941년 12월 23일에 극동총사령관이 로버트 프룩포팸 공군대장에서 헨리 파우널 육군중장으로 바뀌었다. 원래 전쟁 전에 교체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지휘체계 안정을 위하여 연기했다가 싱가포르 지역상 더프 쿠퍼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이날 교체를 단행했다. 파우널 신임사령관은 전임자와 달리 작전지도에 적극적이었다.
(헨리 파우널 중장.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Pownall#World_War_II)
파우널 사령관은 취임 다음날인 24일에 제11인도보병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을 제12인도보병여단장이었던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으로 교체했다. 제11사단의 기존 여단장들은 모두 입원해 있었으므로 파리스 신임사단장은 제11사단의 고참 대대장들을 여단장으로 임명했다.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장 이안 스튜어트 중령이 제12인도보병여단장, 제3/16펀자브대대장이었던 헨리 무어헤드 중령이 제15인도보병여단장, 그리고 제3/9구르카소총대대장이었던 월레스 셀비 중령이 제28인도보병여단장이 되었다.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은 페락강 방어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캄파르와 그 남쪽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제12여단과 제28여단이 이포와 블란자 방면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하고 캄파르 방어선의 주력은 제15여단이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제6여단을 흡수한 제15여단은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 제1레스터셔대대와 제2이스트서레이대대를 합침), 자트/펀자브혼성대대, 제1/14, 제2/16 및 제3/16펀자브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장비 일부를 보충한 제15여단은 23일에 캄파르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날 히스 중장은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에게 제3군단의 후방에 병력들이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사용할 방어진지를 건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캄파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따라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려는 계획이었다. 이 지역은 우회가 힘들어 적이 방어선에 정면공격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퍼시발 중장은 공공사업국(Public Works Department = PWD) 공무원들에게 인부를 모아 제3군단 지역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인부를 모으지 못하여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말레이 사령부 공병대가 제3군단의 후방 방어 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따라서 방어시설은 대부분 좁아지는 길목에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일본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이포를 목표로 근위사단과 제5사단을 진격시켰다. 근위사단은 쿠알라캉사르에서, 제5사단은 남서쪽 블란자에서 페락 강을 건너 이포로 진격할 것이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캄파르에서 남쪽으로 쿠알라룸푸르까지 이어지는 주요 도로 주변의 우회가 힘든 지형을 따라 축차적으로 철수와 방어를 반복하여 시간을 끌려는 히스 중장의 계획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제3군단을 포위격멸하고 싶어했는데 포위망 남쪽에 근위사단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근위사단은 이포를 점령한 후에는 예비대로서 제5사단의 뒤를 따를 것이었다. 제5사단이 주요 도로를 따라 영국군 방어선을 격파하면서 남하하다가 쿠알라쿠부에 이르면 뒤따르던 근위사단이 벤통을 통하여 쿠알라룸푸르 남쪽으로 우회, 제3군단의 퇴로를 끊는다는 작전이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또한 1개 연대를 주정에 실어 해상으로 기동한다는 대담한 작전도 구상했다.
근위사단은 26일 아침부터 근위제4연대를 선두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쿠알라캉사르 부근에서 페락강을 건넜다. 근위제4연대 주력이 오전 11시 40분까지 도하를 마쳤고 근위사단의 후속부대들이 뒤따랐다. 영국군 제12여단은 제137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포 북쪽의 체모르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26일 오후에 근위제4연대 제1대대가 승게이시풋에 도달하자 영국군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 다음날인 27일 아침에 근위제4연대 주력이 전투에 참가했으나 영국군의 포격에 눌려 진격하지 못했다. 27일 오후에 일본군의 야전중포병제6중대가 포격을 시작하자 드디어 제12여단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추격했으나 제12여단은 5km 정도 후퇴한 후 다시 방어선을 폈다. 근위제4연대는 만 하루 동안 5km 를 전진하기 위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제12여단에서는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의 1개 중대가 후퇴 과정에서 포위되어 전멸하는 등 약 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페락.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27)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의 피로도가 걱정이었다. 제12여단은 그떄까지 12일 동안 적과 접촉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낮에는 적의 공습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밤에는 이동하거나 참호를 파야만 했다. 체력의 한계에 달한 장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였으며 간단한 지시마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이 체모르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12여단이 철수한다면 블란자 방면에서 일본 제5사단을 상대로 지연작전을 펴고 있던 제28여단 또한 철수해야 했다. 파리스 준장은 제12 및 제28여단에게 27일 밤을 기하여 이포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2여단은 고펭과 디팡 사이의 도로를 점거할 임무를 받았으며 제28여단은 사훔에 전개하여 캄파르 방어선의 우익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2여단이 체모르에서 철수하자 근위사단은 조심스럽게 진격하여 29일 새벽 3시에 이포와 카퐁케파얀을 점령했다. 이후 근위사단은 진격을 중단하고 부대를 정비하면서 제25군 사령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쿠알라캉사르 남쪽의 블란자 방면에서는 제5사단이 페락강 도하를 강행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11연대 제1대대가 26일 밤 9시 15분에 영국군 제28여단의 포격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 블란자 동쪽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제5사단은 27일 하루동안 병력을 추가로 도하시켜 교두보를 강화했다. 27일 밤에 제28여단이 철수하자 28일 아침부터 제5사단 주력이 강을 건너 영국군을 추격했다. 제28여단은 제12여단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후퇴했다.
28일 오후에 제5사단의 선두인 보병제41연대가 고펭 남쪽에 급조한 제12여단의 방어선을 공격하여 다음날 오후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급강하폭격과 야포의 지원 하에 맹공을 퍼붓자 제12여단은 큰 피해를 입고 29일 오후에 디팡 북쪽 5km 지점까지 밀려났다.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사훔까지 후퇴한 제28여단에게 디팡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28여단에서는 2개 중대를 보내어 디팡 남쪽에서 캄파르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켰다. 제12여단장 스튜어트 중령은 디팡을 거쳐 철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오후 3시에 디팡 북쪽 1km 지점에서 전차 8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제41연대의 선두가 후퇴하는 영국제12여단의 후위인 아길대대를 따라잡았다. 아길대대에는 제2대전차포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나 기습을 당하여 방열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전차에 기가 눌린 아길대대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앞서가던 제5/2펀자브대대를 앞질러 달아났다. 제12여단 전체가 와해될 수 있는 일대 위기였으나 제5/2펀자브대대장 세실 디킨 중령이 파국을 막았다. 디킨 중령은 달아나던 제2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를 붙잡아 도로 주변에 방열시키고 이 대전차포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급조하여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가까스로 일본군의 예기를 꺾은 제12여단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오후 6시 15분에 제2/2 및 제2/5구르카소총대대에서 파견된 2개 중대가 지키던 디팡 다리를 건너 캄파르 강 남쪽의 비도르로 후퇴했다.
디팡 다리의 폭파는 불완전했다. 제28여단 소속의 제23공병중대(23rd Field Company)가 28일 저녁까지 다리에 폭약 설치를 마쳤으나 29일 아침에 제28여단사령부로부터 폭약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8여단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제23공병중대는 명령에 따라 폭약을 제거한 후 철수했다. 29일 오후에 제12여단이 다리를 통과할 때 제12여단 소속의 제3공병중대는 다리에 폭약이 설치되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3공병중대는 주변을 뒤져 제23공병중대가 다리에서 제거하여 쌓아둔 폭약을 찾았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신없이 후퇴하는 부대 사이로 공병들이 이를 악물고 폭약을 다시 설치했으나 시간이 부족했으며 도화선이 대부분 젖어 있었다. 결국 폭약 설치를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접근하자 폭약이 설치된 부분만 폭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폭약은 대부분 폭발하지 않았고 단지 다리의 남쪽 끝 부분만 폭파되어 상판이 강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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