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무다강 철수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은 1941년 12월 16일 아침에 자신의 사령부에서 제11인도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과 회의를 가진 후 제11사단을 현재 배치된 무다강 전선에서 50km 후방의 크리안 강까지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제11사단은 지트라와 구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으며 파타니에 상륙한 일본군이 발링을 거쳐 무다강 전선의 옆구리를 위협할 수 있었다. 반면 크리안 강은 주변의 늪과 함께 일본전차에 대한 좋은 방어선이 되어줄 것이었다.
크리안 강 방어선은 제28여단이 제88야포연대 및 2개의 대전차포대와 함께 지킬 것이었다. 제6 및 제15여단은 타이핑으로 가서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크로부대는 해체되었다. 제3/16펀자브대대는 셀라마에 주둔하여 방어선의 우익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제5/14펀자브대대는 타이핑으로 철수했다. 제12여단은 무다강 철수시 후위부대를 맡아 카란간-셀라마 도로를 따라 남하한 후 제3/16펀자브대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타이핑으로 철수, 제11사단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안 쪽에는 제137야포연대장 홈스 중령 지휘 아래 소부대를 편성하여 다리를 파괴하고 무다강 남안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기로 했다. 이 소부대는 제137야포연대, 제22산포연대의 1개 반(section), 제80대전차연대의 1개 중대, 제1독립중대, 제1레스터셔대대의 1개 중대, 제3기병연대의 1개 대대, 그리고 장갑열차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후위 전투를 위하여 휘하 부대를 무다 강의 교량에 배치했다. 제5/2펀자브대대가 바투페카카에,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를 티티카란간에 배치되어 다리를 지켰다. 16일 오후에 구룬에서 남하한 일본군이 말레이 인과 백인 민간인 복장을 한 선발대를 내보내어 바투페카카의 다리를 점령하려 했으나 제5/2펀자브대대는 속지 않고 다리를 파괴한 후 철수했다. 17일 오전 10시에 일본군 보병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가와무라 지대가 티티카란간을 지키던 아길대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오전 11시 30분에 아길대대장 이안 스튜어트 중령에게 철수 허가가 떨어졌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가와무라 부대는 오후 2시 45분에 티티카란간을 점령했다. 아길 대대는 자정에 셀레마에 도착하여 제11사단 휘하에 들어갔다. 아길 대대의 철수와 함께 해안 쪽을 지키던 홈스 분견대도 크리안 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18일 아침까지는 모든 영국군이 크리안 강 남쪽에 있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그동안 영국군은 사이공에서 남서쪽으로 항진하는 커다란 일본수송선단을 발견했다. 일본선단이 쿠안탄과 메르싱에 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하여 남하하면 근거리에서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기 위하여 영국군은 싱가포르의 모든 항공력을 모으고 일본선단의 예상접근로를 정찰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송선단은 영국군의 예상과 달리 북쪽으로 향했다. 12월 16일에 제25군의 증원병력을 실은 41척의 수송선이 아무런 피해없이 싱고라와 파타니에 도착했다.
히스 중장은 크로를 통과하여 그릭을 거쳐 페락 강을 따라 전진하려는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아길대대의 1개 중대와 1개 장갑차 소대로 분견대를 만들어 그릭으로 파견했다. 분견대는 16일에 그릭 북쪽에서 일본군 보병제42연대(안도 타다오 대좌)를 주축으로 한 안도지대의 공격을 받아 가벼운 전투 끝에 쿠알라케네링으로 후퇴했고 다음날에는 섬피탄까지 밀려났다.
크로를 점령한 안도지대는 영국군의 예상과 달리 발링을 거쳐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릭을 지나 쿠알라캉사르까지 진출하여 제11사단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폭우와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에 전차는 동행할 수 없었다.
히스 중장은 안도지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1독립중대를 렝공에 파견하여 아길분견대를 증원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던 히스 중장은 17일 오후에 제12여단을 군단 직속으로 돌린 다음 쿠알라캉사르로 파견하여 그릭 도로를 따라 전진하는 안도지대를 막도록 했다. 하지만 페락 강 방어선이 방어에 불리하다고 본 히스 중장은 캄파르까지 후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상황을 평가했다. 여기에 따르면 일본군은 서해안에 1개 사단, 파타니-크로-그릭 도로 상에 1개 사단, 그리고 동해안에 1개 사단을 전개하고 인도차이나에 최소한 1개 사단의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영국군은 서해안에 1개 사단, 동해안에 2개 여단이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남쪽 조호르에는 2개 여단으로 이루어진 호주사단이 있었고 싱가포르에 따로 수비대가 있었다. 일본군은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비대가 조호르나 싱가포르에 상륙할 수 있었다. 따라서 퍼시발 중장은 호주군 1개 여단을 북쪽으로 보내자는 건의를 물리쳤다. 일본군의 상륙 위협이 아니더라도 호주군은 편제를 유지한 채 지형을 익힌 조호르에서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싱가포르는 증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는데 증원군은 아무리 빨라도 1942년 1월이 되어야 도착할 것이었다. 증원군을 실은 선단은 공습의 위협에 노출되는데 일본군이 말레이 중부의 비행장을 장악하면 위험이 커질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군은 최대한 북쪽에서 가급적 오래 일본군을 막아야 했다. 당시 극동항공사령부가 보유한 비행기는 네덜란드에서 증원된 기체를 합쳐 100 대 정도였는데 이 정도 세력으로는 자신의 비행장과 증원군을 실은 선단의 상공을 지키는 것이 한계로 지상군을 지원할 여력은 없었다.
일본군이 초기에 버마 최남단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인도로부터의 비행기 증원 루트가 막혔다. 북부 수마트라의 사방 비행장을 통해서는 항속거리가 긴 폭격기의 증원만 가능했다. 가장 필요한 전투기는 수송선으로 실어오든지 아니면 호주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통하여 증원해야 했는데 호주에도 전투기 여분이 없었으므로 전투기 증원은 당분간 어려웠다. 결국 퍼시발 중장은 연이은 전투와 후퇴로 기진맥진한 제3인도군단에게 항공기와 전차의 지원없이 충분한 전차 및 항공지원을 받는 일본군을 최대한 북쪽에서 저지하라고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퍼시발 중장은 12월 17일 오후에 이포로 가서 병력들을 시찰한 후 18일에 제3군단장 히스 장군과 회담했다. 캄파르까지 후퇴해야 한다는 히스 중장의 의견을 물리친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에게 페락 강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라고 명령했다. 제9사단은 동해안의 쿠안탄을 지키면서 동시에 제11사단의 동쪽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본군이 주정을 사용하여 페락 강 남쪽에 상륙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구축함 스카우트와 몇 척의 경비정으로 페락 전대(Perak Flotilla)를 만들었다. 또한 50명의 호주군과 영국해군의 무장 주정대로 이루어진 장미부대(Roseforce)를 만들어 페락 강 서부 및 북부의 일본군 후방지대를 교란하기로 했다. 제11사단은 재편성되었다. 제12여단이 군단 직속에서 제11사단으로 다시 배속되었고 큰 피해를 입은 제6여단은 제15여단에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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