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페낭 함락

 

말레이 북서쪽 케다 주를 지키던 제11인도사단이 급속히 후퇴하면서 페낭 섬이 위험해졌다. 페낭 섬은 말레이와 인도 및 실론을 잇는 해저전선의 종착지로서 항구와 고정방어시설을 갖추고 막대한 양의 탄약과 보급품을 쌓아둔 요충지였다.

영국군은 페낭 섬 방어를 위하여 정규대대 2개를 주둔시켰고 필요하면 증원할 예정이었으나 현실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자 페낭 섬을 지키던 2개 대대는 크로부대로 차출되어 페낭 섬을 떠났으며 이후 제11사단의 후퇴로 인하여 페낭 섬에 병력을 투입하는 문제는 현실성이 없어졌다.

 

페낭 섬은 12월 8일부터 공습을 받았으나 본격적인 공습은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일본제3비행집단은 전투기의 엄호를 받는 중폭격기 41대를 보내어 페낭 섬의 유일한 도시인 조지타운을 공습했다. 이때 아시아계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는데 주로 거리에 나와 공습 장면을 구경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일본군은 다음날인 12일도 공습했으나 중폭격기는 빼고 습격기와 경폭격기로 공습을 가하여 폭장량은 줄었으며 피해도 적었다. 일본기는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 이때쯤 영국전투기는 북부 말레이에서 사라졌으며 페낭 섬에는 대공포가 없었다.

 

(Ki-51 99식 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a/Mitsubishi_Ki-51-1.jpg

 

13일에 제3인도군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453호주전투비행대대가 싱가포르에서 날아와 페낭 섬 대안의 버터워스  비행장에 전개했다. 이날 일본군은 전투기 호위없이 중폭격기 26대를 내보내어 페낭을 폭격했는데 버팔로 8대가 요격하여 5대를 격추했다. 격추된 버팔로는 1대였다.

버팔로의 요격에도 불구하고 13일의 폭격은 조지타운 시가지와 부두에 큰 피해를 입혔다. 시가지 절반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행정 체계가 마비되었다. 경찰관이 대부분 도망쳤고 당국에서 고용한 일꾼도 사라졌다. 페낭 요새(Penang Fortress) 사령관 시릴 라이언 준장은 페낭 행정관과 상의한 후 백인 여자와 어린이들을 13일 밤에 싱가포르로 철수시켰다.

제3비행집단은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전투기 27대, 습격기 9대, 경폭격기 42대, 중폭격기 67대, 총 145대를 내보내어 페낭을 폭격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14일에 싱가포르 전쟁회의는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페낭 섬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일 페낭 섬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수비대는 최대한 많은 보급품과 함께 해상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15일에 제11사단이 무다 강 남안으로 철수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페낭 요새 사령관 라이언 준장에게 16일 밤을 기하여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낭 섬을 지키던 2개 대대는 이미 말레이 반도로 파견되어 남아있던 수비대는 소수였다.

 

보급품은 수송이 불가능했으므로 파괴해야 했다. 고정방어진지, 탄약, 연료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발전소와 민간비행장의 건물 및 장비를 비롯한 민간 기계와 장비들도 최대한 파괴했다.

그러나 시간 부족으로 일부는 파괴하지 못했는데 라디오 방송국이 남아 나중에 일본이 선전방송에 이용했다. 항구에는 모터달린 주정 24척을 포함하여 많은 주정과 바지가 남았다. 일본군은 여기에 다른 곳에서 노획한 주정 및 자신들이 가져온 주정을 합쳐 말레이 반도 서해안을 남하하며 상륙작전을 펼쳤다. 항구 이용을 막기 위하여 기뢰도 설치할 예정이었지만 시간 부족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페낭 철수는 16일 밤과 17일 밤에 기선 4척을 이용하여 실시했다. 뒤에 남기로 한 소수의 공무원을 제외한 백인 전원이 승선하여 싱가포르로 향했으나 선박 부족으로 해협식민지의용대의 아시아계 병사 500명을 포함하여 아시아계 주민들은 뒤에 남았다.

 

페낭 섬에는 53명의 일본인이 있었는데 전쟁이 벌어지자 억류되었다가 16일 저녁에 석방되었다. 이들 중 2명이 18일 새벽에 쪽배를 타고 페낭 섬을 탈출하여 대안에 상륙, 정오 경에 일본군을 만나 페낭 섬의 영국군이 이미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일본군은 황급히 계획을 바꾸어 페낭 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19일 오전 11시 30분에 보병제41연대 제3대대가 페낭 섬 대안의 버터워스에 진입하여 영국군이 남기고 간 주정을 끌어모았다. 제3대대는 이렇게 모은 영국주정을 타고 버터워스를 출발, 오후 4시 30분에 조지타운에 상륙하여 저항없이 페낭 섬을 점령했다. 이어서 징발한 민간선박 7척을 타고 오전 11시에 알로스타를 떠난 군정요원과 해저전선운용요원이 상륙했다.

 

때이른 페낭 섬의 무혈점령은 제25군사령부를 놀라게 했다. 일본군은 개전 당시 영국군이 페낭 섬에서 최후까지 저항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페낭 섬은 싱가포르 섬과 함께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처절한 격전을 벌인 다음에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뜻밖에도 페낭 섬을 손쉽게 얻은 일본군은 말레이를 지키려는 영국의 의지가 약하다고 확신했으며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 한층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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