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구룬 전투
구룬은 알로스타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방어선은 구룬 시가지에서 5km 정도 북쪽에 있었는데 이곳의 지형은 알로스타로 통하는 도로의 서쪽에 해발 1,350m 의 케다 산이 있었고 철도의 동쪽 3km 부터는 정글로 막혀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영국군은 전쟁 전부터 이곳에 방어진지를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인력부족과 일본군의 빠른 진격 때문에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제11인도보병사단의 방어선 배치를 보면 도로와 철도를 포함한 좌익은 제6인도보병여단이 맡았고 우익은 제28인도보병여단이 담당했다. 병력이 600명으로 줄어든 제15인도보병여단은 예비대였다. 지트라 전투에서 실종되었던 제15여단장 케네스 가렛 준장이 복귀하여 임시로 제15여단을 통합지휘하던 제28여단장 윌리엄 카펜데일 준장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했다. 화력지원은 제88야포연대가 담당했다. 제11사단장 데이비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사단에 남아있던 야포와 대전차포를 모두 끌어모아 제88야포연대에 배치했다. 따라서 제88야포연대는 정수보다 야포 1개 포대와 대전차포 3개 포대를 더 보유했다.
구룬 방어선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부대는 후위를 맡은 제1/8펀자브대대였다. 제1/8펀자브대대는 14일 정오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하여 쉬지도 못하고 방어선 구축에 매달렸다. 잠시 후 일본군이 나타났다.
알로스타를 점령한 일본군은 추격을 서둘렀다. 12월 14일 아침에 자전거를 탄 선견대가 출발했다. 알로스타에서 구룬까지는 도로 상태가 좋고 사방이 논으로 지형이 평탄하여 자전거 운용에 유리했으므로 일본군은 알로스타 시내에서 대량의 자전거를 징발하여 선견대에 지급했다. 일본군 주력은 14일 오후 1시 30분에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출발했다.
선견대는 14일 오후 2시에 구룬 북쪽에서 영국군의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으면서 진격이 좌절되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약 10대의 트럭에 분승한 일본군이 전차 3대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일본전차를 본 영국군은 놀랐다. 영국군은 케다 강의 다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다리를 끊어버렸으므로 며칠 동안은 전장에서 일본전차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공병의 능력은 영국군의 예상보다 뛰어났다. 영국군 대전차포가 불을 뿜어 선두 전차를 파괴하자 일본군은 일단 물러났다.
오후 6시에 일본군이 증강된 전력으로 재차 공격을 가하여 제1/8펀자브대대의 동쪽 방어선을 뚫었다. 그 순간 제6여단장 윌리엄 레이 준장이 억지로 쥐어짜낸 예비대를 직접 지휘하여 반격을 실시했다. 반격은 성공을 거두어 일본군을 몰아내고 20이정표(Milestone 20) 지역을 탈환했다.
(구룬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16)
14일 오후에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이 구룬 남쪽 7km 지점에 있던 제11인도사단사령부에 찾아왔다. 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자신의 부하들이 짧은 간격으로 반복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서 트럭이나 열차를 이용하여 장거리 후퇴를 한 다음 재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스 중장은 내심 동의했지만 그럴 권한이 없었으므로 일단 구룬 방어선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저녁에 히스 중장은 밀레이 사령관 퍼시벌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11사단을 철도나 트럭을 이용하여 페락 강까지 단번에 후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퍼시벌 중장은 거부하고 구룬 남쪽에 있는 무다 강 남안까지의 후퇴만 허락했다.
구룬 방어선에서는 반격에 성공한 제6여단장 레이 준장이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레이 준장은 15일 아침에 제2이스트서레이대대의 1개 중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이 선수를 쳤다. 15일 새벽 1시 30분에 기습적인 박격포 사격과 함께 일본군이 제1/8펀자브대대를 공격하여 대대의 우익 방어선을 돌파했다. 돌파에 성공한 일본군은 후방을 휩쓸고 다니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제2이스트서레이 대대본부가 공격을 받아 대대장을 포함한 6명의 장교가 전사하면서 대대 지휘부가 절딴났다. 제6여단사령부도 공격을 받아 장교들이 몰살당했으나 레이 준장은 사령부를 떠나 아침 공격에 투입할 중대를 시찰하던 중이었으므로 목숨을 건졌다.
이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제1/8펀자브 대대장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오른쪽에 있던 제2이스트서레이대대가 전멸하고 자신의 대대가 고립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대대를 이끌고 해안을 향하여 서쪽으로 도망쳤다.
대대 하나가 통째로 도망치면서 방어선의 좌익 절반이 휑하니 비었으나 일본군이 이런 엄청난 행운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11사단은 파국을 면했다. 일본군이 상황을 파악하고 텅 빈 방어선을 통해 병력을 투입하기 전에 사단예비대인 제15여단이 달려와 좌익의 위기를 감지한 제28여단에서 억지로 쥐어짜 보내준 병력과 함께 일본군을 막았다.
15일 날이 밝자 일본군은 제28여단과 케다 산 사이를 돌파하려고 여러번 시도했으나 영국군은 그때마다 야포의 화력지원을 받아 저지했다. 저녁이 되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보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제11사단은 15일 밤에 구룬 방어선을 떠나 16일 아침에 무다 강 남안에 도착했다. 이로써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진 구룬도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이제 제11사단에서 그나마 전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제28여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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