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지트라 전투(3) - 분석

 

지트라의 패배는 말레이의 영국군에게 치명적었다. 일본제5사단의 주력은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전차 1개 중대와 산포 1개 중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대대 2개로 이루어진 사에키 정진대는 준비된 방어선에 포진하고 있던 제11인도사단을 36시간 만에 패배시켜 몰아내었다.

제11인도사단의 피해는 심각했다. 제15보병여단의 병력은 1/4 이하로 줄었으며 제6여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제28여단의 1개 대대는 중대 규모로 쪼그라들었고 2개 대대는 각각 100명 정도의 병력을 상실했다. 영국군 보병여단의 정수가 3,010명, 보병대대의 정수가 786명, 보병중대의 정수가 124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최소한 3,000 명 이상, 아마도 4,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것이다.

일본의 공식전사인 전사총서는 포로 심문 결과를 토대로 영국군이 1,000 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제11인도사단이 상실한 병력의 대부분은 사상자나 포로가 아니라 탈주병임을 알 수 있다. 사에키 정진대의 피해는 전사 27명, 부상 83명으로 합계 110명이었다.

야포와 차량을 비롯한 장비 손실도 막심했다. 일본군이 노획한 장비만도 야포, 박격포 및 대전차포 51문, 기관총 50정, 브렌건캐리어를 포함한 각종 차량 210대에 달했다. 상실한 병력 및 장비의 보충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11사단의 전투력은 크게 저하되었다.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져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사단이 제풀에 붕괴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투우사 작전이 지트라 패배의 한 원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투우사 작전 준비 때문에 지트라 방어선의 건설이 부진해졌고 병사들은 가뜩이나 모자라는 훈련 시간에 방어전이 아닌 이동과 공격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지휘관들 또한 케다 주 방어에 대한 주의가 흐트러졌다.

개전 초반에 지휘체계의 무능과 혼란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병사들은 개전과 동시에 싱고라로 진격할 것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석연찮은 지연 후에 지트라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게다가 폭우로 인하여 참호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지트라 방어선 전방에 2개 대대를 배치한 것도 실수였다. 강행정찰대가 사다오에서 일본전차를 만난 덕분에 적에게 전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전차를 본 적도 없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미숙한 2개 대대를 제한적이나마 대전차호를 갖춘 지트라 방어선 전방으로 보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결국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에 의하여 초반에 2개 대대를 상실함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사단예비대가 사라졌다.

 

(지트라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8-209)

 

영국군의 훈련도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말레이의 영국군은 지속적인 우유짜기로 경험많은 장병을 대부분 빼앗기고 그 빈자리를 미숙한 장병으로 채웠다. 부대의 도착 시기가 제각각이라 훈련도 힘들어 사단훈련은 커녕 여단훈련도 해보지 못한 채 개전을 맞았다. 각급 지휘관과 참모들 또한 경험과 훈련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실전에서 잘못된 보고가 난무하고 지휘관이 보고의 진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가뜩이나 부족한 예비대를 엉뚱하게 전개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반면 일본군의 기동 속도, 장애물 극복 능력, 그리고 전차의 과감한 사용법 등은 영국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비록 숫적으로는 우세하지만 훈련이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영국군이 강력한 기갑전력이나 항공력의 도움없이 버텨내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영국군의 대전차포는 일본전차에게 치명적이었고 숫자도 충분했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지트라에서 제11인도사단은 방어선을 너무 넓게 폈다. 일본군이 전차를 활용하려면 도로를 따라 남하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11사단은 11km 가 넘는 정면에 포진하여 병력밀도가 떨어졌다. 게다가 초반에 2개 대대를 잃으면서 사단 예비대가 사라졌다. 따라서 일본군이 동쪽의 제15여단을 집중 공격하자 여단장들은 사단장에게 예비대를 요청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병력을 융통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태에서 방어선이 뚫리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병사들 사이에 공포와 혼란이 발생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돌이켜보면 12월 12일 아침에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이 구룬으로의 철수를 요청했을 때 허가했어야 했다. 비록 잘못된 정보로 인한 요청이었지만 12일 오전에 허가가 나서 저녁이 되기 전에 철수를 시작했으면 제11인도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12일 저녁부터 일본군 주력이 전장에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11사단의 전력으로 버텨봐야 13일 오전까지가 한계였다. 실제로 일본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은 12일 정오경 지트라에 도착했고 오후 1시 35분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르면 그날 밤을 기하여 보병제41연대는 동쪽, 보병제11연대는 서쪽방어선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준비가 늦어져서 12일 밤에 제11인도사단이 철수할 때까지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늦어도 13일 아침부터는 일본군 2개 보병연대가 공격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제11사단이 13일 오후까지 지트라 방어선에서 버텨냈을 확률은 거의 없다.

 

12일 저녁에 철수허가가 떨어지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통신 문제 때문에 야간 철수는 많은 혼란과 손실을 가져올 것이었다. 그렇다고 13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는 일본군의 추격과 공습으로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특히 케다 강의 다리에서 교통체증이 일어난 상태에서 일본군의 공습과 추격을 받게되면 사단 자체가 괴멸할 수 있었다. 머레이-라이언 사단장은 결국 야간철수를 결심했고 철수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영국군 공식전사는 당시 상황에서 야간철수가 그나마 손실을 줄인 옳은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