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항공작전(41.12.9-12)
일본 육해군은 말레이 상륙 당시 육군항공대는 코타바루 및 케다 주의 항공력을, 해군항공대는 싱가포르의 항공기, 함정 및 군사시설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공습 시간에 있어서 육군과 해군의 의견이 엇갈렸다. 해군은 공격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해뜨기 전에 공습하는 방안을 내세웠다. 육군은 적의 항공기를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하여 해가 뜬 후에 공격하기를 원했다. 육해군은 조율에 실패하여 해군항공대가 먼저 공격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0시 10분에 일본해군 제22항공전대의 중형공격기 68대가 사이공 부근에서 이륙하여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난기류를 만나 원산항공대 모두와 미호로항공대 일부가 돌아가고 미호로항공대의 17대만이 오전 4시에 싱가포르에 도달하여 텡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블레넘 3대가 망가졌고 빗나간 폭탄이 중국인 거주구역에 떨어져 61명이 사망하고 133명이 부상을 입었다. 레이더가 일본기의 접근을 알리자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3대가 출격준비를 갖추었으나 대공포에 의한 오폭을 염려하여 출격을 허가하지 않았다. 대신 대공포가 반격했으나 일본기들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싱가포르의 민방위 태세는 불만스러웠다. 공습 경보가 울리지 않았으며 가로등도 켜진 채였다.
같은 시각 연합군 공군도 코타바루 앞바다에서 다쿠미 지대를 싣고 온 일본수송선을 공격하고 있었다. 코타바루 비행장에 전개한 호주제1정찰비행대대의 허드슨 폭격기들은 이날 새벽에 17번 출격하여 일본수송선 아와지산마루를 격침하고 아야토산마루와 사쿠라마루에게 피해를 입혔다. 일본 함정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된 허드슨은 2대였다.
말레이 전투를 지원한 일본육군항공대는 스가와라 미치히로 중장의 제3비행집단이었으며 남부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제3비행단이 8일에 코타바루 전투를 지원했다.
12월 8일 새벽에 프놈펜 남쪽의 캄퐁프라치에서 제3비행단의 전투기 11대와 경폭격기 28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가 이륙하여 오전 8시부터 쿠알라페스토를 비롯한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비행장들을 공습했다. 일본기들은 반격에 나선 연합군 전투기 15대와 교전하여 10대를 격추하고 활주로에서 3대를 파괴했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으며 5대가 크게 망가졌으나 무사히 귀환했다. 일본기들이 코타바루 비행장 부근을 통과할 때 쌍발기 약 10대가 활주로에 있는 것을 보았으나 다쿠미 지대에 대한 오폭을 우려하여 제1차 공격대에게는 코타바루 비행장 공습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어서 전투기 5대, 경폭격기 48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쿠알라페스토 비행장을 공습하여 소형기 3대를 활주로에서 파괴했다.
제12비행단과 해군항공대는 8일 오전에 교대로 싱고라와 파타니 상공을 지켰다. 비행제1전대는 싱고라 상공에 도착하여 상공을 엄호하다가 오전 11시 10분에 싱고라 비행장이 확보되자 착륙했다. 파타니로 향한 비행제11전대는 1,000m 고도에서 접근 중인 영국전투기 2대를 발견하고 쫓아버렸다. 안도 지대가 싱고라 비행장을 점령했으나 활주로의 배수가 되지 않아 착륙이 불가능했으므로 비행제11전대는 오후 1시 30분에 싱고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후 양 전대는 싱고라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싱고라와 파타니 상공을 지켰다.
제7비행단의 전투기 18대, 중폭격기 75대는 프놈펜과 사이공의 비행장을 이륙하여 오전 8시부터 말레이 북서부 케다 주의 승게파타니, 알로스타, 페낭, 버터워스 등지의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 공습으로 영국기 23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격납고를 비롯한 시설물에 피해를 입혔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으나 3대가 큰 피해를 입고 불시착하여 대파되었다.
말레이에 주둔 중이던 연합군 공군은 개전 당일인 12월 8일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전투기 전력이 열세하고 비행장을 지키는 대공화력도 약한데다가 조기경보체계도 시원찮아서 많은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급유하거나 무장 장착 중에 공격을 받아 망가졌다. 알로스타와 승게파타니에서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항공기는 제62폭격비행대대의 블레넘 2대, 호주제21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4대, 제27야간전투비행대대의 야간전투기형 블레넘 4대가 전부였으며 그나마 버팔로는 기총이 말썽을 일으켜 무용지물이었다. 12월 8일 아침에 약 110대이던 북부 말레이의 연합군 항공기 숫자는 8일 저녁이 되자 약 50대로 줄어들었다. 극동총사령관과 극동함대 사령관은 8일 공동으로 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항공기 증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늦었다. 일본군은 개전 24시간 내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말레이, 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9일 아침에 제3비행단은 전투기 6대, 경폭격기 39대를 내보냈다. 이들 중 일부는 오전 11시부터 코타바루 비행장을 공격하고 주력은 쿠알라페스토 비행장을 공격하여 11대의 영국기를 활주로에서 파괴했다. 당시 코타바루 비행장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태로 오폭이었다.
제10비행단 비행제62전대의 중폭격기들은 오후 1시 50분에 쿠알라룸푸르 북서쪽의 타나메라 비행장을 공격하여 8대를 활주로에서 파괴했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으며 1대가 불시착하여 중파되었다. 이어서 제12비행단의 전투기 1개 중대와 습격기 1개 중대가 타나메라 비행장을 공격하여 1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대공기관총 2정을 파괴했다.
제3비행단은 9일에 케다 주의 비행장들을 노리고 전투기 17대, 중폭격기 76대를 출격시켰으나 날씨가 나빠 공습을 하지 못했다. 이들 중 제64전대의 전투기들은 싱고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 전투기들은 오후에 제12비행단의 전투기 1개 중대 및 습격기 1개 중대와 함께 버터워스 비행장을 공격하여 싱고라 공격을 위하여 집결해 있던 블레넘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버팔로와 야간전투기형 블레넘들을 파괴했다.
12월 9일에 극동항공사령관 펄포드 소장은 전날의 괴멸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싱고라에 대한 폭격을 실시했다.
9일 아침에 싱가포르의 텡가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 제34폭격비행대대의 블레넘 폭격기 6대가 이륙했다. 블레넘 폭격기는 북서부 말레이의 버터워스 상공에서 호주제21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를 만나 싱고라까지 호위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당시 그 지역의 버팔로는 기총에 문제가 생겨 호위를 해줄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블레넘 6대는 전투기의 호위없이 싱고라 비행장을 폭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기의 요격을 받아 5대가 격추되었다. 싱고라 비행장의 피해는 미미했다.
9일 오후에 펄포드 소장은 알로스타의 제62폭격비행대대와 텡가의 제34폭격비행대대를 버터워스에 집결시켜 제62폭격비행대대장 아서 스카프 대위의 지휘 아래 싱고라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버터워스에서 스카프 대위가 이륙하는 순간 일본기들이 비행장에 달려들어 나머지 블레넘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는 단독으로 싱고라에 날아가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일본전투기의 총탄에 등과 왼팔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스카프 대위는 가까스로 알로스타 부근에 돌아와 논바닥에 불시착했으나 과다출혈로 그날 밤에 숨졌다. 영국정부는 단독으로 용감하게 폭격임무를 완수하고 중상을 입은 몸으로 비행기를 안전하게 불시착시켜 승무원들을 구한 스카프 대위에게 말레이 전투 최초의 빅토리아 십자장을 추서했다.
(아서 스카프 대위.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Scarf)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전 협정에 따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버팔로 전투기 9대와 글렌 마틴 폭격기 22대가 9일 오후에 싱가포르 섬에 도착했다. 펄포드 소장은 지난 이틀 간의 경험으로 주간폭격은 자살행위이며 오직 야간폭격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네덜란드 조종사들은 야간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훈련을 위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돌아갔다.
9일 오전 현재 쿠안탄 비행장에는 기존 비행기에 더하여 코타바루에서 철수한 비행기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오후에 일본기들이 공격하여 비행기 7대를 지상에서 파괴했다. 펄포드 소장은 쿠안탄에서 살아남은 비행기들을 모두 싱가포르 섬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쿠안탄 비행장은 재급유를 위한 착륙장으로만 사용했다.
케다 주의 비행기들도 말레이 중부로 철수했다. 제62폭격비행대대에서 살아남은 블레넘 2대는 타이핑으로 철수했으며 호주제21전투비행대대의 버펄로 6대는 이포로 철수했다. 제27야간전투비행대대는 전멸하여 철수할 비행기도 없었다.
9일 저녁이 되자 말레이 북부에 남은 연합군 비행기는 10대 미만으로 떨어졌다.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12월 8일과 9일의 항공작전으로 제3비행집단이 상실한 기체는 97식 전투기 2대, 97식 사령부정찰기 2대, 99식 중폭격기 9대이다.
해군항공대는 싱가포르를 폭격한 후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추적하여 10일에 쿠안탄 앞바다에서 격침했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영국군의 비행장 철수는 불완전했다. 8일에 철수한 승게파타니와 10일에 철수한 쿠안탄에서는 막대한 항공유를 비롯한 보급품들을 그대로 두고 도망쳐서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반면 10일에 벌어진 알로스타 비행장 철수 당시 항공유를 태우는 연기는 북쪽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던 지상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이후로 비행장 철수시 항공유는 태우지 말고 그냥 연료탱크에 구멍을 뚫어 땅에 쏟아버리는 방식으로 폐기했다.
9일 이후 연합군 항공작전의 목표는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방어와 증원군을 실은 선단 상공 엄호에 집중되어 모든 전투기들은 싱가포르에 집결했다. 극동항공사령관 펄포드 소장은 항공엄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제3군단을 위하여 12일에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를 버터워스 비행장에 파견했다. 제453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들은 일본군과 전력이 워낙 차이나서 공중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로 장거리 정찰을 맡았는데 그나마 지상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2일에 싱가포르를 이륙한 블레넘 3대가 싱고라를 폭격했지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펄포드 소장은 전투기의 호위가 없는 상태에서 주간 폭격은 무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후 야간폭격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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