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싱고라 상륙
제5사단 주력을 실은 수송선 10척과 병원선 1척은 1941년 12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태국만 해상의 G점을 떠나 싱고라로 향했다. 제5사단의 주력은 제25군사령부, 제5사단사령부, 보병제9여단사령부, 보병제11연대, 보병제41연대, 수색제5연대, 전차제1연대 주력, 야포병제5연대 등으로 이루어져 보병 6개 대대, 전차 3개 중대, 그리고 야포 4개 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병, 통신, 치중병, 의무부대와 독립속사포 및 독립고사포 부대 등을 합쳐 약 13,500명이었다. 파타니에 상륙한 병력이 약 7,550명, 코타바루에 상륙한 병력이 5,503명이므로 이 날 태국 및 영령 말레이에 상륙한 제25군의 병력은 합쳐서 약 26,550명이다. 제5사단 주력의 임무는 싱고라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과 철도를 장악한 다음 남쪽으로 진격하여 케다 주를 비롯한 영령 말레이 북서쪽의 비행장들을 점령하면서 남하하여 페락 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제5사단 주력을 태운 선단은 7일 오후 4시에 파타니로 향하는 6척과 헤어졌고 8일 새벽 0시 35분에 싱고라 정박지에 진입하여 닻을 내렸다. 이때 풍속은 초속 7m, 파고는 2m 로 상륙하기에는 바다가 거칠었다. 따라서 주정을 내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오전 1시 57분에야 다 내렸으며 병사들이 주정으로 옮겨타는 데에도 역시 시간이 걸려 주정들이 해안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전 3시 40분이었다. 보병제41연대가 최초로 상륙한 시간은 오전 4시 12분이었다. 태국군의 저항은 약했으며 일본군은 사전 계획대로 싱고라와 주변의 요지를 점령했다. 보병제41연대 일부가 싱고라 신비행장 남쪽의 태국제41보병대대와 제13포병대대를 공격하는 동안 보병제41연대 제2대대가 신비행장을 점령하고 비행기 3대와 자동화차 1대를 포획했다. 보병제41연대 제2대대는 나중에 보병제11연대 제2대대에게 비행장 방어를 맡기고 남쪽으로 향했다. 보병제41연대제1대대의 2개 중대로 이루어진 철도돌진대는 철도역으로 신속하게 진격하여 오전 5시 40분에 남쪽으로 향할 예정이던 기차를 탈취했다. 수색제5연대와 보병제41연대 제3대대는 싱고라 시내에서 태국군과 교전하여 제압하고 차량 50대를 포획했다.
싱고라에서 가장 먼저 남하를 시작한 것은 수색제5연대였다. 이어서 보병제41연대 제3대대가 양륙한 차량에 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차량 50대를 더한 다음 오전 9시 20분에 남쪽으로 출발했다.
제5사단은 수송선 용적의 부족 때문에 치중병 차량 모두, 보병차량 절반, 그리고 포병 차량 1/4 가량을 상하이에 남겨두고 왔다. 따라서 태국에서 차량과 기차를 탈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차량 탈취는 주로 수색제5연대가 맡았다. 수색제5연대는 핫야이에서 방콕 및 싱가포르로 가려던 화물열차를 잡아서 기관차 8대, 객차 9대, 화차 158대를 얻었으며 추가로 자동차 50대를 포획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8일 오전 5시 20분에 대발동정을 타고 상륙한 후 오전 8시에 싱고라 지사관저에 들어가 태국당국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 결과 오후 1시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졌고 오후 11시에는 태국 측이 정식으로 제25군의 통과를 허용했다. 휴전 합의에 따라 싱고라 지역의 태국군은 오후 2시 30분에 항복했다. 싱고라 지역에서 태국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55명이었으며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9명 부상 8명이었다.
태국군이 항복하자 일본군 주력은 8일 저녁에 팟야이로 남하했으며 철도돌진대 또한 기차를 타고 남하하여 오후 6시에 팟야이로 들어섰다. 비행장에는 방공대가 진지를 파고 방공임무에 들어갔으며 공병 일부가 비행장을 정비했다. 공병 주력은 싱고라 항으로 계속 들어올 전차, 자동차 및 후속부대를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8일 오후에 일본정찰기로부터 영국군 기계화부대가 사다오 방면으로 북상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군은 영국군을 보다 남쪽에서 격파하기 위하여 남하를 서둘렀다.
(싱고라)
일본이 침공했을 때 말레이 수비대는 결단이 늦어져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이 태국 진입 명령을 받은 것은 8일 오부 1시 30분이 되어서였다. 아침에 영국 정찰기가 싱고라와 파타니로 날아가 이미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므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투우사 작전을 포기하고 지트라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막기로 했다. 다만 싱고라에서 지트라로 이어지는 도로와 싱고라에서 페를리스로 이어지는 철도를 따라 소규모의 정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의 남진 상황을 탐지하고 진격을 방해하기로 했다.
8일 오후에 제1/8펀잡대대의 2개 중대, 1개 브렌건캐리어 소대, 제273대전차포대의 1개 소대(section), 제17공병중대의 2개 소대(section)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지트라 북쪽에서 국경을 넘어 싱고라-지트라 도로를 따라 북상했다. 일본군 정찰기가 이 모습을 보고 일본제5사단에게 보고했다. 제1/8펀잡대대는 8일 오후 9시에 사다오에서 전차를 앞세운 일본제5사단 주력과 만났다. 일본전차가 제1/8펀잡대대를 고착시키는 동안 뒤따르던 트럭에서 내린 일본군 보병이 뒤로 돌아가 제1/8펀잡대대를 포위하려고 했다. 일본군의 속셈을 알아차린 제1/8펀잡대대는 포위망에 걸리기 전에 후퇴했다. 다리를 끊으면서 후퇴한 제1/8펀잡대대는 국경을 다시 넘어 지트라 북쪽 6km 지점에 있던 제1/14펀잡대대의 전진 방어선을 통과하여 제11사단 지역으로 돌아왔다.
8일 오후에 북쪽의 페를리스에서도 태국령 내로 기계화 부대를 파견했다. 이 정찰대는 철도를 따라 클라웅 응가에까지 진출하여 커다란 철교를 폭파한 후에 남하하여 페당 베사르를 거쳐 제6보병여단 지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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