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코타바루 함락

 

코타바루 해안에 상륙한 다쿠미 지대는 해안을 지키던 영국제3/17도그라스대대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제1차 상륙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15분부터 시작되었다. 상륙 해안은 서쪽의 바당과 동쪽의 사박 사이 해안이었다. 우익인 제3대대 제11중대 주력이 탄 특대발 1척은 해안 가까이에서 제21산포대의 포격을 받아 침몰했다. 탑승자 중 1/3은 해안까지 헤엄쳐 상륙했고 1/3은 다른 주정에게 구조되어 상륙했으며 1/3은 목숨을 잃었다.

 

제11중대의 참사를 제외하면 서쪽에 상륙한 제3대대는 약한 저항을 받았다. 제9중대가 벙커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자 제3대대장은 접이식 보트를 타고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섬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제3대대는 접이식 보트 12척을 가지고 상륙했으나 4척은 제11중대를 실은 특대발이 침몰할 때 같이 잃어버렸고 5척은 해안에서 가져올 수 없었다. 제3대대장은 수중에 있는 접이식 보트 3척에 1개 분대씩 3개 분대를 싣고 강을 건너 작은 섬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휘하 부대 중에 제9중대를 제외하고는 연락이 닿지 않아서 제3대대본부는 그곳에 머물렀다. 

 

(코타바루 전투 상황도.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http://www.oocities.org/dutcheastindies/kota_bharu.html)

 

동쪽인 사박 부근 해안에 상륙한 제1대대는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해안에서 약 50m -70m 떨어진 곳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앞에는 지뢰를 묻어 놓았다. 철조망 뒤에는 기관총을 장착한 콘크리트 벙커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벙커 주변의 참호에는 영국군 소총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벙커의 기관총이 뭍에 올라오는 일본군을 보이는 족족 사살했으므로 일본군은 머리도 제대로 못들고 물가에 엎드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제1대대장이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제3중대가 돌파를 시도했으나 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장교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력의 2/3를 상실하면서 실패했다.

제1대대의 교착상황은 제2차 상륙부대로 제4중대와 기관총소대가 상륙하면서 겨우 풀렸다. 제4중대장은 중상은 입은 제1대대장을 대신하여 대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전진을 명했다. 새로 상륙한 기관총 소대의 엄호 아래 피해가 적은 제4중대가 앞장서고 제1, 제3중대 병력 및 제5중대의 일부 병력이 뒤따랐다.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벙커에 접근하여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제4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오전 7시까지 영국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제1대대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56연대장 나스 대좌는 제3대대 제12중대와 함께 서쪽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후 전진하던 연대본부는 지뢰를 밟은데다가 영국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통신대장을 비롯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나스 대좌는 제3대대본부가 있는 작은 섬으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접이식 보트가 없었다. 공병이 용감하게 해안으로 돌아가 접이식 보트 2척을 가져왔다. 접이식 보트 2척이 부지런히 강을 왕복하면서 연대본부, 제12중대 및 기관총소대를 실어날랐다. 섬에 오른 나스 대좌는 오전 4시에 제3대대장을 만나 연대본부를 차렸다. 바당 방면의 영국군은 최후 방어선으로 물러났는데 이 과정에서 해안선에 배치되어 있던 3.7인치 산포 2문을 방기했다. 다음날 오후에 일본군이 산포를 발견하여 사용했다.

 

지대사령부는 속사포를 비롯한 중화기 및 제2대대 주력과 함께 3차로 상륙했다. 상륙 직후 제2대대는 제1대대를 도와 동쪽 해안의 제2방어선을 돌파했으나 그 과정에서 제2대대장이 중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덕분에 사박 방면의 일본군도 오전 9시까지 제3/17도그라스대대의 최후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때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코타바루)

 

코타바루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제8인도보병여단장 베르톨트 키 준장은 일본군이 상륙하자 촌동에 자리잡고 있던 제2/12FFR대대(2개 중대)를 사박 방면으로, 그리고 페리갓에 주둔 중이던 제1/13FF소총대대를  바당으로 북상시켰다. 역시 촌동에 있던 제73야포대는 코타바루 비행장 부근에 방열했고, 제21산포대도 후퇴하여 비행장 부근에 방열했다. 다만 해안선에 배치되었던 1개 소대는 시간이 없어 포는 버려두고 병사들만 빠져나왔다. 키 준장의 직속 상관인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말레이 사령부에 요청하여 예비대인 제12여단에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를 받아 8일 아침에 철도편으로 쿠알라크라이에 파견했다.

 

키 준장의 계획에 따르면 제2/12FFR대대는 사박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제1/13FF소총대대는 바당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일본군을 공격할 것이었다. 해안선에서 3km 떨어진 코타바루 비행장 부근에 방열한 제73야포대와 제21산포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공격은 8일 오전 9시에 실시되었으나 실패했다. 훈련이 부족한 5개 중대가 강을 건너 연대 규모의 다쿠미 지대를 섬멸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전 11시에 재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후 해안 부근은 영국군과 일본군의 소규모 부대들이 어지럽게 섞여 돌아다니는 혼란한 상태가 되었다. 공격은 실패했지반 소득은 있었다. 본의 아니게 영국군 2개 대대는 일본군이 해안두보에서 강력한 제3/17도그라스대대의 최후방어선을 피하여 옆으로 진출할 통로를 막아버린 셈이 되었다.

8일 오후가 되자 해안의 상황은 지쳐버린 씨름선수가 샅바를 쥐고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을 바다로 밀어넣을 힘이 부족했지만 일본군 또한 영국군의 방어를 뚫을 힘이 없었다. 다쿠미 지대의 정면에는 제3/17바그라스대대의 최후방어선이 있었다. 비록 제1선과 제2선 진지는 점령당했지만 후퇴한 병력들이 최후 방어선의 기관총 벙커를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해안의 양쪽 출구인 바당과 사박은 제2/12FFR대대와 제1/13FF소총대대가 막고 있었다. 일본군이 방어선의 일부를 공격하면 영국군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

 

팽팽한 균형을 깬 것은 엉뚱하게 코타바루 비행장의 영국공군 지상요원들이었다. 코타바루 비행장은 8일 오전부터 일본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당하면서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지쳐버린 비행장 요원들 사이에 해안의 일본군이 영국군 방어선을 뚫고 비행장 외곽에 도달했다는 뜬소문이 퍼졌다. 당황한 공군장교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지상요원들은 비행장 건물에 불을 지른 다음 트럭을 타고 쿠알라크라이로 달아났고 덩달아 비행장 방어부대도 대공포와 박격포, 장갑차 등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이들은 급히 달아나느라 파괴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건물에만 불을 질렀을 뿐 정작 중요한 폭탄이나 항공유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활주로도 멀쩡했다. 한편 전화로 일본군이 비행장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들은 극동총사령곤 펄포드 소장은 코타바루와 공케다에 남아있던 비행기에게 즉시 쿠안탄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등 뒤에서 비행장이 불타고 이어서 비행기들이 황급히 이륙해서 남쪽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본 제8여단 병사들은 맥이 풀렸다. 제8여단이 일본군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이유가 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이제 비행장을 포기한 이상 싸울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제8여단장 키 준장은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에게 요청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철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8일 오후 7시가 되자 제8여단사령부에 또다른 일본군 선단이  파타니로부터 코타바루로 남하 중이라는 잘못된 보고가 들어왔다. 키 준장은 이 선단이 일본이 파견한 증원군이라고 생각하여 오후 8시에 해안선의 3개 대대에게 비행장을 포기하고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코타바루 시가지의 북쪽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사박과 쿠알라베숫 사이의 해안선을 지키던 제2/10발루치대대도 페리갓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후 10시에 제73야포대가 비행장에 직접 사격을 가하여 항공유를 불태웠다. 이후 제73야포대와 제21산포대는 200대의 차량과 함께 안전하게 코타바루 시가지를 지나 남쪽으로 후퇴했다. 다쿠미 지대와 접촉하고 있던 3개 대대의 후퇴는 어려웠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3개 대대는 추격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가면서 남하하여 9일 새벽에 지정된 위치에 도달했다.

 

영국군이 후퇴하자 다쿠미 지대는 진격하여 8일 오후 10시가 좀 지난 시각에 코타바루 비행장에 진입했다. 비록 항공유는 불타버렸지만 수천발의 폭탄과 60발의 항공어뢰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품은 물론 대공포와 대공기관포, 박격포와 자동차 및 장갑차까지 남아 있었다. 9일 새벽에 제56연대장 나스 대좌는 추격에 나섰다.

 

코타바루 시가지 북쪽에 급히 편성한 영국군 방어선은 9일 오전 6시 30분부터 박격포의 화력지원을 받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동쪽 일부가 뚫렸다. 전선을 시찰한 키 준장은 부하들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부녀자와 어린이, 그리고 케란탄의 술탄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모두 떠났으므로 코타바루 시가지를 애써 지킬 필요도 없었다. 영국군은 9일 오후에 페리갓-물롱 선까지 후퇴했으며 9일 아침에 도착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는 예비대로 케테레에 주둔했다. 오후 늦게 키 준장은 여단사령부를 케테레 남쪽의 촌동으로 옮겼다.

 

영국군이 후퇴하자 다쿠미 지대는 9일 오후 12시 30분에 코타바루 시가지에 진입했다.

코타바루 상륙작전에서 다쿠미 지대는 약 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일선 대대장의 피해가 커서 3명 중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보병중대장 12명 중에서 3명이 전사했다. 별도로 양륙작업대에서는 49명이 전사하고 85명이 부상을 입었다.

주정 피해는 다음과 같다.

 

특대발 : 3척 중 2척 침몰

대발 : 24척 중 6척 침몰, 3척 손상

소발 : 21척 중 7척 침몰, 7척 손상

장갑정 : 3척 중 1척 손상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600명, 포로는 약 100명이었다.

 

남방군 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는 12월 13일에 코타바루 점령에 대하여 다쿠미 지대를 축하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제25군 사령부와 협의를 하지 않았다. 애당초 데라우치 원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이 사건으로 큰 모욕감을 느끼고 남방군 사령부를 나쁘게 생각했다.

 

코타바루를 점령한 다쿠미 지대가 전진을 멈추면서 10일에는 페리갓-물롱에 걸친 제8여단 방어선이 하루종일 조용했다.

10일 오후에 일본군이 남쪽의 쿠알라베숫에 상륙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들어왔다. 키 준장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마창 및 공케다 비행장을 포기하고 마창 바로 남쪽까지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은 철수하면서 도로와 철도, 그리고 비행장에 대해 파괴활동을 실시했다. 비행장의 건물과 항공유는 불태웠으나 활주로를 파괴할 여유는 없었다. 제8여단은 11일 아침에 마창 바로 남쪽에 새로 방어선을 폈다. 

 

(북부 말레이)

 

당시 마창으로 연결되는 보급로는 쿠알라크라이에서 북상하는 한 가닥의 철도뿐이었는데 이 철도는 후방의 파괴활동으로 쉽게 차단될 수 있었다. 게다가 동북부 말레이의 3개 비행장(코타바루, 공케다, 마창)을 모두 포기한 이상 제8여단이 그곳에 머물 이유도 없어진 셈이었다.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이런 논리로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제8여단을 남쪽 쿠알라리피스 지역까지 철수시키자고 건의했다. 히스 중장은 찬성했으나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이 불허했다. 그러자 히스 중장은 발끈하여 퍼시발 중장과 직접 만나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겠다면서 11일 밤에 열차를 타고 페낭 부근 부킷메르타잠에 있는 제3군단사령부를 떠나 싱가포르로 달렸다. 물론 히스 중장은 12일 오후에 항공편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결정적인 전투 초기에 군단장이 자리를 비운 것은 전황에 악영향을 끼쳤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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