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방어태세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질 당시 말레이 반도의 연합국 공군 세력은 영국, 호주 및 뉴질랜드 공군기로 이루어져 극동공군사령관(Air Commander, Far East) 콘웨이 펄포드 공군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극동공군사령부는 싱가포르에 있었으며 연합육/공군작전센터(Combined Arrmy/Air Force Operation Center)를 통하여 말레이 사령부와 연결되었다.
비행대대는 12개로서 주간전투비행대대 4개, 야간전투비행대대 1개, 폭격비행대대 2개, 뇌격비행대대 2개, 정찰비행대대 2개, 비행정대대 1개였다. 전투기는 미제 버팔로였고 나중에 허리케인이 추가되었다. 야간전투기와 폭격기는 블레넘, 뇌격기는 구식 복엽기인 빌데비스트였으며 정찰기는 허드슨, 비행정은 카탈리나였다. 전투 및 폭격비행대대의 정수는 일선기 16대 예비기 8대였고 뇌격 및 정찰비행대대의 정수는 일선기 12대 예비기 6대였으며 비행정대대의 정수는 일선기 6대, 예비기 2대였으나 정수를 채운 비행대대는 거의 없었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일본이 침공했을 때 말레이의 일선기는 158대, 예비기는 88대였다. 1941년 12월 7일 현재 일선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알로스타 : 제62폭격비행대대(블레넘1 폭격기 11대)
승게파타니 : 제21호주전투비행대대(버팔로 전투기 12대), 제27야간전투비행대대(블레넘1 야간전투기 12대)
코타바루 : 제1호주정찰비행대대(허드슨2 정찰기 12대), 제36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공케다 : 제100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쿠안탄 : 제60폭격비행대대(블레넘1 폭격기 8대), 제8호주정찰비행대대(허드슨2 정찰기 8대), 제36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텡가 : 제34폭격비행대대(블레넘4 폭격기 16대)
칼랑 : 제243 및 제488뉴질랜드전투비행대대(버팔로 전투기 32대)
셈바왕 : 제8호주정찰비행대대(허드슨2 정찰기 4대), 제453호주전투비행대대(버팔로 전투기 16대)
셀레타 : 제100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제205비행정대대(카탈리나 비행정 3대)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Bristol_Blenheim)
예비기는 블레넘 1 및 4 폭격기 15대, 버팔로 전투기 52대, 허드슨 정찰기 7대, 빌데비스트 뇌격기 12대, 카탈리나 비행정 2대였는데 버팔로 전투기 21대는 엔진 밸브 문제로 비행이 불가능했다. 예비기는 원래 비행대대가 보유했으나 자체 정비 능력이 부족했으므로 싱가포르에 집결시켜 관리하다가 손실이 생기면 보충해 주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록히드 허드슨 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https://en.wikipedia.org/wiki/Lockheed_Hudson)
조종사의 훈련도는 낮은 편이었다.
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들은 1941년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숙달할 시간이 부족했다. 일본이 침공했을 때 극동공군사령부는 전투기 조종사들 중 1/4 가량은 작전 투입 기준에 미달이라고 판단했다. 야간전투비행대대의 블레넘1 들은 낡고 정비 상태도 불량했다. 뇌격전투비행대대의 조종사들은 훈련도가 높고 경험도 풍부했으나 복엽기인 빌데비스트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기였다. 경폭격비행대대와 정찰비행대대의 블레넘1 및 4 와 허드슨은 임무에 비해 숫자가 모자랐고 승무원들은 바다 멀리 날아가서 폭격하거나 정찰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정수를 채운 비행대대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버팔로를 제외하면 모든 비행기의 예비 기체가 부족했다. 일선기 158대는 극동공군사령부가 요구했던 일선기 566대는 말할것도 없고 참모본부가 최소한으로 인정한 일선기 336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예비기 88대를 더해도 비행기 수는 246대에 지나지 않았다.
말레이에 투입된 일본 항공력은 일선기 617대, 예비기 182대로 훨씬 강력했다. 실제로 말레이에 투입된 일본 일선기 중 전투기만 204대(육군 168대, 해군 36대)로 말레이의 연합군 일선기 전체보다 30%나 많았다.
극동공군사령부 참모의 질적 저하도 문제였다. 유능한 장교들이 유럽 전쟁 때문에 계속 본국으로 불려가는 바람에 극동공군사령관은 팽창하는 사령부 요원을 경험이 부족한 장교로 채우는 수 밖에 없었다. 비행기는 부족하고 그나마 구식기가 많았으며 조종사의 훈련도는 낮은 데다가 참모의 수준까지 떨어지는 말레이의 연합군 공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 및 해군항공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41년 12월 7일 말레이의 부대배치 현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lim_River)
일본이 침공했을 때 말레이에는 정규보병대대인 영국, 호주, 인도 및 말레이 대대 31개가 있었는데 이는 보병사단 3개 반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사단은 제9 및 제11인도사단과 제8호주사단이 있었는데 모두 2개 보병여단과 포병을 비롯한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외에 2개 예비여단, 싱가포르 방어를 위한 2개 요새여단, 그리고 페낭을 지키는 1개 대대가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싱가포르를 지키기 위한 고정해안방어부대와 대공포 부대, 비행장 방어대대와 지역 의용대가 있었다. 보르네오의 사라왁에도 1개 대대가 있었다. 전차부대는 없었다.
영국군의 보병사단은 완편시 3개 보병여단과 야포, 대전차 및 대공포 부대를 비롯한 지원부대로 이루어졌으며 정원13,700명이고 야포 72문, 대공포 54문, 대전차포 48문을 보유했다. 보병여단의 정원은 2,500명, 보병대대는 800명, 보병중대는 127명이었다.
포병연대의 정원은 670명으로 야포 24문을 보유했고, 포대는 200명 정원에 야포 8문을 보유했다. 대공포대의 정원은 170명으로 대공포 12문을 보유했고, 대전차포대의 정원은160명으로 대전차포 12문을 보유했다. (영연방군의 포대는 미군 포병의 대대에 해당한다.)
현지인들로 구성된 부대 중 정규군은 1개 말레이대대가 유일했다. 이들은 인도군과 비슷하게 장교는 영국인 및 말레이인이고 부사관 및 사병들은 말레이인이었다. 이외에 각지에서 편성한 의용군들이 있었는데 전체 병력은 장교 194명, 부사관 및 사병 4,328명으로 1/3 가량은 백인 또는 백인과 현지인의 혼혈이었으며 나머지는 말레이인이나 중국인이었다.
정규군과 의용대를 합친 말레이 수비대의 총 병력은 약 88,600명이었다. 19,600명은 영국인, 15,200명은 호주인, 37,000명은 인도인이었으며 16,800명은 현지에서 징집한 말레이인 및 중국인이었다. 31개 보병대대를 중심으로 한 말레이 수비대의 전력은 1941년 8월에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이 요구했던 바로부터 17개 보병대대와 2개 전차연대가 모자란 전력이었다.
말레이 반도는 많은 부분이 정글로 덮여 있었다. 정글은 시야가 제한되고 기동이 어려워서 대규모 병력의 통제가 어려웠다. 따라서 소부대 지휘관의 능력이 중요했다. 또한 포병의 화력 투사와 전차의 기동이 제한되기 때문에 정글전은 주로 보병 사이의 전투였다. 정글전에서 이기려면 낮에는 더위와 습기, 밤에는 낮선 소음과 빛에 익숙해져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정글에서 실전을 경험하거나 오래 훈련을 쌓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연합군은 불리했다.
제3군단의 주력을 이루는 인도사단은 다수의 인도대대와 소수의 백인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도대대에는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 인도자치정부는 중동, 이라크 및 말레이의 병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급속히 군대를 확장하여 1941년에는 평화시의 4배로 팽창했다. 이를 위하여 기존 부대에서 경험많은 장교나 부사관을 차출하여 새로 편성하는 부대의 기간 병력으로 삼았다. 이렇게 기존 부대에서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을 빼가는 행위를 '우유짜기'(milking)라고 불렀는데 제9 및 제11인도사단은 말레이에 파견된 이후에도 우유짜기를 당했다. 그렇게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이 빠져나간 자리는 전시 속성 과정을 거쳐 배출된 미숙한 백인 및 인도인 장교와 부사관이 채웠다. 경험많은 병사 또한 우유짜기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아 병사는 대부분 기초군사훈련만 마친 상태였으므로 인도대대의 전투력은 약했다.
백인대대들은 대부분 인도나 극동에서 오래 주둔한 경우가 많아 기동전에 약한데다가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우유짜기로 차출되어 전투력이 떨어졌다.
말레이 수비대에는 훈련받은 예비대가 없었다. 따라서 일단 전투가 벌어지자 결원을 보충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부대의 전투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말레이 사령부의 상황도 비슷했다. 유능한 참모는 우유짜기로 중동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차출되었고 빈 자리를 미숙한 장교가 메웠다. 전쟁성은 프랑스나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실전을 겪은 장교를 극동에 파견하는 교환복무제를 실시하지 않아 피로써 얻은 귀중한 교훈이 극동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말레이 수비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전쟁이 발발한 후에 징병되어 기초군사훈련만 마친 상태였으며 정글전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말레이 사령부에는 훈련참모가 없고 인사참모가 훈련을 담당했는데 1941년이 되자 인사참모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부대들이 도착하면서 갑자기 팽창한 수비대를 관리하는 데만도 일에 깔려 죽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훈련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는데 여기에는 일본군의 실력을 얕본 말레이 사령부의 오만도 한 몫을 했다. 일본에 파견나가 있던 전쟁성의 무관들은 일본육군의 전투력이 강하다고 보고했으나 말레이 사령부는 무시했다. 그들은 무장이 빈약한 중국군에게 고전하고 있는 일본육군의 전투력이 강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시간을 최대한 아끼면서 강하게 훈련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부족했다.
부대가 조각난 채로 말레이에 도착하여 넓은 지역에 분산 배치된 것도 훈련에 지장을 주었다. 부대들이 분산된 상태에서 야포와 대전차포의 도착이 늦어지고 통신능력도 부족하여 합동훈련을 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제3군단은 제대로 된 통신부대가 없어 말레이 전투 내내 거의 민간 통신에 의지했다.
훈련을 방해한 다른 요인은 민간인 노동자의 부족이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무농장이나 주석광산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군에서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말레이 사령부는 전쟁성에 요청하여 1940년 말에 인도로부터 노무중대 2개를 받았지만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1941년 4월에 전쟁성은 현지에서 노무중대 6개를 편성하는 것을 허가했으나 해협식민지 당국이 반대했다. 해협식민지와의 힘든 협상 끝에 6월에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노무중대 1개를 편성했으나 8월이 되자 중국인들이 모두 달아나면서 해체되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당시 전쟁성이 허용한 보수는 하루 45센트였는데 이것은 현지 시세로 비숙련 여자의 일당이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고무농장에서 일을 하면 숙식 제공과 함께 하루 1.1 말레이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퍼시발 중장은 인도군 노무중대를 더 보내 달라고 전쟁성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전쟁성은 10월에야 비로소 현실에 맞는 급료 지급을 허락했으나 이번에는 감독관들의 급료가 문제였다. 노무중대의 감독관으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이 필요했는데 이런 사람은 일당 2.75 말레이달러 이하로는 구할 수 없었다. 감독관 급료로 일당 2 말레이달러를 고집하던 전쟁성은 11월 19일에야 2.75 말레이달러를 받아들였고 비로소 노동자 모집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일본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퍼시발 중장이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1940년 말에 파견된 인도군 노무중대 2개가 전부였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말레이 상실에 대한 보고서에서 만일 퍼시발 장군이 단지 5,000 명의 노동자만 가지고 있었어도 1941년 12월과 1942년 1월의 혼란은 대부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노동자의 부족으로 병사들은 훈련할 시간에 자신들의 막사와 방어 시설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남부 조호르 및 싱가포르의 방어를 담당한 제8호주사단과 제12인도보병여단은 상황이 좀 나았다. 제8호주사단은 호주 본토를 떠나기 전에 일본군이 강철같은 의지와 강인한 체력을 가졌으며 정글전에 잘 훈련된 만만찮은 상대라는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정글전 훈련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더하여 사단장 베넷 소장은 폭넓은 재량권을 얻어 자유롭게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호주군은 인도군만큼 널리 흩어져 배치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야포 및 박격포와 같이 도착했기 때문에 합동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제22호주여단은 일본군이 쳐들어 왔을 때 이미 11개월간 말레이에 주둔하면서 훈련하여 정글전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1941년 8월에 도착한 제27호주여단은 도착과 동시에 맹훈련에 돌입했으나 훈련 기간이 짧아서 제22호주여단보다는 정글전에 대한 숙련도가 떨어졌다.
의용대는 대체로 무장이 약했으며 훈련도 또한 낮았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제9 및 제11인도사단으로 이루어진 히스 중장의 제3군단에게 북부 말레이의 방어와 투우사 작전을 맡겼다.
제8호주사단은 남부 조호르의 방어를 맡았고 싱가포르 방어는 2개 보병여단이 맡았다. 제12인도보병여단은 사령부 예비로서 1개 대대는 포트 딕슨에, 1개 대대는 싱가포르에 배치했다.
사령부를 쿠알라룸푸르에 둔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제9사단을 동해안 방어에 돌리고 제11사단으로 투우사 작전을 준비했으며 제28여단은 군단 예비대로 서해안 중부의 이포에 주둔시켰다.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제8여단을 코타바루에, 제22여단을 쿠안탄에 배치하여 비행장을 방어했다. 제9사단 사령부는 군단 사령부와 같이 쿠알라룸푸르에 두었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알로스타 북쪽의 태국 국경 지대에 제6 및 제15여단을 배치하여 투우사 작전을 준비했다. 제11사단 사령부는 승게파타니 동쪽의 카케틸에 두었다. 동해안의 파타니와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가는 크로에는 1개 대대를 두어 파타니에 상륙한 일본군의 기습적인 남하에 대비했다. 전쟁이 터지면 페낭을 지키던 1개 대대도 크로 방면으로 투입할 것이었다. 크로 방면을 지키는 부대는 크로부대(Kroh column = Krohcol)라고 불렸다.
제3군단은 투우사 작전 발동이 늦어져 일본군이 크라 지협에 상륙할 때를 대비하여 예비 계획을 수립했다. 예비 계획에 따르면 주요 방어선은 태국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진 알로스타 북쪽의 지트라가 될 것이었다. 지트라에는 콘크리트 벙커와 참호를 건설하고 철조망을 쳤다. 그 앞에는 대전차호를 파고 있었으나 완성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파타니에서 남하하는 적을 막기 위한 레제 지점(Ledge Position)은 크로-파타니 도로를 따라 태국 영토 내로 50km 정도 들어간 지점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크로부대가 재빨리 태국 국경을 넘어 북상하여 레제 지점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할 것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크로 서쪽 5km 지점에는 도로를 따라 2개 대대가 사용할 수 있는 방어거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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