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코타바루 상륙
1941년 12월 7일 오전 9시 30분에 태국 만의 상봉 지점(G점)에 도달한 일본선단은 1시간 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여 흩어졌다. 다쿠미 지대를 실은 선단은 영령 말레이 북단의 코타바루로 향했다.
보병제23여단장 다쿠미 히로시 소장의 이름을 딴 다쿠미 지대의 총 병력은 5,503명으로 다음과 같은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병제23여단 사령부
보병제56연대
산포병제18연대제1중대
공병제12연대
기타 통신, 수송, 의무부대
이외에 비행장 점령 후 수리, 방어 및 관리를 위하여 건설 및 근무부대, 독립속사포 2개 중대 및 야전고사포 1개 중대, 그리고 비행장 중대등이 동행했다. 상륙은 독립공병제14연대가 맡았으며 정박장 사령부와 수상근무부대 등도 투입되었다. 또한 수송선의 대공방어를 위하여 선박고사포제1 및 제2연대의 분견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쿠미 지대를 실은 선단은 아와지산마루(9,475톤), 아야토산마루(9,475톤), 그리고 사쿠라마루(7,170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와지산마루에는 보병여단사령부, 보병제56연대 제1대대 및 제5중대, 연대포중대, 사단공병 1개 소대, 기타를 합쳐 1,653명이 타고 있었다. 아야토산마루에는 보병제56연대본부, 보병제56연대제3대대, 연대속사포중대, 공병제12연대의 1개 소대, 기타를 합쳐 1,700명이 타고 있었다. 사쿠라마루에는 보병제56연대제2대대(제5중대 제외), 공병제12연대의 1개 소대, 기타를 합쳐 2,150명이 타고 있었다.
독립공병제14연대가 보유한 주정은 특수대발동정(특대발) 3척, 대발동정(대발) 24척, 소발동정(소발) 21척, 장갑정 3척, 고속정 및 전령정 각 1척이었다. 주정의 수송능력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특대발 100명, 대발 70명, 소발 30명이었다. 따라서 한번에 2,000 명 정도를 중화기, 탄약, 접이식 보트 등과 함께 상륙시킬 수 있었다. 최초 상륙에 제1 및 제3대대 주력과 제5중대가 상륙했다.
(대발동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aihatsu-class_landing_craft)
다쿠미 지대는 상륙 이후 작은 강을 건너는데 사용할 수 있는 접이식 보트를 준비했다. 판자로 만들어지고 중간에 고무로 이어진 이 보트는 접어서 운반하다가 강을 만나면 펴는데 길이 4.5m, 폭 1.5m, 흘수 90cm 로 1명이 2분 내로 펼 수 있었다. 완전 무장한 병사 12명이나 산포 1문을 4명의 포반원과 함께 운반할 수 있었으며 외부 모터를 사용하여 8노트를 낼 수 있었다. 이동은 트레일러에 실어 자동차로 끌어야 했으나 12명이 들고 옮길 수도 있었다. 제1차 상륙부대인 제3대대 주력은 12척, 제1대대 주력은 8척의 접이식 보트를 가지고 상륙했다.
상륙하는 병사의 소지품은 소정의 탄약과 수류탄 2-3발, 식량 5일치, 피복 등으로 군장 무게는 37kg 정도였고 전원 구명동의를 착용했다.
제56연대의 완편 인원은 3,525명이지만 환자, 물품감시자, 추후 상륙인원 등을 제외하자 상륙 인원은 2,900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호위대는 제3수뢰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센다이, 제19구축대(아야나미, 우라나미, 시키나미, 이소나미), 소해함 2척, 구잠함 1척으로 총 8척이었다.
(일본경순양함 센다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Sendai)
다쿠미 지대를 실은 선단은 1941년 12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상봉점을 떠나 센다이를 기함으로하는 8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16노트의 속력으로 코타바루로 향했다. 오후 8시에 센다이로부터 코타바루 앞바다의 풍속 7m, 파고 1m 로 상륙작전에 적합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9시부터 선단은 해안에 접근하여 남하했다. 오후 11시가 되자 달이 떠올랐다. 양륙작업대는 주정을 결박한 밧줄을 푸는 등 준비에 들어갔고 보병들도 갑판에 집결했다. 오후 11시 55분, 선단은 해안에서 3km 떨어진 해역에 닻을 내렸으며 센다이와 구축함들은 해안 방어선과 코타바루 비행장에 대해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바람이 심해져 파고가 상륙 한계인 2m 로 높아졌으므로 주정을 내리는 일은 어려웠다. 아와지산마루에서 기중기로 최초의 대발을 내리려고 할 때 선체가 기우뚱하면서 대발이 선체에 부딪히자 엄청난 소음과 함께 고속정이 대발 위에 떨어졌다. 주정을 모두 물에 띄우는데 1시간이 걸렸다.
이어서 병사들이 선체를 내려가 주정에 올라탔는데 이 과정도 어렵고 위험했다. 1인당 37kg 의 군장을 메어 움직임이 둔해진 병사가 파도에 넘실거리는 주정에 내리다가 바다에 빠지기도 했으며 일부 주정은 파도에 밀려 수송선에 세차게 부딪히거나 심지어 전복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탑승은 오전 1시 14분에 끝났으며 주정들은 수송선을 떠나 발진 지점으로 나아갔다. 오전 1시 35분에 제1차 상륙부대가 발진했다.
상륙주정은 우익에 제3대대 주력, 좌익에 제1대대 주력의 2열 종대로 나란히 나아가다 해안에서 1km 까지 접근했을 때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했다. 가장 왼쪽은 제2대대의 선발대인 제5중대, 좌익은 제1대대 주력, 우익은 제3대대 주력이었다. 해안에서 500m 까지 접근하자 육지의 영국군 벙커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특히 영국 방어선의 서쪽인 바당 부근 해안에는 제27산포대의 3.7인치 산포 2문이 배치되어 우익인 제3대대 쪽에 강력한 포격을 가해왔다. 제1차 상륙부대는 오전 2시 15분에 상륙했다.
(코타바루 전투 상황도.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http://www.oocities.org/dutcheastindies/kota_bharu.html)
공병들은 제1차 상륙부대를 실은 주정들이 수송선을 떠나자마자 제2차 상륙에 배당된 주정들을 내렸으며 곧 병력들이 옮겨타기 시작했다. 보병제56연대장 나스 요시오 대좌가 지휘하는 제2차 상륙부대의 우익은 제56연대본부 및 제3대대의 나머지 병력으로 이루어졌고, 좌익은 제1대대의 나머지 병력 및 지대 참모 일부로 이루어졌다. 제2차 상륙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오전 3시 30분 상륙했다. 수송선에는 제1차 상륙에서 돌아온 주정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여 제3차 상륙부대가 옮겨타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 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코타바루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것은 베르톨트 키 준장의 제8인도보병여단으로 4개 보병대대, 감편된 1개 산포대, 그리고 1개 야포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병대대 중 제2/12FFR대대(2/12th Frontier Force Regiment)는 제22여단으로부터 임시로 배속된 부대로 2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25파운더 8문을 가진 제73야포대(73rd field Battery)도 임시로 배속된 부대였다. 편제부대인 제21산포대(21st Mountain Battery)는 원래 3.7인치 산포 8문을 보유했지만 1개 소대(section)를 제22여단에 배속시켜 6문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QF 3.7 인치 산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QF_3.7-inch_mountain_howitzer)
일본군이 상륙한 바당과 사박 사이 해안선은 제3/17도그라스대대가 지키고 있었고, 사박부터 남쪽의 쿠알라베숫까지는 제2/10발루치대대가 담당했다. 제1/13FF소총대대(1/13th Frontier Force Rifle)는 예비대로 페리갓에 주둔하고 있었고 제22여단에서 임시 배속된 제2/12FFR대대의 2개 중대는 역시 임시배속된 제73야포대대와 함께 남쪽인 촌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21산포대는 2문으로 이루어진 소대(section) 별로 나뉘었다. 1개 소대는 바당 부근의 해안선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2개 소대는 해안선과 코타바루 비행장 사이에 전개했다. 해안선을 방어하는 제3/17도그라스대대는 기관총이 설치된 콘크리트 벙커들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펴고 있었으며 벙커 앞에는 철조망을 두르고 지뢰를 깔았다.
일본군 상륙 보고를 받은 극동공군총사령관 펄포드 소장은 반격을 명령했다. 코타바루 비행장에 주둔 중이던 제1호주정찰비행대대의 허드슨 2대가 날아올라 오전 3시 30분에 일본선단 상공에 도달하여 정찰했다. 이어서 폭탄을 장비한 허드슨들이 날아올라 일본수송선 상공을 낮게 지나가면서 폭격을 가했다. 허드슨들은 밤새 15회 출격하여 아와지산마루에 3발, 아야토산마루에 3발, 사쿠라마루에 2발을 명중시켜 아와지산마루를 격침하고 아야토산마루롸 사쿠라마루를 소파했다.
일본선단의 호위함정들과 수송선에 배치된 고사포들이 조준을 방해하여 첫번째 폭격은 실패했으나 폭격이 진행되면서 점차 정확해졌다.
당시 일본수송선에는 방공을 위하여 선박고사포 부대가 탑승해 있었다. 아와지산마루와 아야토산마루는 고사포 6문, 고사기관포 8문씩 장비하고 있었으며 방공함 역할을 부여받은 사쿠라마루는 고사포 8문, 고사기관포 12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아직 상륙하지 않은 고사포, 경기관총에 소총까지 사격했다. 폭격을 마친 허드슨들은 수송선 갑판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 와중에 제3차 상륙부대는 기를 쓰고 수송선에서 주정으로 옮겨탔다.
아와지산마루는 제2번창 부근에 명중한 폭탄을 시작으로 3발을 맞았다. 갑판에 쌓아두었던 탄약과 연료에 불이 붙어 폭발과 함께 선체는 연기에 휩싸였다. 아야토산마루는 좌현에 명중탄을 맞아 단정들이 부서지고 제4번창 부근의 선실이 박살났다. 10분 후 아야토산마루는 다시 제5 및 제6번창 부근에 각각 명중탄을 맞아 하역이 불가능해졌다. 아야토산마루의 인명 피해는 전사51명, 중상 34명, 경상 15명이었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대공화력을 갖추고 일종의 방공함 역할을 부여받았던 사쿠라마루도 명중탄 2발을 맞아 수선 하에 지름 1m 의 구멍이 뚫렸고 전사 3명, 중상 수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오전 3시 35분에 해안에서 돌아온 주정 1척이 아와지산마루에 다가와 큰 소리로 "02시 15분 상륙 성공" 이라고 외쳤다. 무전기가 젖어 먹통이 되었던 것이다. 다쿠미 소장은 즉시 제25군 사령부에 전보를 쳤다.
"8일 02시 15분 제1회 상륙성공. 적의 저항이 강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짐. 해안에서 요란한 총포성이 들림. 선단은 적기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음"
호위를 맡은 제3수뢰전대는 제3차 상륙을 연기하고 철수할 것을 권고했으나 다쿠미 지대장은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해안에서 병력들이 고전 중이므로 제3차 상륙을 마치고 선단은 오전 6시 30분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오전 4시 30분에 주정을 타고 해안으로 출발해 버렸다.
결국 선단은 제3차 상륙을 마치고 오전 6시에 철수했다. 제3수뢰전대는 수송선 2척을 이끌고 파타니 방면으로 철수했고 구잠함과 소해함이 약 30분간 아와지산 마루의 생존자 약 260명을 구한 후 뒤따랐다. 날이 밝자 코타바루와 공케다에서 이륙한 빌데비스트가 파타니로 철수 중인 일본선단을 쫓아와 경순양함 센다이에 뇌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선단은 오후 12시 20분에 무사히 파타니에 도착했다. 움직일 수 없는 아와지산마루는 철수하지 못하고 날이 밝자 다시 몰려온 영국기에 추가로 명중탄을 얻어맞았다. 코타바루 앞바다에서 4일간 불타던 아와지산마루는 12일 밤에 대폭발을 일으키고는 침몰했다.
파타니에 도착한 아야토산마루와 사쿠라마루는 사상자를 옮긴 후 다쿠미 지대의 잔여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들을 양륙하기 위하여 9일 오전 1시 30분에 파타니를 떠났다. 문제는 양륙에 사용할 주정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9일 아침에 코타바루 앞바다에 돌아오니 주인잃은 주정들이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다. 선원들이 주정들을 끌어모아 1척당 십수척의 주정을 확보하고 오전 7시 30분부터 다쿠미 지대의 잔여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 양륙을 시작했다. 양륙 작업 중에 영국기 2대가 나타나 공격을 가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오후 3시에 양륙작업을 마친 아야토산마루와 사쿠라마루는 무사히 싱고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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