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개전
1941년 10월부터 극동총사령부에는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주정을 건조하고 하이난 섬에서는 정글전 훈련을 하고 있으며 남부 인도차이나에 비행장을 건설 중이고 일본선박들은 일본이 지배하는 해역으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1월이 되자 상하이에서 만든 주정을 실은 일본선박들이 캄란 만에 모이고 남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기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941년 11월 21일에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일본의 침공이 확실시되면 투우사 작전을 실행할 권한을 요구했다.
22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말레이에 군사경계태세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부 항공기들이 전투태세에 들어가고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투우사 작전 발령을 위한 절차를 밟았으며 동해안에 배치된 병력들은 2급 준비태세로 들어갔다.
25일에 전쟁성은 브룩포팸 대장에게 투우사 작전은 전쟁내각의 명령이 있어야만 실행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27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일본군이 사이공을 떠나면 36시간 만에 싱고라에 상륙할 수 있다면서 전쟁내각의 승인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전쟁성에 경고했다. 같은 날 브룩포팸 대장은 하노이 주재 미국영사로부터 일본군이 12월 1일에 사전 경고없이 싱고라에 상륙하려 한다는 첩보를 받았다.
28일에 해군성은 프린스오브웨일스를 타고 콜롬보에 도착한 필립스 중장에게 비행기로 싱가포르로 간 다음 마닐라에 가서 미국, 영연방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해군 운용에 관하여 협의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중국사령관 레이턴 중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게 잠수함으로 싱고라 부근 해상을 정찰해 달라고 요청했다. 브룩포팸 대장은 코타바루에서 290km 떨어진 해상까지 정찰하라고 명령했으며 필리핀의 미군에게 비행기로 마닐라와 캄란 만 사이를 정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의 미군은 워싱턴으로부터 일본을 자극하지 않도록 캄란 만 정찰을 금지하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29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미국과 일본의 협상이 실패했으며 일본이 언제라도 필리핀, 태국, 말레이 또는 보르네오를 공격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3군단은 명령이 떨어지면 6시간 내로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영국참모본부는 브룩포팸 대장이 27일에 보낸 경고에 대한 답신을 보냈다. 참모본부는 일본선단이 크라 지협 쪽으로 항해하는 것만으로 태국을 침공한다고 볼 수 없으며 그 상태에서 투우사 작전을 실시하면 영국이 먼저 태국의 중립을 침범하게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개전시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투우사 작전은 전쟁내각의 승인을 얻어 실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12월 1일에 의용대가 소집되고 말레이 수비대 전체가 2급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2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불쾌한 첩보를 받았다. 즉 태국의 친일파들이 코타바루 북방 영국군 바로 눈 앞의 태국령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영국군의 월경을 유도해달라고 일본에 요청했으며 그럴 경우 태국은 즉시 영국에 선전포고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3일에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톰 필립스 해군중장이 새로 편성된 동양함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8일에 동양함대사령관이 중국사령관의 업무를 넘겨 받으면서 극동 지역의 모든 영국해군 전력은 필립스 중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4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2일에 받은 첩보에 의거해 일본군이 코타바루에 상륙할 것으로 보이면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권한을 요구했다.
6일에 캄란 만과 사이공에 집결해 있던 일본수송선단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코타바루를 이륙한 제1호주정찰비행대대의 허드슨 정찰기가 오후 12시 12분에 캄보디아 곶 남동쪽 130km 해상에서 일본제143연대를 실은 선단이 북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고 이어서 제5사단 주력을 태운 선단을 발견했다.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말레이나 태국으로 향하는 침공선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나 남부 인도차이나의 카우롱으로 향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투우사 작전 명령을 내리지 않고 대신 말레이 수비대에 제1급 경계령을 내렸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오후 3시 15분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실행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수 있도록 제11인도사단을 준비시키고 병력과 물자의 수송을 담당할 기차도 준비시키라고 말했다.
(1941년 12월 4일 - 10일 사이 말레이 및 태국만의 작전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N/UK/RN/BS-14_POW+Repulse/)
7일 아침에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카우롱 만을 정찰하러 갔다가 일본기에게 격추되었다. 날씨가 나빴으나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정찰기를 띄웠다. 오후에 정찰기 1대가 서쪽으로 항진하던 일본상선 2척이 남쪽으로 변침하는 장면을 발견했다. 오후 5시 30분에 정찰기 1대가 코타바루 북방 180km 해역에서 상선 1척과 순양함 1척이 싱고라 방향으로 항진하는 것을 발견했다. 1시간 후에는 또다른 정찰기가 파타니 북방 100km 해역에서 일본구축함 4척이 해안과 평행하게 남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모든 정보는 오후 9시가 되어서야 극동총사령관에게 도달했다.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일본군이 싱고라로 향하고 있다면 몇 시간 후인 8일 새벽에는 상륙을 시작할 것이었다. 영국군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싱고라에 도달하는 데에는 24시간이 걸리므로 싱고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상륙을 마친 다음일 것이었다. 만일 일본군이 싱고라를 향하지 않은 상태에서 투우사 작전을 발동하면 영국이 먼저 태국의 중립을 범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태국 외무장관은 7일 낮에 태국 주재 영국대사에게 만일 태국이 일본에게 공격을 받으면 영국 측에서 싸우겠지만 일본이 태국을 공격하기 전에 영국군이 태국 국경을 한발짝이라도 넘는다면 태국은 일본 측에서 영국과 싸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정적으로 브룩포팸 대장은 4일에 요구했던 투우사 작전 실행 권한에 대하여 영국참모본부의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참모본부는 브룩포팸 대장의 요구를 승인했으나 너무 늦었다. 참모본부의 전문은 말레이 시간으로 8일 오전 8시에 극동총사령부에 도착했는데 일본군은 전문이 도착하기 6시간 전에 코타바루에 상륙했으며 8일 오전 7시 30분터는 일본기들이 말레이 북부의 비행장들을 맹폭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브룩포팸 대장과 달리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7일 오후 11시 20분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8일 아침 8시를 기하여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자정을 넘어 8일 새벽이 되자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 오전 1시경 코타바루 비행장을 책임지고 있는 노블 공군중령이 싱가포르의 공군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코타바루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떠 있으며 포격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펄포드 소장은 즉시 정찰기를 띄워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정찰기가 뜨기 전에 코타바루 지역을 담당하던 제8여단장 베르톨트 키 준장으로부터 일본군이 상륙 중이라는 결정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1년 및 그 이전 > 싱가포르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가포르 함락(11)-코타바루 함락 (0) | 2018.03.22 |
---|---|
싱가포르 함락(10)-코타바루 상륙 (0) | 2018.03.21 |
싱가포르 함락(8)-방어태세 (0) | 2018.03.20 |
싱가포르 함락(7)-제25군 (0) | 2018.03.20 |
싱가포르 함락(6)-남방작전 (0) | 2018.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