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개전 결정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을 서둘렀다. 7월 12일에 비시 주재 일본대사가 비시 프랑스 수상인 페탱 원수에게 7월 20일까지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의 진주를 허가하지 않으면 실력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의 암호를 도청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미국은 영국에 통보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미국은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일본은 필리핀의 코 앞까지 다가올 뿐 아니라 서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수 있었다. 영국은 미국을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비시 프랑스는 7월 21일에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용인한다는 의사를 일본에 전달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루스벨트 대통령은 24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중립국으로 간주한다면서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루스벨트의 경고를 무시했다. 바로 그날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발표하고 다음날 주일대사를 통하여 미국에 통보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무시당한 미국의 반응은 재빨랐으며 내용은 일본이 기겁할만큼 거칠고 단호했다. 7월 26일에 미국은 석유를 포함하여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고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영국은 영연방의 동의를 얻어 같은날 영연방과 일본과의 교역 중단 및 자산 동결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27일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같은 조치를 취했다. 영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안전보장을 받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네덜란령 동인도 제도의 행동은 용감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와 경제계는 경악했다. 미국, 영연방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의 교역이 끊긴다는 것은 사실상 일본의 대외교역 자체가 끊긴다는 뜻이었다. 당장 창고에 쌓아놓은 물건들의 수출이 막혀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비축한 원료들이 떨어지면 생산도 중단될 것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석유였다. 당시 일본은 석유 사용량의 10% 정도만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나머지 90% 를 수입했다. 수입 물량의 80% 는 미국으로부터, 10% 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부터, 나머지 10% 는 기타 지역에서 조달했다. 1940년에 일본이 비축하고 있던 석유는 4960만 배럴이었는데 이는 일본이 평화시에 최대한 아껴쓸 경우 3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물론 전쟁 시에는 훨씬 빨리 떨어질 것이었다.(제2차 세계대전 미해군 공식전사를 집필한 새뮤얼 모리슨 제독에 의하면 원유의 경우 배럴 수를 7, 중유는 6.7, 경유는 8, 휘발유는 8.5로 나누면 대략의 톤수가 나온다.) 일본은 미국이나 영연방은 몰라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자신들의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7월 29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계약 연장을 원하는 일본의 다급한 요청에 대해 앞으로 일본에 대한 자원 수출은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허가는 상황이 호전되어야만 내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만 이미 계약된 물량의 경우 현금 지급을 조건으로 선적을 허용했다.

 

7 월 말에 열린 연락회의에서 일본은 일단 미국과 협상을 벌여 석유 수입을 재개하되 여의치 못할 경우 미국 및 영국과 전쟁도 불사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외무성은 8월 8일에 일본의 제안이 담긴 각서를 미국무성에 제출했다. 신임 도요다 외상의 첫 각서는 강경했다. 일본은 미국에게 교역 재개, 필리핀 방어 준비 중단, 중국, 영국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대한 군사장비 공급 중단과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영구적으로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반대급부로 일본은 인도차이나 이남으로는 진출하지 않으며 태평양의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1941년 8월 9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만나 회담하고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일본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일본의 공격을 받을 경우 무력으로 지원하겠다는 보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보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루스벨트는 처칠의 부탁을 거절하는 대신 일본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겠다고 약속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노무라 대사를 불러 일본의 8월 8일자 제안을 거부하면서 더 이상 일본이 남진을 계속하면 미국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처칠은 8월 24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영국은 극동에서 미국의 입장에 찬성하며 만일 미국이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면 미국 편으로 참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미국 입장에 무조건 따른다는 원칙을 세우고 일본을 상대하는 문제는 미국에 맡긴 다음 발을 뺐다. 대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방어 준비에 매달렸다.

 

고노에 수상은 파국을 막기 위하여 8월 28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나 일본의 진의를 의심한 미국은 9월 3일에 거부했다. 9월 6일의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에서 일본은 10월 말까지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미국 및 영국과 협상을 지속하되 10월 상순까지 만족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개전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영국에게는 극동에 함대를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극동에 파견될 함대의 규모와 성격을 둘러싸고 구형전함 다수를 파견하려는 해군성과 신예전함 1척을 포함한 소수를 파견하려는 처칠 수상 사이에 논쟁이 일었다. 결국 처칠의 의견대로 신예 킹조지5세급 전함과 순양전함, 그리고 항공모함 각 1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났다.

 

1941년 8월 초에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유사시 4개 폭격비행대대와 2개 전투비행대대의 지원을 받는 3개 보병여단을 태국령 크라 지협으로 진격시키는 내용의 투우사(Matador) 작전을 수립했다. 작전의 목적은 싱고라-파타니 지역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주변 비행장을 점령하며 방콕과 싱가포르를 잇는 철도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투우사 작전은 명령이 떨어지면 36시간 이내로 실시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크게 늘려잡아 48개 보병대대, 2개 전차연대, 2개 중대공포 연대, 그리고 야포, 대전차포, 공병 및 기타 지원대가 필요하다고 영국참모본부에 보고했다. 이와는 별도로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과 싱가포르의 대공방어를 위하여 중대공포 212문과 경대공포 124문을 요구했다.

9월 17일에 참모본부는 일본의 태국 침공 시에 발동한다는 조건으로 투우사 작전을 받아들였다. 또한 방어 병력에 대한 퍼시발 중장의 평가도 받아들이고 병력 파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으나 가까운 장래에 요구한 병력 모두를 보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더프 쿠퍼. https://en.wikipedia.org/wiki/Duff_Cooper#Political_career)

 

9월 9일에 싱가포르 지역상(Resident Cabinet Minister in Singapore) 더프 쿠퍼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 지역상이란 극동 방어에 있어서 각 지역 및 부처 그리고 민간과 군사 분야의 조율을 위하여 만든 직책으로 쉽게 말해 극동에서 전쟁 내각을 대리하는 자리였다.

 

말레이 수비대는 증강되었다. 8월 15일에는 던칸 맥스웰 준장의 제15호주여단이 도착했고 9월 3일에는 윌리엄 카펜데일 준장의 제28인도보병여단이 도착했다. 11월에는 제5, 제88, 제137 야포연대와 제80대전차연대가 도착했다.(영연방군의 포병연대는 포대의 집합체로 미군의 대대와 같은 급이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일본은 9월 24일에 새로운 제안을 했으나 진전된 내용이 없었으므로 미국은 10월 2일에 다시금 거부했다. 협상에 돌파구를 찾지 못한 고노에 내각은 10월 16일에 붕괴했고 18일에 도조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다. 도요다 외상도 도고 시게노리로 교체되었다. 강경파 도조 수상도 미국과의 개전 결정은 부담스러웠다. 11월 5일의 어전회의에서 11월 25일까지 미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고 그때까지 결말이 나지 않으면 즉시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또한 구루스 사부로를 특사로 미국에 파견해 노무라 대사를 돕도록 했다.

 

고노에 내각의 붕괴와 도조 내각의 성립은 영국에 긴박감을 주었다. 10월 20일에 전쟁 내각은 전함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 그리고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을 싱가포르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6일에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영국을 떠났다. 인도미터블은 11월 3일 자메이카의 킹스턴 항구 외곽에서 좌초하여 극동 파견 함대에서 빠졌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11월 7일에 A 안을 제안했으나 이전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므로 미국은 15일에 거부했다. 18일에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는 석유 수출을 재개함과 동시에 일본군이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철군한다는 안을 제안했다. 미국은 솔깃해했으나 일본외무성은 20일에 주미일본대사관에 훈령을 내려 최종안인 B 안을 제시하고 수정없이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일본의 최종안인 B 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 철군 기한을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된 후로 설정했고 삼국동맹조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국을 막기 위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현재 상태를 동결시키는 조건 하에 3개월 기한으로 일본의 민간 소요량에 한하여 석유 수출을 허용하는 유화안을 만들었다. 유화안에 반대하는 헐 국무장관의 요청에 따라 11월 24일 밤과 25일 새벽에 걸쳐 이 제안을 영국, 중국, 호주 및 뉴질랜드에 보내 의견을 물었다. 처칠 수상은 유화안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으나 루스벨트의 체면을 생각하여 신중하게 답변했다. 그는 답신에서 유화안이 중국에게 너무 가혹하다면서 중국을 핑계삼아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중국은 유화안에 격노했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도 반대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유화안을 포기하고 국무성에서 준비한 강경한 각서를 승인했다.

1941년 11월 26일에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주미대사에게 훗날 헐 노트로 알려진 각서를 전달했다. 총 10조로 이루어진 각서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삼국동맹조약을 탈퇴한 이후에야 석유 수출 재개를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명시한 강경한 내용이었다. 일본은 거부했다.

 

1941년 12월 1일의 어전회의에서 일본은 12월 8일을 기하여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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