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럽 전쟁의 영향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극동방어 정책도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영국이 유럽에서 전쟁에 휩싸이자 보다 대담하게 나왔으며 영국은 위축되었다.
일본은 1939년 9월 5일에 중국에서 활동 중인 영국, 프랑스 및 미국의 강상포함들과 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 말까지 영국은 양쯔 강과 서강에서 활동 중이던 20여척의 강상포함들을 철수시켰다. 이 배들은 대부분 싱가포르로 가서 소해함으로 개조되었다. 상하이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2개 대대는 유지했지만 텐진에 주둔 중이던 1개 대대는 12월에 철수하고 대신 상하이에서 1개 중대를 파견했다.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중국 전대(China Squadron)는 개전과 동시에 소속 구축함이 대부분 인도양과 지중해로 빠져 나가면서 약화되었는데 남아있던 순양함들도 본국에서 예비로 보관하던 낡은 순양함으로 대체되어 전력이 더욱 약해졌다.
1939년 11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호주는 유럽에서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공격하면 극동에 함대를 파견한다는 방침을 유지한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처칠 해상은 지중해를 희생해서라도 싱가포르를 유지하고 호주 및 뉴질랜드에 대한 공격을 막는다는 영국 정부의 방침은 변함없다고 답변했다.
말레이에서는 적절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협 식민지에서는 1939년 말에 공습경계사령부(Air Raid Precaution Headquarter)를 만들고 싱가포르와 페낭에 공습감시대, 보조 소방대 및 의료대, 소규모 의용 방위대를 만들었는데 이들 조직은 중국인과 말레이인 자원자들이 주력이었으며 지휘부는 백인이었다.
도비 소장의 뒤를 이어 1939년 8월에 말레이 사령관이 된 라이어널 본드 소장은 의용대를 확장하려다 장애에 부딪혔다. 병력을 대부분 현지인으로 충당하더라도 장교를 비롯한 핵심 인력은 백인이 맡아야 했는데 숫자가 모자랐다. 평소에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는 수요에 비하여 백인이 모자랐는데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젊은 백인 남성 다수가 입대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귀국해 버렸다. 이는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가 가진 취약점의 하나로 현지의 백인 중에서 말레이 반도나 싱가포르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곳이 자기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터지자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백인 남자들은 말레이의 방어를 위하여 의용대에 들어가지 않고 귀국하여 영국군에 입대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는 정규군의 징병이나 모병을 실시하지 않아 현지에서 정규군 입대는 불가능했다.) 이 여파로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에서는 공무원이 모자랐고 고무나무 농장이나 주석 광산도 인력난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협 식민지 당국은 의용대를 확장하려는 하는 본드 소장의 계획에 반대했다. 해협 식민지 총독 셴튼 토머스 경은 1940년 1월 27일에 열린 본드 소장과의 회의에서 의용대 확장이나 징병은 일본과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야 가능하며 그때가 되어도 인력 동원은 경제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말레이 사령관에게는 인력 동원에 관하여 해협 식민지 총독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본드 소장은 의용대 확장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해협 식민지 총독 셴튼 토머스 경. https://en.wikipedia.org/wiki/Shenton_Thomas)
말레이 방어에 대한 해협 식민지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군사적인 견지에서 어리석었으며 훗날 싱가포르를 상실하게 만든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해협 식민지 당국 입장에서도 사정이 있었다.
말레이 반도는 영국의 전시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에 말레이 반도는 전 세계 고무의 38%, 주석의 58% 를 생산하여 대부분 수출했다. 1938년에 말레이 반도의 수출액은 1억 3400만 파운드로 그 중에서 영연방을 제외한 외국으로의 수출은 9300만 파운드였는데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했다. 전쟁으로 달러 한 푼이 아쉬운 영국 정부 입장에서 말레이 반도는 뚜껑을 열고 달러를 꺼내면 저절로 달러가 채워지는 요술상자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 정부는 해협 식민지 당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주석 및 고무 수출을 늘리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수출을 늘리라고 압력을 가했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1941년까지 주석 수출을 3배, 고무 수출은 2배로 늘리라고 해협 식민지를 몰아붙였다. 따라서 해협 식민지 당국은 말레이 반도 전역에 걸쳐 고무 농장을 확대하고 주석 광산에서 채굴량을 늘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연히 인력 수요가 급증하여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과 주석 광산은 인력난을 겪고 있었으며 특히 관리를 맡은 백인 인력의 부족은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협 식민지 총독이 인력난을 심화시킬 의용대 확장이나 징병에 반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토머스 총독은 의용대 확장에 반대하는 서한을 본국에 보냈다. 이 서한에서 총독은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의 방어력 강화는 인력이 많이 필요한 의용대나 육군이 아니라 공군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동 공군 사령관(Air Officer Commanding, Far East) 존 바빙턴 공군소장은 토머스 총독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는 항공성에 보낸 각서에서 싱가포르에 파견될 함대의 규모가 줄어든 이상 말레이 방어는 공군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하여 말레이의 공군력을 확충함은 물론 육군도 싱가포르 방어에서 벗어나 말레이 반도 동해안에 건설한 비행장을 보호함으로써 공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3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국방어위원회 산하의 해외방어위원회(Oversea Defence Committee)는 토머스 총독의 견해를 지지했다. 위원회는 말레이 반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경제적인 것이며 의용대 확장이나 징병은 일본과 개전한 이후에, 그것도 고무 농장이나 주석 광산의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만 실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반면 토머스 총독과 바빙턴 소장이 주장한 말레이의 공군력 강화는 외면했다. 오히려 1940년 6월 프랑스의 패배로 전황이 악화되자 지중해, 중동 및 인도 공군력 강화의 일환으로 1940년 가을에 말레이에서 2개 폭격비행대대를 인도로 불러들였다.
해외방어위원회의 결정은 1940년 4월 초에 싱가포르에 전해졌다. 말레이 사령관 본드 소장은 극동 공군사령관 및 해군과 상의한 후 4월 13일에 전쟁성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본드 소장은 함대의 도착 기한이 180일로 늦어진 상황에서 말레이의 방어를 위해서는 최소한 3개 사단, 3개 기관총 대대, 2개 전차대대와 정원의 20% 에 해당하는 훈련된 예비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공군이 크게 강화되어 적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상륙한 적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육군 병력을 4개 여단, 5개 독립대대, 그리고 1개 전차중대로 줄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5월 16일에 런던에서 열린 해외방어위원회는 본드 장군의 보고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아마 증원군을 보내줄 능력이 안되는 상황에서 논의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대신 의용대의 확장에 대해 약간 숨통을 터 주어 6월 말부터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 의용대 확장과 훈련이 시작되었다.
1940년 6월에 접어들어 본국에서 적절한 증원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한정된 수비대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 지를 두고 말레이 사령관 본드 소장과 극동 공군 사령관 바빙턴 소장 사이에 의견차이가 심해졌다. 본드 소장은 싱가포르 방어의 핵심은 해군기지 방어이니만큼 수비대는 싱가포르 섬과 남부 조호르를 지키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비대 주력인 8개 정규보병대대와 대공포 부대는 모두 싱가포르와 남부 조호르 방어에 투입해야 하며 알로스타 비행장에 1개 정규보병대대를 투입하는 것 이외에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 방어는 의용대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바빙턴 소장은 싱가포르를 방어하려면 말레이 반도 전체를 방어해야 하며 그 임무는 공군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의 임무는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을 보호함으로써 공군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며 따라서 최소한 알로스타, 코타바루, 그리고 쿠안탄 비행장에 정규보병대대 하나씩을 투입하여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총독은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과 주석 광산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대체로 바빙턴 소장의 의견에 동조했다.
(말레이 반도.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irports_in_Malaysia)
1940년 6월에 연합군에게 일어난 재앙이 말레이 방어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 파견되었던 영국원정군은 독일군에게 참패하여 6월 초에 됭케르크에서 모든 장비를 잃고 몸만 빠져 나왔다. 6월 10일에 눈치를 보던 이탈리아가 추축국 측으로 참전했고 6월 22일에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다. 영국 본토는 독일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말레이에 있어 심각한 문제는 유럽 해군력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싱가포르에 대한 함대 파견은 유사시 프랑스 해군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군을 견제해 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 해군이 사라지자 영국 해군은 본국 해역과 지중해, 그리고 유보트의 위협으로부터 대서양의 해상 교통로를 지키는 데만도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이 상태에서는 일본이 공격한다고 해도 싱가포르에 함대를 파견할 여유는 없었다.
상황 변화를 감안하여 영국 참모본부는 1940년 7월에 극동 정세를 평가했다. 참모본부는 유럽의 정세가 명확해지기 전에는 일본이 영국 및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을 무릅쓰고 극동의 영국령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대신 일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에 진출할 것으로 보았으며 그럴 경우 영국은 경제적 제재 이상의 행동은 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만일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공격한다면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주둔 의미가 없어진 상하이와 텐진의 영국 수비대는 위신 추락을 감수하고 철수해야 하며 홍콩은 유사시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말레이의 방어에 대해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해군력을 크게 약화시키지 못하는 한 함대 파견이 어려워진만큼 공군과 육군의 강화 필요성을 인정했다.
영국참모본부는 말레이 방어를 위하여 22개 비행대대, 336대의 일선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말레이에는 8개 비행대대, 88대의 일선기가 있을 뿐이었으며 대부분 구식 비행기였다. 협력을 약속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144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말레이 방어에 몇 대나 할애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참모본부는 1940년 말까지 2개 전투비행대대와 2개 정찰비행대대를 말레이에 파견하고 말레이의 구형기들을 신형기로 교체하라고 전쟁 내각에 권고했다. 일선기 336대의 배치를 1941년 말까지 끝낸다는 것이 참모본부의 권고였으나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참모본부는 공군의 정비가 이루어져도 말레이 방어를 위해서는 6개 보병여단, 즉 2개 사단이 추가로 파견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2개 사단은 말레이의 방어에도 빠듯한 수준이기 때문에 영국령 북부 보르네오는 포기해야만 했다. 2개 사단을 빼낼 곳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영국 정부는 호주 정부에 1개 사단을 말레이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다. 나머지 1개 사단은 인도에서 파견되었다. 1940년 11월에 보병여단 2개를 가진 제11인도사단이 말레이에 도착했다.
참모본부는 또한 뉴질랜드에게 1개 보병여단을 피지에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당시 참모본부나 말레이 사령부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유사시 함대가 오지 않는다면 싱가포르 해군기지 방어는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말레이 수비대의 목표는 가능하면 말레이 반도 전체를 방어하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싱가포르를 방어함으로써 최대한 오랫동안 적의 해군기지 사용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남부 조호르의 조호르 강이 아니라 커다란 자연 장애물로 방어가 쉬운 싱가포르 해협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아야 했고 그러려면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질풍처럼 남하하고 있을 때 처칠 수상은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건설되어 있지 않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랐다. 그는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없다는 것은 배의 밑바닥을 만들지 않고 전함을 진수시킨다는 소리처럼 상식 밖의 일이라 상상도 못했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처칠이 도비 소장으로부터 시작된 말레이 및 싱가포르 방어의 기본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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