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태국 침공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 태국육군은 5개 사단, 약 50,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대로 훈련된 병력은 26,500명 정도였다. 공군은 약 24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는데 93대는 1940년 12월에 일본이 제공한 기체였다. 해군은 규모가 작고 훈련도 불충분한데다가 1941년 1월에 벌어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해군과의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개전을 앞두고 일본과 태국은 일본군의 통과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였다. 1941년 12월 2일의 협상에서 피분 송크람 태국수상은 태국 남부 크라 지협에 대한 일본군 상륙은 받아들였지만 일본군이 태국의 중심부인 방콕 평원을 통과하는 문제에는 난색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일본은 태국이 1905년에 영국에게 빼앗겼던 버마의 샨 지방을 되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다음날인 3일에 방콕평원 통과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통과 방식이었다. 일본은 당연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처럼 태국정부의 허락을 받아 평화롭게 통과하기를 바랬지만 피분 수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본 편에 서면서도 만약을 위하여 연합국의 눈에는 태국이 일본의 침공을 받는 것으로 비치길 원했다. 이를 위하여 피분 수상은 일본군의 방콕 평원 통과를 합의한 다음날인 4일, 영국 측에
"태국이 일본의 침공을 받을 것 같다."
는 언질을 남기고는 5일에 돌연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렸다. 피분 수상은 다음날인 6일 나타났으나 7일이 되어 개전이 임박하자 다시 사라졌다. 다급해진 일본은 태국주재 일본대사를 태국외상에게 보내어 일본군의 진주를 받아들이라고 윽박질렀지만 외상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 결국 일본제5사단은 8일 새벽부터 태국 정부의 허락없이 싱고라와 파타니에 상륙하여 태국군과 충돌했으며 오전 7시에는 근위사단이 태국의 동쪽 국경을 넘었다. 피분 수상은 8일 오전 7시에 자동차를 타고 청사에 나타났으며 곧 일본 측과 협상을 시작해 오전 11시 30분에 일본군의 통과를 위한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태국은 일본에 침공당하는 모양이 되었다.
(피분 송크람 태국수상.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invasion_of_Thailand)
태국 침공의 선두는 근위사단이었으며 그 뒤를 제15군 소속인 제33 및 제55사단이 뒤따랐다. 근위사단도 초기에는 제15군 소속이었으며 나중에 태국 남부를 거쳐 영령 말레이로 진입하면서 제25군 휘하에 들어갔다.
근위사단 중 가장 먼저 태국에 진입한 부대는 개전과 동시에 태국 정부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근위보병제4연대제3대대였다. 제3대대를 주력으로 속사포 1개 소대 및 연대포 1개 중대를 합친 1,100명의 병력은 수송선 1척에 타고 제25군을 수송하는 선단과 함께 항해하다가 7일 오전 10시 30분에 태국만의 G 점에서 헤어져 북상, 8일 오전 4시에 방콕 남쪽 방푸 해안에 상륙했다. 대발 1척, 소발 3척을 이용한 상륙은 저항을 받지 않았다. 제3대대는 함께 양륙한 차량 20대에 분승하여 방콕으로 달렸으며 해가 뜰 때쯤 방콕 시가지 남쪽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방어태세를 갖춘 태국군과 대치했다. 제3대대의 출현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피분 수상은 칩거를 풀고 오전 7시에 청사로 출근하여 일본대사와 협상에 임했다. 제3대대는 다음날 오후에 근위보병제4연대 주력이 방콕에 도착하자 복귀했다.
태국 정부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제4연대제3대대를 도와 방콕을 장악할 목적으로 근위보병제5연대제3대대의 2개 중대가 수송기를 타고 돈무앙 비행장에 강행착륙할 예정이었으나 태국정부와의 협정이 성립함에 따라 계획을 중단했다.
개전 당시 근위사단은 1941년 5월에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얻은 영토에 맞닿은 톤레사프 호의 남북에 배치되어 있었다. 호수의 북쪽에는 근위보병제5연대제1대대와 전차 1개 중대를 중심으로 한 선견대가 자리잡고 호수 남쪽에는 사단 주력이 자리했다.
선견대는 톤레사프 호 북쪽의 시엠레아프를 출발하여 신국경을 건너 시소폰, 프라친부리를 거쳐 방콕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근위사단 주력은 호수 남쪽에서 출발하여 시소폰에 도달한 다음 선견대의 뒤를 따라 방콕으로 향할 것이었다. 근위사단은 대부분 차량화가 되어 있었다.
(태국 중부 및 동부)
근위사단 선견대는 1941년 12월 8일 오전 7시에 국경으로 쇄도하여 저항을 받지 않고 태국군의 국경초소를 무장해제했다. 이후 선견대는 쾌속으로 시소폰을 통과한 다음 구국경선을 넘었다. 구국경선부터 방콕까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져 있었는데 잠시 후 일본비행기가 나타나
"금일 오전 11시 30분 평화진주협정 성립"
이라는 통신통을 떨어뜨렸다. 이제 태국군의 매복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진 선견대는 더욱 속력을 내어 9일 아침에 방콕 북쪽 돈무앙 비행장에 도착했다.
근위사단 주력은 톤레사프 호 남쪽에서 출발하여 바탐방을 거쳐 시소폰에 도달하여 선견대와 같은 경로로 9일 저녁까지 대부분 방콕에 도착했다. 차량화가 잘 된 근위사단 주력의 이동 모습은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로 장관을 이루었다. 근위사단사령부는 9일 오후 3시에 방콕에 도착하여 촐라롱콘 대학에 자리잡았다.
근위사단의 태국진입과 동시에 제15군 철도부대는 시스폰에서 태국의 구국경선까지 철도연결공사를 시작했다.
제3비행집단은 8일 오전에 방콕에서 일본군의 진주를 위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방콕 상공에 비행77전대 소속 전투기 11대와 비행제31전대 소속 경폭격기 9대를 띄웠다. 이때 태국전투기 3대가 달려들다가 격추되었으며 일본기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자 일본기들이 협정 타결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태국군 막사를 폭격했다.
이후 진주만 기습으로 미태평양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12월 10일에는 영국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면서 일본의 승세가 확실해지자 태국정부는 11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일본과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근위사단은 방콕 점령임무를 후속부대에 넘기고 차례로 말레이 방면으로 이동했다. 근위보병제4연대는 12월 11일부터 철도편으로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제5연대는 42년 1월 초에 방콕을 떠났다.
'1941년 및 그 이전 > 싱가포르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가포르 함락(17)-지트라 전투(1) (0) | 2018.03.25 |
---|---|
싱가포르 함락(16)-항공작전(41.12.9-12) (0) | 2018.03.24 |
싱가포르 함락(14)-제143연대의 상륙 (0) | 2018.03.23 |
싱가포르 함락(13)-싱고라상륙 (0) | 2018.03.23 |
싱가포르 함락(12)-크로함락 (0) | 2018.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