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트라 전투(2) - 철수
지트라 방어선에 대한 사에키 정진대의 공격은 1941년 12월 12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새벽 3시 30분에 일본군 선두가 도로 교차점을 지키던 제1레스터셔대대의 우익 중대를 공격하자 영국군은 야포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오전 5시에 수색제1중대가 제1레스터셔대대와 제2/9자츠대대 사이를 뚫고 들어와 영국군의 포병전방관측소를 점령했는데 그 직후 영국군 야포 사격으로 수색제1중대장을 비롯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진격이 좌절되었다. 그러자 사에키 중좌는 수색제2중대와 전차, 이어서 제41연대 제2대대까지 정진대의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교두보를 강화했다. 오전 9시에는 일본제5사단의 포병 1개 대대가 전선에 도착했다. 일본군 포병대대는 곧 대포병사격을 실시하여 영국군 야포를 침묵시켰다.
일본군이 제15여단의 방어선을 파고들자 임시로 제15여단을 지휘하던 제28여단장 카펜데일 준장은 다시 제6여단장 레이 준장에게 요청하여 제1/8펀자브대대의 본부중대와 2개 중대를 빌려 반격에 투입했다. 제1/8펀자브대대는 반격을 위하여 기동하다가 제2/9자츠대대본부를 일본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아군끼리 교전이 벌어졌다. 혼란을 수습한 제1/8펀자브대대는 오전 10시에 반격을 실시했으나 이미 늦었다. 반격을 결심했을 당시 일본군 1개 중대가 장악하고 있던 교두보에는 이제 전차를 포함하여 2개 대대 규모인 사에키 정진대의 대부분이 들어앉아 있었고 화력지원을 담당해야 할 영국군 야포는 일본군의 대포병사격으로 침묵한 상태였다. 결국 제1/8펀자브대대의 반격은 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
(지트라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8-209)
제11인도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아침에 제15여단을 사찰하러 갔다가 일본군이 이미 제15여단 방어선의 우익을 우회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들었다. 일본군이 제15여단을 포위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구룬으로 철수하겠다며 허가를 요청했다. 당시 싱가포르에 있던 히스 중장은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과 의논한 후 철수를 불허하고 지트라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12일 오전에 제15여단 방어선 중간에 교두보를 만들고 틀어박혀 있던 사에키 정진대는 영국군의 포격에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 포병대대가 도착하여 영국 야포를 침묵시키고 이어서 오전 10시에 실시된 제1/8펀자브 대대의 반격까지 물리치자 정진대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사에키 정진대는 12일 정오부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격을 시작하여 도로 동쪽을 지키던 제2/9자츠대대의 좌익 중대를 남동쪽으로 밀어냈다. 이어서 제1레스터셔대대의 우익을 공격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진대는 남쪽으로 빠져 오후 2시 30분에 바타 강 남안에 포진하고 있던 제2/2구르카소총대대와 총탄을 주고 받았다. 구르카대대의 눈앞에서 바타 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걸 깨달은 일본군은 방향을 꺾어 바타 강의 북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다. 레스터셔대대를 포위하려는 생각이었다. 위험을 깨달은 제6여단장 레이 준장의 긴급명령에 따라 제2이스트서레이 대대에서 브렌건캐리어 소대를 파견했다. 사에키 정진대는 오후 3시에 브렌건캐리어 소대의 날카로운 반격을 받고 약 1.6km 서쪽으로 진출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일본군이 레스터셔대대를 포위할까봐 걱정이 된 카펜데일 준장은 오후 3시 15분에 레스터셔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림바와 파당을 거쳐 바타 강 남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레스터서 대대장은 반발했다. 그때까지 대대의 사상자는 약 3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후방을 위협하던 일본군은 이스트서레이 대대에서 파견한 브렌건캐리어 소대에 막혀 멈추어 있었다. 무엇보다 대대가 철수해야 할 바타 강 남쪽, 제2/2구르카대대의 좌익은 그냥 논일 뿐 아무런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펜데일 준장의 강경한 명령에 따라 레스터셔대대는 오후 4시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6시에 완료했다. 새로 도착한 곳에는 전화선도 없어서 대대본부는 휘하 중대 및 여단사령부와 전령을 통하여 연락해야만 했다.
레스터셔대대의 철수에 맞추어 우익의 제2/9자츠대대도 철수명령을 받았다. 자츠대대도 오후 6시까지 바타 강 남쪽으로 철수했는데 우익 중대에는 철수 명령이 도달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대대본부는 우익 중대가 전멸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전선 시찰을 마치고 승게파타니 부근의 사령부로 돌아가던 제11인도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오후 6시에 바타 강 남쪽의 탄종 파우 부근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일본군 전차가 이미 바타 강을 건넜다는 것이었다. 6시 30분에 사령부에 돌아와 보니 더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터셔대대와 자츠대대가 철수 중 공격을 받아 전멸했으며 일본군은 바타 강 남쪽의 케루비에 주둔한 제2/16펀자브대대의 2개 중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서쪽 멀리에서는 아직까지 제11사단 관할이던 크로부대가 약 350명으로 줄어든 채 크로를 내주고 발링으로 통하는 도로를 방어 중이라는 소식도 들어왔다. 이 중 크로부대를 제외하고 모두 잘못된 보고였으나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철수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다시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철수허가를 요청했다. 히스 중장은 퍼시발 중장과 상의한 후 주저하면서 철수를 허락했다. 12일 오후 10시에 알로스타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자정부터 억수같이 퍼붓는 비 속에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철수는 무질서하게 실시되었으며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전령이 퍼붓는 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제1레스터셔대대의 2개 중대, 제2/9자츠대대의 1개 중대 그리고 제2/1구르카 소총대대 분견대가 철수 명령을 듣지 못했다. 이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삼삼오오 황급히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장비를 거의 다 잃었다. 철수 행렬로 도로가 막히자 일본군에게 따라잡힐 것을 두려워한 부대들이 도로를 벗어나 야지를 횡단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장비를 상실했다. 2개 중대는 해안으로 나아가 주정을 타고 남하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정 일부가 침몰했고 일부는 조류에 밀려 수마트라까지 떠내려 갔다. 야포와 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장비가 진흙에 빠진 채 버려졌다.
영국군의 철수를 알아차린 일본군은 추격하기 위하여 자정이 막 지난 13일 새벽에 바타 강의 다리로 접근하다가 후위를 맡은 제2/2구르카소총대대의 사격을 받고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일본군이 움찔하는 사이 구르카대대는 13일 오전 2시에 바타 강의 다리를 폭파하고 오전 4시 30분에 일본군과의 접촉을 끊고 남하했다. 이로써 지트라 방어선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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