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케란탄 철수

 

말레이 북서쪽 지트라에서 제11인도사단이 사에키 정진대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 말레이 북동쪽 케란탄 주에서는 제8인도보병여단이 다쿠미 지대에게 코타바루를 내주고 마창 남쪽에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11일 저녁에 제9인도보병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공군이 케란탄 주의 비행장들을 포기했으므로 제8여단도 케란탄 주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스 중장은 동의했지만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불허했다. 그러자 히스 중장은 발끈하여 케다 주의 부킷 메르타잠에 있는 군단 사령부를 떠나 열차를 타고 싱가포르로 갔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히스 중장은 12일 아침부터 퍼시발 중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히스 중장은 일본군의 주공이 서부해안을 따라 내려오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제8여단을 철수시켜 서부해안 방어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스 중장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퍼시발 중장은 마음이 바뀌어 제8여단에게 저장 물자를 최대한 이송하거나 파괴한 후 철도를 이용하여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북부 말레이)

 

다쿠미 지대는 12월 9일 오후에 코타바루 시가지를 점령한 후 3일간 진격을 멈추고 정비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은 탄약을 보충하고 사상자를 수용하며 장비를 수리하고 포로를 처리했다. 이때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대량의 군수품과 장비를 각 부대에 분배하여 전력이 충실해졌다.  점령 정책도 펴서 코타바루의 왕궁, 행정기관, 은행, 우체국 등을 장악하고 수도시설, 차량공장 등을 수리하며 식량을 징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포고령도 내고 선무 활동을 펴는 한편 일본에 적대적인 주민들을 소탕했다.

 

정비를 마친 다쿠미 지대는 12일 아침부터 보병제56연대 제3대대를 선두로 남하했다. 제3대대가 방어선에 접근하자 영국군 야포가 불을 뿜어 진격을 저지했다. 제3대대는 일단 멈추었다가 밤이 되자 진격을 재개하여 13일 새벽 1시 30분에 영국군이 포기한 타나메라 비행장에 진입했다. 제3대대는 13일 날이 밝자 마창 남쪽에 펼쳐진 영국제8여단의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돌파에 실패했다. 13일 오후가 되자 보병제56연대 주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56연대는 밤이 되면 공격할 계획었으나 직전에 영국군이 철수했다. 

 

퍼시발 중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제8여단은 신중하게 철수를 시작했다. 우선 보급품과 장비들을 수송하고 수송이 불가능한 보급품이나 장비는 파괴했다. 그동안 마창 방어선에 배치된 부대는 12일과 13일에 실시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13일 오후에 일본군이 증강되자 일몰 직후 철수한 후 마창 남쪽 사트 강의 다리를 파괴했다. 

제8여단의 철수는 조직적이었다. 강을 건널 때마다 다리를 파괴하고 강력한 후위부대를 두어 일본군이 마음놓고 쾌속으로 추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5일에 영국군 후위부대는 마창 남쪽 15km 지점의 고지에서 일본군에 총격을 퍼부어 진격을 저지했다. 16일 날이 밝은 후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영국군은 오후 1시에 후퇴했다. 영국군은 이런 방식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다쿠미 지대가 마창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쿠알라크라이까지 전진하는데 1주일이 걸렸다.

 

그동안 후방에서는 철수를 서둘렀다. 보급품 수송은 15일까지 끝났다. 병력의 철수는 일시적으로 제8여단에 배속되었던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가 서해안의 제12여단으로 돌아가면서 시작되었다. 병력들이 차례로 쿠알라크라이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 쿠알라리피스로 철수했으며 쿠알라크라이의 철도 종점은 19일에 폐쇄되었다. 마지막 부대가 쿠알라리피스의 새로운 진지에 배치된 것은 22일이었다. 이로써 영국군은 케란탄 주에서 물러났다. 제8여단은 철수 과정에서 많은 수의 차량, 기관총, 박격포 및 대전차총을 상실했으며 개전 이래 인명피해는 사상자 및 행방불명을 합쳐 533명이었다. 장비의 상실은 뼈아픈 일이었으나 병력 손실은 많지 않았으며 제8여단은 전투력을 갖춘 상태로 철수에 성공했다.

 

다쿠미 지대는 영국군의 반격에 유의하면서 신중하게 남하하여 18일 오후에 쿠알라크라이 북방 10km 지점에서 날 강을 건넜다. 이날 다쿠미 소장은 제25군사령부로부터 쿠알라크라이를 점령한 이후에는 남쪽으로 영국군을 추격하지 말고 방향을 바꾸어 동해안의 쿠안탄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일 오전에 일본기들이 쿠알라크라이를  공습했다. 정오경 일본군이 주민 몇 명을 발견하여 영국군에 대해 물어보자 대부분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군은 오후 5시 30분에 쿠알라크라이 북동쪽 1km 지점에 도달하여 시내로 정찰대를 보냈다. 정찰대는 영국군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일본군은 신중을 기하여 19일 밤을 그대로 지낸 다음 20일 날이 밝자 대오를 맞추어 쿠알라크라이 시내로 진입했다. 

 

영국군이 대부분의 물자를 이송하거나 파괴했지만 다쿠미 지대는 남아있던 약간의 식량과 피복을 노획했다. 또한 수백대의 자동차를 발견했는데 대부분 망가졌으나 일부는 사용이 가능했다. 다쿠미 지대는 부대를 정비한 후 18일자 명령에 따라 22일에 1개 중대를 수비대로 남겨두고 주력은 노획한 차량을 타고 쿠알라크라이를 떠나 쿠안탄으로 향했다.

 

한편 보병제56연대 제7중대는 코타바루 비행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12월 17일에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토렝가우 부근의 비행장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7중대는 노획한 차량을 타고 남쪽으로 달려 18일 오후에 저항을 받지 않고 토렝가우에 입성했다. 당시 토렝가우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억류되었는데 이때 해방되었다.

 

이로써 다쿠미 지대는 말레이 북동부의 케란탄 주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다쿠미 지대는 화포 27문, 기관총 73정, 비행기 7대, 철도화차 32대를 노획했다. 노획한 자동차는 512대에 달했으나 쿠알라크라이에서 노획한 자동차는 대부분 망가진 상태였으므로 사용가능한 숫자는 157대였다. 연료로 사용할 휘발유도 50톤을  노획했다. 병력 피해는 전사 320명, 부상 538명으로 영국군보다 많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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