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영령 보르네오(1) - 상륙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의 관할구역에는 영령 보르네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르네오는 원시의 섬이었다. 해안은 맹그로브와 늪으로 덮였고 섬 면적의 90% 는 빽빽한 정글로 섬 내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린란드, 뉴기니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큰 섬으로 면적이 75만 ㎢ 가 넘었으나 1941년 당시 인구는 300만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도시라고 부를만한 시가지는 10여곳에 불과했다. 도로망도 빈약하고 철도도 짧은 노선 하나뿐이라 섬 내부의 교통은 주로 수로나 정글 속의 오솔길에 의지했다.
보르네오 섬의 대부분은 네덜란드 령이었으며 영령 보르네오는 섬의 북쪽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다. 영령 보르네오는 2개의 주(영령북보르네오, 사라왁), 1개의 보호국(브루네이), 그리고 왕령식민지(Crown Colony)인 라부안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르네오의 가치는 석유에 있었다. 1940년에 영령 보르네오에서 106만톤,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에서 186만톤, 합계 292만톤이 산출되었는데 이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영령 보르네오를 합친 생산량 887만톤의 33% 에 해당했다. 보르네오에서 산출되는 석유만으로 평화시 일본의 석유 수요량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영령 보르네오에는 유전이 2개 있었다. 사라왁 주 북쪽에 미리 유전이 있었고 50km 북쪽으로 올라가면 브루네이의 세리아에 또다른 유전이 있었다. 채굴된 원유는 해안가에 위치한 루통의 정유공장에서 정제된 다음 파이프를 통하여 유조선에 실렸다.
(영령 보르네오. http://www.s-s-s.org.uk/sss.htm?sssintro.htm)
보르네오 섬은 남진하는 일본군이 말레이 및 수마트라, 셀레베스, 그리고 자바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보르네오를 지키면 말레이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은 말레이와 자바를 지키기에도 병력이 빠듯하여 보르네오 방어에 충분한 병력을 할애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말레이 침공군의 측면을 보호하고 향후 수마트라 및 서부 자바 침공을 지원하기 위하여 보르네오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주력은 제18사단 제35여단 제124연대였다. 여기에 보병제35여단사령부, 제2요코스카해군육전대, 제4해군설영대, 공병제12연대의 1개 소대, 사단통신대 및 의무대의 분견대, 제4야전병원 및 제11방역급수부의 분견대가 추가되었다. 보르네오 침공부대의 전투병력은 약 4,500명이었으며 지휘는 보병제35여단장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맡았다. 영령 보르네오에 대한 공격은 말레이 침공 8일 후에 시작되었다.
1941년 5월에 말레이 사령부는 영령 보르네오 방어를 위하여 찰스 레인 중령의 제2/15펀자브대대에 6인치 야포 1개 포대와 공병 1개 소대를 붙여 1,050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레인 중령은 이외에도 사라왁 주의 잡다한 현지 병력들을 지휘했는데 여기에는 무장경찰, 해안수비대 그리고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사라왁 레인저 등이 포함되어 1,515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인 중령의 지휘를 받는 펀자브 대대와 현지 병력을 합쳐 사라왁 부대(Sarawak Force = Sarfor)라고 불렀다.
사라왁 부대의 주임무는 일본군이 보르네오의 비행장을 사용하여 말레이 전투를 지원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따라서 방어의 중심은 사라왁 주의 주도로서 비행장을 가진 쿠칭이었다. 쿠칭은 해안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으며 해안으로 통하는 도로는 없었고 대신 사라왁 강과 산투봉 강을 통하여 연락선이 다녔다. 사라왁 강에서는 흘수가 4.8m, 산투봉 강에서는 흘수가 3.6m 인 선박까지 운항이 가능했다. 쿠칭에서 북서쪽으로 마탕, 그리고 남쪽으로 펜딩을 거쳐 65km 떨어진 세리안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비행장은 쿠칭 시가지에서 세리안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1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비행장에서 서쪽으로 도로가 뻗어 바투 키탕에서 사라왁 강과 만났다. 자동차 운반선으로 강을 건너면 도로는 네덜란드 국경에서 24km 떨어진 크로콩까지 연결되었다. 처음에 영국군은 쿠칭 북쪽에서 일본군을 저지할 생각이었으나 1941년 9월에 시가지는 포기하고 비행장만 방어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쿠칭 부근)
1941년 12월 8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말레이에 상륙하자 퍼시발 중장은 미리에 주둔 중이던 제2/15펀자브대대에게 미리 유전과 루통의 정유소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펀자브 대대는 유전과 정유소를 그날 안으로 폭파했으며 다음날에는 선착장도 폭파했다. 13일에 펀자브 대대는 유전 기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쿠칭으로 철수했다.
같은 날 보병제35여단장 가와구치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제35여단사령부와 제124연대가 10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타고 베트남의 캄란 만을 출발했다. 선단은 하시모토 신타로 소장이 승좌한 경순양함 유라와 제12구축대(무라구모, 시노노메, 시라구모, 우수구모)의 직접 호위를 받았으며 , 제7전대 사령관 구리다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2척(구마노, 스즈야)와 구축함 2척(후부키, 사기리)이 뒤따랐다. 제7호 구잠함과 수상기 모함 카미카와 마루도 동행했다.
일본선단은 발각되지 않고 남중국해를 건너 자정이 막 지난 15일 새벽에 미리 앞바다에 닻을 내렸고 1척은 세리아로 파견되었다. 거친 날씨 때문에 상륙이 힘들었지만 영국군의 저항이 없었으므로 해가 뜰 때까지는 상륙을 마치고 오전 중에 유전을, 오후에는 루통의 정유소를 점령했다.
일본군의 상륙 소식이 싱가포르의 극동항공사령부에 도달한 것은 16일 오후 9시가 되어서였다. 17일 날이 밝자 싱카왕2 비행장에서 네덜란드 정찰기가 떠서 일본군의 상륙을 확인했다. 보르네오 동해안의 타라칸에서 이수한 네덜란드 해군의 비행정과 쿠칭 남쪽의 싱카왕2 비행장에서 이륙한 네덜란드 공군의 B-10 폭격기가 17일 오후부터 19일까지 3일간 일본선단을 공습했다.
17일 오후에 타라칸을 이수한 네덜란드해군항공대 소속 도르니에 Do-24 비행정 3대가 역시 선단을 공습했는데 이중 1대가 구축함 시노노메에게 200kg 짜리 폭탄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일본구축함 시노노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Shinonome_(1927)
쿠칭의 영국군은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19일에 일본폭격기 15대가 쿠칭 시가지와 비행장을 공습했다. 실제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석유저장고가 직격을 받아 화염이 솟아오르자 놀란 주민들이 달아나 버렸다. 그 결과 방어진지를 건설할 노동력을 구할 수 없어서 방어태세에 차질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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