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영령 보르네오(2) - 함락


12월 22일에  일본군 보병제124연대 주력(2개 대대)은 수송선 6척에 타고 미리를 떠나 쿠칭으로 남하했으며 와타나베 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는 북상했다.


 

(영령 보르네오. http://www.s-s-s.org.uk/sss.htm?sssintro.htm)


일본군 주력을 태우고 남하하던 선단은 12월 23일 아침에 쿠칭에서 240km 떨어진 해상에서 네덜란드 정찰기에 발견되었다. 싱카왕2 비행장에서 네덜란드 공군의 B-10 폭격기들이 폭격 준비를 시작했다. 폭격기가 이륙하기 전인 오전 10시 40분에 일본기 24대가 싱카왕2 비행장을 공격하여 활주로에 구멍을 뚫었다. 일본군이 싱카왕2 비행장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공군은 폭격을 포기하고 비행기를 수마트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24일에 극동항공사령부가 동의함으로써 싱카왕2 비행장의 네덜란드기들은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일본선단은 23일 오후 6시에 산투봉 강어귀에 접근했으며 2시간 후에 사라왁 부대장 레인 중령은 싱가포르로부터 쿠칭 비행장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켜야 할 비행장이 사라지자 레인 중령은 네덜란드령 보르네오로 철수할 권한을 요청했다.

비행장에 주력을 모은 레인 중령이 철수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전방분견대가 18파운드 야포와  3인치 박격포로 산투봉 강의 수로를 방어했으며 사라왁 레인저와 해안의용대의 지원을 받은 펀자브 포정소대가 쿠칭 북쪽을 초계했다. 23일 밤에 퍼시발 중장은 쿠칭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킨 후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네덜란드 해군이 반격을 가했다. 23일 오후 10시 40분부터 네덜란드잠수함 K-14 함이 산투봉 강어귀에 정박한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카토리마루(9,848톤)와 히에마루(4,943톤)를 격침하고 호카이마루(8,416톤)와 니치란마루(6,503)톤에 피해를 입혔다.


(네덜란드 잠수함 K-14. 배수량 865톤(수상) 1,045톤(수중), 길이 74m, 폭 6.5m, 흘수 3.9m, 속력 17노트(수상) 9노트(수중), 항속거리 12노트로 19,000km(수상) 8.5노트로 48km(수중), 잠항심도 80m, 승조원 38명, 무장 21인치 어뢰발사관 전방 4문, 후방 2문, 외부발사관 2문, 어뢰 14발.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K_XIV)


일본선단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24일 오전 9시부터 20척의 주정을 내보내어 공격을 시작했다. 소규모의 펀자브 포정소대가 저항을 포기하고 철수하자 일본군 주정은 그대로 산투봉 강에 진입하여 쿠칭으로 향했다.

오전 11시에 전방분견대가 일본군과 교전했다. 분견대는 야포와  박격포로 주정 4척을 격침했지만 상륙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중과부적으로 전멸했다.

다시 주정을 타고 쿠칭으로 접근하던 일본군은 24일 이른 오후에 영국군의 포격으로 3척을 더 잃었다. 하지만 나머지 13척은 상륙에 성공했고 일본군은 오후 3시 30분까지 쿠칭 시가지를 점령했다. 잠시 숨을 고른 일본군은 해가 떨어지자 비행장을 향하여 남하하다가 영국군의 방어선에 부딪혀 진격을 멈추었다.


그동안 바다에서는 네덜란드 해군이 다시 전과를 올렸다. 24일 오후 4시에 네덜란드 잠수함 K-16 함이 쿠칭에서 북쪽으로 65km 떨어진 해상에서 병력을 상륙시키고 돌아가던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K-16 함은 일본구축함 사기리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며 사기리의 승조원 241명 중 1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리를 거두고 수라바야로 돌아가던 K-16 함은 다음날인 25일에 일본잠수함 I-66 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으며 승조원 36명은 모두 사망했다. 25일 저녁에는 싱가포르를 이륙한 블레넘 5대가 항속거리 한계까지 날아와 일본선단을 폭격했으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일본구축함 사기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Sagiri)


쿠칭에서는 레인 중령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부상자와 함께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의 싱카왕2 비행장으로 철수시켰다. 그동안 일본군은 1개 중대를 선착장이 있는 바투키탕으로 보내어 사라왁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오후가 되어 일본군의 의도를 깨달은 레인 중령이 철수 명령을 내리자 일본군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후위를 맡은 2개의 펀자브 중대에서 4명의 영국인 장교와 약 230명의 인도병사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단지 1개 소대만이 탈출하여 정글을 뚫고 100km 를 남하한 후 31일에 네덜라드령 보르네오의 싱카왕2 비행장에서 주력과 합류했다. 후위부대의 희생 덕분에 사라왁 부대 주력은 무사히 바투키탕에서 강을 건넜으나 그 과정에서 자동차를 대부분 잃었다.


(쿠칭 부근)


사라왁 부대 주력은 계속 남하하여 26일에 크로콩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없었으므로 남은 자동차를 모두 버렸다. 또한 레인 중령은 사라왁 주 방위대를 포함한 현지 병력들을 임무에서 해제하여 귀가를 허용함으로써 사라왁 부대는 해체되었다.

현지 병력을 털어내 버린 제2/15펀자브 대대는 27일 아침에 국경을 넘었으며 29일에 750명의 네덜란드 군이 지키던 싱카왕2 비행장에 도착했다. 제2/15펀자브대대는 이제 네덜란드 군 휘하로 들어가 싱카왕2 비행장  방어에 투입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제2/15펀자브대대에게 비행기로 보급을 해주려고 했으나 싱카왕2 비행장의 활주로 상태가 나빠 이착륙이 불가능했다.  결국 31일에  3대의 블레넘 폭격기를 동원하여 낙하산으로 400kg 의 보급품을 떨어뜨려 준 것이 모두였다.


한편 사라왁을 점령한 일본군은 3주 이상 점령지 정비에 주력하면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미리를 떠나 북으로 향한 와타나베 대대는 영령 보르네오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했다. 와타나베 대대는 1942년 1월 1일에 라부안을 점령하고 8일에 제셀톤을 점령했다. 1월 17일에는 와타나베 대대의 2개 중대가 영령북보르네오의 행정청이 있던 산다칸에 상륙하여 19일에 영령북보르네오 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와타나베 대대가 영령 보르네오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자 사라왁에 눌러 앉아 있던 일본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합군 정찰기가 1월 24일에 남하하는 일본군을 발견하자 네덜란드군 사령부는 싱카왕2 비행장의 연합군에게 철수 허가를 내주었다. 연합군은 우선 영령 브로네오에서 피난와 있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자동차에 태워 해안에 위치한 폰티아낙으로 철수시켰다. 이들은 다음날인 25일에 배편으로 폰티아낙을 탈출했으며 폰티아낙은 4일 후에 함락되었다.


1월 25일에 5개 중대의 일본군이 싱카왕2 비행장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마을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다음날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철수허가를 받아 둔 연합군은 보급품을 불태우고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연합군은 27일 저녁에 재차 일본군을 공격하여 움찔하게 만든 후에 철수를 시작했다. 일본군의 추격은 재빨라서 후위를 맡은 2개 펀자브 소대가 포위되었다. 인도군 장교가 이끄는 70명의 병사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싸워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간 3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후위 부대의 희생 덕분에 연합군 주력은 무사히 삼바스 강을 건너 싱카왕2 비행장에서 남서쪽으로 25km 떨어진 레도의 고지에 방어선을 폈다.


한편 일본군 3개 중대는 25일 저녁에 주정을 타고 쿠칭을 떠나 27일 아침에 싱카왕2 비행장 서쪽의 페망카트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저항을 받지 않고 해안을 장악한 다음 벵카장으로 진격하여 레도의 연합군을 포위하려고 했다. 연합군은 후위 전투를 통하여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27일에 응가방을 통과하여 31일에 낭가피오로 후퇴했다.


2월 4일에 제2/15펀자브대대는 네덜란드 군의 동의를 얻어 낭가피오에서 정글을 뚫고 보르네오 남해안까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대대는 동부 및 서부부대로 나뉘어 보르네오 남해안의 삼핏과 팡칼란보에오엔으로 향했다. 거기서 배편을 찾아 자바로 철수하려는 계획이었다.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어 지도조차 없는 정글을 통과하는 과정은 힘들었다. 병사들은 굶주림을 참아가며 정글 속의 소로를 따라 걷다가 강이 나오면 뗏목을 만들어 타고 건넜다. 열대의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내려쬐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병사들을 흠뻑 젖게 만들었다.


짧은 길을 택한 서부부대는 2월 24일에 팡칼란보에오엔에 도착하여  해안을 뒤졌으나 주정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를 통한 탈출은 불가능했으므로 서부부대는 그 지역의 비행장을 지키던 소규모의 네덜란드 수비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그들을 실어갈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동부부대는 3월 6일에 삼핏에 도착했는데 전날 일본군이 강어귀에 상륙하여 해안으로 나갈 수 없었다.


1942년 3월 8일에 자바의 네덜란드 군이 항복했다. 다음날 일본군은 방송을 통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모든 연합군 병사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만일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하면 무서운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3월 9일 아침부터 영국군은 앞으로의 행동을 논의했다. 일부 병사들은 보르네오 섬의 내륙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글을 통과해 온 지난  몇 주 간의 경험은 정글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제2/15펀자브대대는 미리에 파견된 이래 10주 동안 정글로 뒤덮인 험한 지형을 1,300km 이상 주파했다. 싱가포르에 있던 말레이 사령부는 3주 전에 이미 항복했으며 전날에는 자바의 네덜란드 군마저 항복했다. 제2/15펀자브대대에게는 더  이상 싸울 명분이 없었으며 그럴 기력도 없었다. 병사들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원화기는 기관총 몇 정이 모두였으며 탄약도 약간 밖에 없었다. 결국 3월 9일 오후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지형이 험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항복에도 시간이 걸렸다. 보르네오 섬에서 연합군 병사의 항복이 마무리된 것은 1942년 4월 1일이 되어서였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