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셀랑고르 방어선


서부 말레이에서는 캄파르에서 일본군 주력의 남진을 막고 있던 제11사단이 텔록안손 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 때문에 보급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캄파르를 포기하고 1942년 1월 4일까지 승카이-슬림강 지역으로 후퇴했다. 증원군을 실은 선단이 싱가포르에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에게 1월 14일까지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비행장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명령했다. 히스 중장은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 주력을 저지할 병력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쿠알라셀랑고르와 포트스웨튼햄에 일본군이 상륙할 경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히스 중장은 1942년 1월 1일에 보급로 사령부(Line of Communication Command)를 만들고 로버트 모이어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이어 준장은 셀랑고르에 일본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셀랑고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 268)


히스 중장은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 주력을 저지할 지점으로 탄종말림을 선택했다. 1월 4일 밤에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5여단(제3/16펀자브대대 제외)을 탄종말림에, 제3/16펀자브대대를 라왕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1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트롤락-슬림강 지역에 배치되어 도하점을 감시했다. 파리스 준장은 도하점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4일 이상 저지하기를 원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간선도로를 따라 제5사단을 남하시켰다. 선두는 전차 1개 대대의 지원을 받는 제42연대였다. 제11연대가 뒤를 따르다가 영국군이 쿠알라룸푸르 북쪽에서 패배하면 제42연대를 초월하여 전면에 나설 것이었다. 제41연대는 예비대였다. 서쪽에서는 제11연대제3대대와 근위제4연대가 육로와 해로로 남하하여 셀랑고르와 포트스웨튼햄를 점령한 다음 서쪽으로부터 쿠알라룸푸르를 공격할 것이었다.


1월 2일과 3일에 일본군이 셀랑고르에 상륙하려다가 영국군의 포격을 받고 실패했다. 그러자 히스 중장은 제15여단으로부터 자트/펀자브대대와 제1독립중대를 모이어 준장의 보급로 사령부에 증강했다. 이로써 보급로 사령부의 병력은 제3기병연대, 제3/17도그라스대대, 자트/펀잡대대, 제1독립중대, 로즈부대, 제88야포연대, 제73야포대, 제272대전차포대, 그리고 2개 의용대대, 1개 의용경포대 및 1개 의용장갑차중대가 되었다.

4일 아침에 쿠알라셀랑고르 북방 13km 지점에서 제3기병연대의 1개 중대와 자트/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가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하던 이치카와 지대(보병제11연대제3대대)와  만나 교전 끝에 후퇴했다. 이치카와 지대는 그날 저녁 셀랑고르 강 북안에 도달한 다음 동쪽으로 꺾어 19km 떨어진 바탕베르준타이에 있는 다리로 향했다. 이 다리는 라왕에서 불과 18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영국군은 다리를 지키던 제1독립중대에 로즈부대를 증원했다. 이치카와 지대는 5일 아침에 다리 북쪽에 도착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히스 중장은 탄종말림에 있던 제15여단을 라왕으로 불러들였다. 동시에 보급로 사령부는 해체되고 그 병력은 모두 제15여단장 무어헤드 중령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3/17도그라스대대에게 반격을 명했다. 도그라스대대는 5일 밤에 다리 북쪽의 도로교차점에서 이치카와 지대를 공격하여 쫓아내었다. 그러나 무어헤드 중령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6일 날이 밝자 도그라스대대를 다리를 건너 철수시킨 다음 다리를 끊었다. 이로써 해안 지역은 셀랑고르 강을 경계로 안정되었다.


말레이 사령부는 서해안에서 일본군의 상륙작전을 막아달라고 해군에 요청했다. 그러나 페락전대는 일본군의 반복적인 공습을 받아 사실상 전멸했기 떄문에 일본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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