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제45여단의 고난
1942년 1월 19일이 되자 바크리를 지키고 있던 제45인도보병여단의 운명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9일 아침에 일본군 2개 대대가 남쪽으로부터 바크리를 공격했다. 바크리 시가지를 노린 근위보병제4연대제2대대의 공격은 제2/19호주대대 B중대가 증원차 달려온 A 중대 2개 소대의 지원을 받아 막아내었다. 호주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140구였으며 호주군 인명피해는 전사 10명, 부상 15명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바크리 동쪽을 공격한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가 재수없게 도로 위에서 포착된 영국군 수송대를 전멸시키고 바크리 동쪽 5km 지점에서 용펭으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19일 오전 10시에 제45여단 사령부가 폭격을 받아 제65호주야포대장 줄리어스 소령과 여단의 통신병들이 죽었으며 여단참모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여단장 허버트 던칸 준장 또한 뇌진탕을 일으켰으므로 제2/19호주대대장 찰스 앤더슨 중령이 여단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바크리의 호주대대 배치도.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P.228)
부킷파시르를 출발한 제4/9자츠대대가 19일 오후2시에 바크리에 도착하여 제45여단에 합류했다. 자츠대대는 철수 도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대장 윌리엄스 중령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용펭 방면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바크리에 도착했을 때는 약 2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자츠대대가 도착하자 앤더슨 중령은 바크리 서쪽에 있던 제2/29대대도 바크리로 철수시켰다. 제2/29호주대대가 철수하자 근위보병제5연대제3대대가 따라붙어 공격했다. 그리하여 전날 이미 큰 피해를 입었던 제2/29대대는 대대장 올리프 소령이 전사하는 등 다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제2/29호주대대의 중대장이었던 마허 대위가 19일 밤부터 이제 약 200명으로 줄어든 제2/29호주대대를 지휘했으며 로스 중위는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줄리어스 소령을 이어 제65호주야포대를 지휘했다.
제2/29호주대대의 후퇴과정에서 많은 호주병사들이 길을 잃고 낙오되었는데 자츠대대의 낙오병들과 만나 숫자가 15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제2/29호주대대의 부관인 모간 대위의 인솔 하에 용펭으로 후퇴하다가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19일 오후에 근위보병제5연대제1대대가 부킷펠란독을 점령하면서 제45여단에 대한 보급이 끊겼다. 보급이 끊긴 상태로 바크리에 머무르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므로 제3군단은 19일 오후 8시에 제45여단에 탈출명령을 내렸다. 앤더슨 중령은 병력을 재편성했다. 2개 대대였던 호주군은 5개 중대(제2/19중대 3개, 제2/29중대 1개, 혼성중대 1개)를 가진 1개 대대로 개편했다. 3개 인도대대는 통합하여 3개 중대(자츠중대 2개, 라지푸트/갈월혼성중대)를 가진 1개 대대로 만들었다. 앤더슨 중령은 3개 호주중대(제2/19대대의 A 및 B중대, 혼성중대)를 전방에 세우고 1개 호주중대(제2/29중대)와 2개 자츠중대를 후위로 삼았다. 중앙에는 라지푸트/갈월중대와 포병, 수송대 및 지원부대가 위치했다. 제2/19대대 C중대는 예비대로서 차량에 타고 대열 중앙에서 이동하다가 상황에 따라 앞으로든 뒤로든 바로 달려갈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대전차포 2문은 대열의 앞뒤에 1문씩 배치했으며 대전차포를 잃어버린 병사들은 모두 소총수가 되었다. 이 진형으로 바크리 동쪽 5km 지점에서 도로를 막고 있던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의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했다.
제45여단은 20일 오전 7시에 바크리를 떠나 용펭으로 향했다. 선두에 선 제2/19호주대대 B중대는 제2/5근위대대의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뚫지 못했다. 그동안 뒤쪽에서는 바크리를 점령한 제3/5근위대대가 경전차를 앞세우고 추격해 왔다. 정오에 벌어진 전투에서 후위부대가 큰 희생을 치른 끝에 추격을 막았다. 이때 후위전투를 지휘하던 던칸 준장이 전사했다.
후방의 불을 일단 끈 제45여단은 오후에 가용한 모든 병력과 화력을 동원한 총공격을 펼쳤다. 박격포가 선두 보병에서 불과 몇 m 앞에 있던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고 25파운더 야포가 70m 거리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직접사격으로 파괴했다. 브렌건캐리어는 일본군 기관총좌에 5m 앞까지 밀고 들어가 기관총을 쏘았다. 보병들은 근거리에서 소총사격을 가한 다음 돌격하여 총검과 전투도끼로 백병전을 벌였다. 공격을 지휘한 앤더슨 중령도 수류탄으로 일본군 기관총좌 2개를 제거하고 권총으로 일본군 2명을 사살했다. 혼신을 다한 공격에 제2/5근위대대가 마침내 물러섰다.
포위망을 벗어난 제45여단이 수많은 부상병과 함께 21일 새벽2시경 파릿술롱에 접근했을 때 파릿술롱 시가지에서 3km 떨어진 심팡기리 강의 다리를 일본군(근위보병제4연대제3대대)이 이미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릿술롱은 제6노퍽대대의 2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18일에 식량이 떨어진데다가 19일 아침에는 대대본부와의 연락마저 끊겼다. 그러자 병사들은 파릿술롱을 떠나 바투파핫으로 철수해 버렸다. 따라서 제3/4근위대대는 아무런 저항없이 파릿술롱과 다리를 점령했다. 이제 제45여단은 다시 포위망에 갇혔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그동안 서부부대는 세가맛 강과 무아르 강의 다리를 폭파한 다음 철수하여 1월 21일에는 제22여단이 리비스 부근에, 제27호주여단이 용펭에 도착했으며 제8여단은 그 중간쯤에 있었다. 서부부대가 철수하자 퍼시벌 중장은 1월 21일 오전 8시 30분을 기하여 무아르-용펭 전선을 다시 서부부대 관할로 옮기고 오후 12시 30분에 용펭에서 부하 사령관들과 회의를 가졌다.
제53인도보병여단은 부킷펠란독 탈환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제11인도사단장 키 소장은 21일 오전 10시 30분에 제53여단사령부를 찾아 공격명령을 내렸으나 지휘권이 서부부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여단장 듀크 준장은 서부부대사령관 베넷 소장의 확인을 요구했다.
정오에 베넷 소장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듀크 준장은 로얄대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이 대대장 엘링턴 중령에게 도달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엘링턴 중령이 흩어져 있는 중대를 모으는데 시간이 걸려 공격시간은 오후 5시로 결정되었다. 퍼시발 중장과 회담 중에 제53여단의 공격이 오후 5시에 실시된다는 보고를 들은 베넷 소장은 참모를 보내어 오후 4시에 실시하라고 다그쳤으나 불가능했다. 로얄대대의 병력을 모으는 것도 문제였을 뿐 아니라 화력지원을 담당할 야포대와 조율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결국 공격시간은 오후 6시로 밀렸다가 다시 22일 새벽으로 연기되었다.
22일 새벽이 되자 야포대의 시사가 늦어져서 공격시간은 다시 오전 9시로 연기되었다. 그동안 집결하여 공격명령을 기다리던 로얄대대는 일본기로부터 심한 공습을 받았다. 기습이 불가능해지자 듀크 준장은 공격을 망설였다. 그는 제45여단이 반대쪽에서 동시에 협공하지 않는 이상 제53여단 단독으로는 부킷펠란독을 탈환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올렸다. 베넷 소장이 어쩔 수 없이 이 의견을 받아들임에 따라 제53여단은 공격을 포기했다.
용펭에서의 회의 결과 제말루앙-클루앙-아예르히탐-바투파핫을 잇는 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했다. 방어선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제말루앙에서 동해안 메르싱 지역의 코타팅기 도로에 이르는 구간은 동부부대가, 용펭-클루앙-아예르히탐에 이르는 간선도로 지역은 서부부대가, 그리고 바투파핫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은 제11사단이 지키기로 했다. 일단 부대들이 방어선의 지정된 위치에 도달하면 제3인도군단이 전체를 지휘할 것이었다.
파릿술롱 서쪽에서 포위당한 제45여단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제45여단은 21일 아침에 다리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잠시 후 추격해 온 제2/5근위대대가 뒤쪽에서 전차와 함께 공격했다. 제65호주야포대의 25파운더 야포 2문이 전차를 파괴하면서 공격을 일단 막았다. 그러나 제2/5근위대대는 하루종일 제45여단을 압박했다. 사단포병에서 파견나온 야포 1개 대대 및 제15유탄포대대의 1개 소대와 제3비행단 소속 항공기들이 제2/5근위대대를 지원했다. 그리하여 21일 저녁이 되자 제45여단은 다리 서쪽에서 사방 1km 정도의 좁은 포위망 안에 갇혔다.
21일 밤에 제45여단장 앤더슨 중령은 구급차 2대에 중상자를 가득 싣고 백기를 매단 채 다리 쪽으로 보냈으나 통과를 거부당했다. 일본군은 만일 항복하면 부상자는 돌보아 주겠다면서 여단 전체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앤더슨 중령은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뒤쪽에서는 제2/5근위대대가 전차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해왔으나 대전차포가 선두 전차를 파괴하자 물러났다. 제45여단의 식량은 이틀 전에 떨어졌으며 박격포탄과 25파운더 야포탄도 거의 바닥났다. 앤더슨 중령은 무전으로 벤넷 소장에게 식량과 의약품 투하를 요청했다.
22일 날이 밝자 싱가포르 셈바왕 기지에서 이륙한 알바코어 2대가 버팔로 3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날아와 저공비행으로 약간의 식량과 의약품을 투하했다. 제2/5근위대대가 아침에 전차와 함께 공격해왔으나 제45여단이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직후에 제45여단은 다시 다리 돌파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앤더슨 중령은 이제 외부의 지원이 없는 한 편제를 유지한 상태로 탈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22일 오전 9시에 베넷 소장이 앤더슨 중령에게 무전을 보내어 제45여단을 구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앤더슨 중령은 제45여단의 병사가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탈출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정글과 습지를 통하여 각자 탈출한 다음 용펭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45여단 병사들은 22일 오전 10시까지 모든 중장비와 중화기를 파괴한 다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본군의 눈을 피해 포위망을 빠져 나갔다. 이렇게 빠져나와 용펭에 도착한 호주군은 제2/19대대 271명(경상자 52명 포함), 제2/29대대 130명, 제65호주야포대 98명(경상자 24명 포함)으로 499명이었으며 인도군은 약 400명이었다.
제45여단은 바크리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했으며 5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45여단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용펭에 집결한 병력은 900명 남짓했다. 탈출 과정에서 여단장이었던 던칸 준장이 전사했으며 대대장 5명 중 앤더슨 중령을 제외한 4명도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유효한 전력으로서의 제45여단은 사라졌으나 그래도 제45여단이 처했던 절망적인 상황에 비추어보면 900명 가까이 탈출에 성공한 것도 기적이라고 보아야 했다. 일개 대대장 신분으로 얼떨결에 낯선 제45여단의 지휘를 맡아 남다른 용기와 훌륭한 지휘로 숱한 난관을 뚫고 900명 가까운 병력을 탈출시킨 앤더슨 중령은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다.
(빅토리아 십자훈장. https://en.wikipedia.org/wiki/Victoria_Cross)
제45여단이 탈출할 때 걸을 수 있는 경상자는 가급적 빠져나왔지만 걸을 수 없는 중상자는 남겨 놓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일부는 다친 동료를 돌보기 위하여 자진하여 남았다. 일본군은 이렇게 남겨진 병사들을 대부분 학살했다. 이 만행으로 호주군 약 110명과 인도군 약 40명이 희생되었으며 학살당한 동료 사이에 쓰러져 죽은 척 하다가 탈출한 몇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1942년 1월 17일부터 22일까지 근위사단이 잡은 포로는 398명이며 노획품은 야포 8문, 대전차포 9문, 기관총 10정, 경기관총 62정, 브렌건캐리어 19대, 자동차 180대이다. 같은 기간 근위사단의 손해는 전사 348명, 부상 253명으로 합계 60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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