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제22여단 소멸


1942년 1월 26일 오후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조호르 철수계획을 하달했다. 여기에 따라 동부부대는 28일 아침에 제말루앙을 떠나 30일에 조호르바루에 도착했다. 서해안의 제11사단은 동부부대가 철수할 때까지 스쿠다이의 도로교차점을 지켜야했다. 제11사단장 키 소장의 명령에 따라 제53여단은 28일 오후에 베눗을 떠나 스쿠다이 도로 22마일 이정표 지역을 지키다가 29일 밤에 싱가포르로 후퇴했다. 제28여단은 29일 저녁까지 폰티안케칠을 지키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스쿠다이 도로의 27마일 이정표 지점으로 후퇴하여 거기서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할 때까지 버텼다. 제15여단은 적에게 포위되어 해상철수했다.

 

(남부 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46)


중앙전선을 지키던 서부부대는 조호르에서의 마지막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1월 26일 현재 서부부대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제27호주여단(던칸 맥스웰 준장)은 간선도로를 지키고 있었다. 제2고든대대는 48마일 이정표 지역, 제2/26호주대대는 44.5마일 이정표 지역, 제2/30호주대대는 41마일 이정표 지역을 방어했다. 제2고든대대는 제2로얄대대를 대신하여 싱가포르로부터 제27호주여단에 파견되었다. 26일 오후에 일본보병제21연대가 제2고든대대를 공격했다. 탄약이 떨어진 제2고든대대는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의 허락을 받아 제2/26호주대대의 방어선을 지나 42.5마일이정표 지역으로 후퇴했다.


간선도로 동쪽의 철도를 따라서는 제9사단(아서 바스토우 소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바스토우 소장은 제8여단(윌리엄 레이 준장)을 사용강 정류소에, 제22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을 렝감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제8여단은 제1/13FF소총대대, 제2/10발루치대대, 그리고 제3/17도그라스대대의 1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2여단은  제5/11시크대대와 혼성대대(제2/12FFR대대 + 제2/18갈월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부부대 사령관 고든 베넷 소장은 1월 27일 새벽 0시 20분에 서부부대의 후퇴 순서와 시간표를 포함한 제4호 작전명령(Operational Instruction No.4)을 내렸다. 여기에 따르면 제27호주여단은 간선도로를 따라 후퇴하고 제9사단은 간선도로 동쪽의 철도를 따라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제9사단의 철수로인 철도 옆에는 도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지만 라양라양 남쪽에서 도로와 멀어져 남쪽 쿨라이에 가서야 간선도로와 만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브렌건캐리어, 자동차 그리고 차량으로 견인하는 야포와 대전차포 등은 27일 오후에 모두 렝감 남쪽에서 간선도로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간선도로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통신트럭도 빠져나감으로써 이제 제9사단의 통신망은 철도를 따라 설치된 유선전화만이 남았다. 제9사단의 후위를 맡은 제22여단은 일본군이 도로를 타고 간선도로 쪽으로 진출하여 제27호주여단의 우익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렝감 남쪽의 도로 교차점을 28일 오후 4시까지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27일 오후 4시 30분에 제22여단의 후위로서 렝감 남쪽을 지키던 제5/11시크대대가 일본보병제9여단의 공격을 받았다. 시크대대는 5km 쯤 남쪽으로 후퇴했고 오후 7시 30분까지 제22여단은 도로교차점을 중심으로 밀집하여 방어선을 편성했다.

 

(간선도로 철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36)


그동안 제22여단의 남쪽에서는 치명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8여단은 라양라양 남쪽의 다리를 굽어보는 고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27일 밤에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다리를 건넌 직후 28일 0시경에 철교와 도로교를 폭파해 버렸다. 이로써 제22여단은 보급로가 끊겼을 뿐 아니라 철교를 따라 가설된 전화선이 끊기면서 통신마저 두절되었다.

28일 아침이 되자 일본보병제9여단의 일부가 제22여단을 동쪽으로 우회하여 라양라양역과 남쪽의 고지를 점령했다. 포위될 위기를 느낀 제22여단은 28일 오후 4시까지 도로교차점을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라양라양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오전 10시 15분에 방어선을 떠나 남진했다.

남쪽 세데낙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28일 아침에 제22여단과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스토우 소장은 제22여단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단참모인 트롯 호주대령 및 AIF 연락장교인 모지스 호주소령과 함께 트롤리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트롤리. https://en.wikipedia.org/wiki/Rail_push_trolley)


트롤리를 타고 북상하던 바스토우 소장은 세데낙과 라양라양의 중간 지접에서 제8여단 사령부를 만났다. 그는 제8여단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라양라양을 떠남으로서 제22여단과 연결이 끊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제22여단이 큰 위험에 처했음을 깨달은 바스토우 소장은 제8여단장 레이 준장에게 1개 대대를 라양라양으로 파견하라고 명령한 다음 제22여단을 찾아 계속 북상했다. 다리에 도착해 보니 다리가 폭파되어 있었는데 철교는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아서 1명씩 조심스럽게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바스토우 소장, 트롯 대령, 그리고 모지스 소령이 철교를 건넜을 때 철교를 굽어보는 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이 총격을 가해왔다. 세 사람은 총알을 피하여 급히 강둑 뒤로 숨었는데 이때 바스토우 소장이 미끄러져 강에 빠졌다. 바스토우 소장의 시체는 나중에 일본군에 의하여 하류의 강둑에서 발견되었다.

트롯 대령과 모지스 소령은 강을 헤엄쳐 건넌 후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북상 중이던 제2/10발루치대대를 만났다. 트롯 대령의 설명을 들은 발루치 대대는 고지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후퇴해 버렸다.


(1942년 1월 28일 오전 7시 현재 나마지에 농장 전투 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275)


그동안 간선도로와 나마지에 농장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의 제2고든대대와 제2/26호주대대는 28일 하루 동안 일본보병제21여단의 거듭되는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후 1시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방어선을 동쪽으로 우회하여 제27호주여단의 남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예비대인 프레드릭 갈레간 중령의 제2/30호주대대가 백병전을 불사하는 처절한 전투 끝에 막아내었다. 포위될 위험을 깨달은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은 28일 해가 지면 31마일 이정표 지역까지 철수하겠다며 서부부대에 승인을 요청했다.

서부부대장 베넷 소장은 제27호주여단의 철수를 승인하면서 제9사단도 28일 밤에 세데낙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베넷 소장은 바스토우 소장의 실종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제22여단의 상태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8여단장 레이 준장은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제22여단 문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제22여단을 구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철수했다.


남쪽으로 진격한 제22여단은 28일 정오에 약 5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라양라양 역을 탈환했다. 제22여단장 페인터 준장은 그때서야 제8여단이 이미 철수해 버렸으며 다리는 끊어져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을 앞에 두고 적에게 포위된 페인터 준장은 탈출하기 위하여 정글로 들어갔다.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제22여단은 길도 없는 정글 속을 헤매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페인터 준장은 2월 1일에 5백명의 부하들과 함께 총탄이 떨어진 상태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 제5/11시크대대의 병력 약 60명과 제2/12FFR대대의 장교 몇 명만이 싱가포르까지 후퇴했다. 이로써 제22여단은 사라졌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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