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싱가포르 섬 방어(2) - 지상군의 상황


1942년 1월 31일에 싱가포르 섬으로의 철수가 완료되면서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이 섬의 모든 병력에 대해 작전지휘권을 장악했다. 수비대의 총 병력은 약 85,000 명이었으나 약 15,000 명은 기지 요원이나 행정 요원을 비롯한 비전투 병력이었다.

보병은 영국대대 13개, 호주대대 6개, 인도대대 17개, 말레이대대 2개로서 4.3개 사단에 해당했다. 여기에 더하여 기관총대대 3개(영국대대 2개, 호주대대 1개), 정찰대대 1개, 해협식민지의용대대 3개, 그리고 비행장 방어를 위하여 모집한 인도의용대대 4개가 있었다.


수비대는 서류상으로 강력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영국군의 경우 제18사단(제54 및 제55여단) 소속의 6개 대대는 얼마 전에 도착했으며 나머지 7개 대대는 병력이 심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영국기관총대대와 정찰대대는 2월 5일에야 도착했다.

호주군의 경우 충분히 훈련받은 병사로 완편된 부대는 제2/4기관총대대 뿐이었으며 나머지 부대는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제2/19대대는 370명, 제2/29대대는 무려 500명의 보충병을 받아들여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영연방군 보병대대의 정원은 786명이다.) 벤넷 소장은 보충병을 사용하여 6개 호주대대의 중대마다 1개 소대씩 증설하고 호주군 행정병을 비롯한 지원병력 440명으로 특별예비대대를 편성했다.

인도군의 경우 제2/17도그라스대대와 제44여단의 3개 대대가 완편상태였으나 제44여단은 훈련을 마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 도착한 상태였다. 말레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급히 재편성한 9개 대대는 신병의 비율이 높고 장교가 크게 부족했으며 4개 대대는 재편성 중이었다.

2개 말레이대대의 전투력은 의심스러웠으며 3개 해협식민지의용대대는 고정방어전 이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말레이반도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무기를 잃어 무기가 모자랐다. 개전 이래 패전과 후퇴를 거듭한 병사들의 사기는 낮았으며 싱가포르 섬의 항공기와 해군기지가 철수한 것을 알고나서 더욱 떨어졌다.

해군성은 1942년 1월 21일에 말레이 해군사령관 어니스트 스푸너 소장에게 해군병력 및 해군공창 기술자들의 철수계획을 작성하라고 비밀리에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스푸너 소장은 1월 28일에 해군기지를 폐쇄하고 해군병력과 기술자들을 싱가포르 시내로 빼돌린 후 1월 31일에  배에 태워 실론으로 보냈다. 스푸너 소장은 해군기지 폐쇄 사실을 퍼시발 중장에게까지 비밀에 부쳐 퍼시발 중장은 2월 초가 되어서야 철수 사실을 알았다.


싱가포르 섬을 방어하는 데는 두가지 방식이 있었다. 첫번째는 해안방어에 중점을 두어 일본군의 상륙을 거부하고 만일 상륙을 허용할 경우 최대한 빠른 시간에 반격을 가해 바다로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두번째는 주력을 내륙에 두고 해안에는 가벼운 방어선만 유지하다가 일본군이 상륙하면 주력을 투입하여 내륙에서의 대규모 전투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일단 일본군이 상륙하면 사기가 추락하여 이어질 대규모 회전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기 때문에 첫번째 방식을 채택했다. 문제는 싱가포르의 해안선이 울창한 맹그로브로 덮이고 곳곳에 작은 강들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서 연속된 방어선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퍼시발 중장이 일본군이 상륙할 확률이 큰 북해안 뿐 아니라 모든 해안선을 지키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정적인 장소에 병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해안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결정하면서 퍼시발 중장은 일선사령관에게 지휘 권한을 넘기고 자신은 전투가 벌어진 지역에 추가로 병력을 지원하는데 주력하면서 직접 명령을 내리는 일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퍼시발 중장은 1월 24일에 웨이벌 대장에게 보고한 대로 싱가포르 섬을 북부, 서부 및 남부의 3개 지구로 나누고 섬 중앙에는 자신이 직접 통제하는 예비 지구를 설정했다.

북부 지구는 창이 곶에서 둑길에 이르는 북동해안을 포함했으며 제18영국사단과 제11인도사단으로 이루어진 제3군단이 담당했다. 제9사단은 제22여단을 잃고 제8여단만 남아 전력이 감편된 1개 여단 규모로 감소했다. 따라서 제9사단은 해체되었으며 제8여단은 제11사단에 흡수되었다. 북부 지구의 화력 지원은 야포 5개 연대와 3개 포대, 대전차포 1개 연대가 담당했다.

남부 지구는 창이 곶에서 주롱 강에 이르는 남해안을 포함했으며 요새사령부가 담당했다. 요새사령부는 제1 및 제2말레이대대와 해협식민지의용보병여단을 지휘했으며 화력 지원은 야포 1개 연대와 대전차포 1개 포대가 담당했다.

서부 지구는 주롱 강에서 둑길에 이르는 북서해안을 포함했으며 제8호주사단과 제44인도보병여단을 지휘하는 벤넷 소장이 담당했다. 화력 지원은 야포 3개 연대와 대전차포 3개 포대가 담당했다.

섬 중앙의 예비 지구를 담당한 말레이 사령부는 제12인도보병여단(파리스 준장)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다. 제12여단은 2개 대대로 이루어져 약 900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1942년 초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싱가포르 섬 주변의 작은 섬들에는 소규모의 수비대만 주둔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중국인으로부터 자원을 받아 2,000 명 규모의 달포스(Dalforce)를 만들었다. 중국인 자원자들이 영국인 장교의 지휘를 받는 달포스는 훈련과 무장이 부족했다. 이들은 지구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맹그로브 지대의 정찰을 담당했다.

행정요원 중 무장한 병력들은 자신의 기지를 지켰다. 행정요원이 15,000 명이나 되었으나 이를 기반으로 방대한 예비병력을 만들려는 시도는 일본군이 상륙한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싱가포르 섬에는 간첩들이 득실거렸다. 2월 4일에 북해안에서 1.6km 내의 민간인들을 소개시켰으나 간첩의 활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주군통합병원은 일본군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어느날 오후 포격을 받았다. 깜짝 놀란 호주군이 통합병원을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이동시켜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날 밤에 통합병원이 있던 건물이 일본군의 집중포격을 받아 크게 부서졌다.


싱가포르 섬의 민간인 노동력이 부족하여 병사들이 방어진지를 건설해야 했다. 해안가에는 참호를 파기가 어려워서 대부분 흉벽을 쌓고 철조망과 대전차 지뢰로 보강했다. 몇몇 진지와 포좌는 사주방어 태세를 갖추었다.이런 방어시설은 공습을 피하여 밤에 만들어야 했다. 전방에는 10일치 탄약과 보급품을 비축했다.


해군기지를 필두로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작전이 실시되었다. 해군기지 폐쇄사실을 알게된 말레이 사령부는 우선 해군기지에 남아있던 보급품을 반출했는데 트럭 120대가 20번씩 왕복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 이어서 제11사단 공병대가 뒤에 남은 해군파괴반과 함께 파괴작전을 실시했다. 커다란 부유선거는 사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해협에 침몰시켰다. 작은 부유선거와 항행이 가능한 함정들은 모두 케펠항으로 옮기고 그렇지 못한 경우 파괴했다. 해협의 양쪽에 걸쳐 주정들을 모아 파괴했으나 주정 주인들이 숨기는 바람에 많은 주정이 파괴를 면했다.나중에 일본군이 이 주정들을 찾아내어 상륙에 사용했다. 전함을 수용할 수 있는 건선거의 펌프와 갑문도 파괴했다. 제11사단 공병대는 해군파괴반의 지원을 받아 최대한 노력했으나 드넓은 해군기지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더군다나 2월 3일부터 일본군이 해군기지를 포격함에 따라 파괴작업은 밤에만 실시해야 했다.


싱가포르 섬의 다른 육군기지들도 말레이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파괴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박용 중유와 항공유는 말레이해군사령관과 극동공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폐기했다. 일본군은 상륙작전시 영국군이 항공유를 해협에 흘리고 불을 지를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막대한 양의 항공유를 헛되이 강에 버렸을 뿐 그런 사용법을 고려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섬 최대의 탄약창은 부킷티마 부근에 있었는데 이걸 파괴할 경우 주변에 밀집한 병원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하여 퍼시발 중장은 파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대량의 탄약이 일본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반드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외에 크란지, 니순 및 셀레타에도 탄약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상륙하면 일찍 상실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탄약을 반출해야 했으나 노동력이 부족한 데다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야간에만 반출이 가능하여 일본군이 상륙할 때까지 일부만 옮길 수 있었다. 따라서 전투 초기에 야포탄 대부분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민방위사령관은 민간시설의 파괴를 책임졌다. 여기에는 부두, 발전소, 기계, 기관차, 보관 중인 고무 및 주석, 그리고 창고나 호텔에 저장된 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품목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물품의 소유자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들의 저항이 예상되어 민간 부문의 파괴 계획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상하수도, 가스, 전기같은 기반시설은 파괴대상에서 제외했다.


비밀유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섬의 주민들은 파괴계획을 눈치챘다. 이는 항공기 철수와 맞물려서 광범위한 공황상태를 몰고 왔다. 영국이 싱가포르 방어를 포기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특히 중국인 공동체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퍼시발 중장은 공황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신문에 싱가포르를 끝까지 방어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공황상태가 진정되지 않자 그는 2월 5일 오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오후에는 주민 대표들을 만나 싱가포르를 끝까지 방어할 것을 약속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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