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상륙(1) - 제2/20호주대대 구역
1942년 2월 8일 오전부터 일본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일본기들은 제22호주여단의 방어선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벤넷 소장의 서부지구 사령부도 폭탄 1발을 맞아 1명이 죽었다.
제25군 포병대는 8일 오전 9시부터 일본기의 탄착수정을 받아가며 만다이 산의 영국군 관측소와 텡가 비행장을 포격하고 영국군 포병에 대하여 대포병전을 실시했다. 정오부터는 사단포병이 포격을 시작하여 주로 해안의 방어진지와 철조망, 지휘소, 그리고 보급로를 집중적으로 때렸다. 그 결과 저녁이 되자 전방으로 통하는 전화선이 모두 끊겼다. 제22여단의 무전기는 점검 및 수리를 위하여 모두 싱가포르로 가져갔다가 8일 오전에 여단사령부에 도달했고 오후에 겨우 대대본부까지 도달했다. 따라서 무전기들은 상륙 초기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8일 저녁이 되자 포격이 더욱 거세져 제2/18호주대대 D 중대 지역에는 1분 만에 80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제22여단의 전방 대대는 대대장부터 참모들을 포함하여 전원 개인호를 파서 엄폐하고 있었으므로 포격의 격렬함에 비하여 인명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포격 때문에 통신병들이 끊어진 전화선을 연결할 수 없었다.
말레이사령부와 서부지구사령부는 이날의 포격이 임박한 상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포격이 며칠에 걸쳐 방어선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보았으며 다음날에는 포격이 둑길과 북동해안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국군 포병이 제22호주여단 및 제44인도여단의 대안에 자리잡은 일본군에게 실시한 대응 포격은 산발적이고 규모가 작아서 일본군의 승선을 방해할 수 없었다.
8일 오후 10시에 일본군 공격제1파가 출발했다. 잠시 후 호주군이 접근하는 일본군 주정을 발견했으며 이어서 탄종불로에서 탄종무라이에 이르는 해안지역이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조호르 해안과 사림분섬에 배치한 박격포, 그리고 야포로 공격을 지원했다.
(싱가포르 섬 상륙.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84)
해안에 배치된 제5탐조등 연대는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으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없는 한 절대로 탐조등을 켜지 말라는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테일러 준장은 섣불리 탐조등을 켰다가 위치가 발각되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탐조등이 파괴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화선이 끊어지면서 막상 일본군이 상륙했을 때 탐조등을 켜라는 명령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정적 순간에 탐조등이 눈을 감는 바람에 주정을 타고 취약한 상태로 해안에 접근하던 일본군이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방어선의 포격 요구는 베리식 신호조명탄으로 전달하게 되어 있었는데 막상 신호탄이 올랐을 때에는 지형 때문에 포대에서 보지 못했다. 해안에서 계속 신호탄이 오르는데도 야포가 침묵을 지키자 대대본부에 파견된 포병연락장교가 포대로 달려가 포격 요청을 전달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야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포대의 위치가 나빠 화력지원은 주로 제2/20호주대대 정면에만 이루어졌다. 제2/18 및 제2/19호주대대는 야포의 화력 지원없이 일본군과 맞서야했다.
호주군의 기관총은 위력을 발휘했다. 탐조등 불빛이 없었으므로 기관총은 접근하는 주정의 모터 소리를 향해 사격했다. 탐조등 없이도 호주군은 상륙하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만일 탐조등이 제때 밝혀지고 야포의 화력지원이 적절히 이루어졌다면 일본군의 피해는 훨씬 컸을 것이다.
살아남은 일본군 주정들은 기관총좌 사이의 빈틈을 찾아 필사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보통 2-3번의 시도 끝에 상륙했다. 일단 상륙한 일본군은 다시 전투의 주도권을 쥐었다. 일본군은 방어선의 빈틈을 통하여 내륙으로 진출한 다음 고립된 호주군 방어진지를 포위공격했다. 호주군은 백병전까지 불사하며 저항했으나 곧 진압되거나 아니면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
8일 오후 11시 30분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서부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사령관 벤넷 소장에게 자신의 여단이 6개 대대에 달하는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날이 밝는 즉시 반격을 가할 필요가 있으나 자신에게는 예비대가 없다고 말했다. 벤넷 소장은 자정이 막 지난 9일 새벽에 폰드 중령의 제2/29호주대대를 제22호주여단에 배속하고 텡가 비행장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제2/20야포연대는 조호르 해안의 스쿠다이 강 하구를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벤넷 소장은 또한 말레이 사령부에 날이 밝는대로 모든 항공기를 동원하여 일본군 상륙지점을 공습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전 4시 45분에는 특별예비대대와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예비중대가 역시 제22호주여단에 배속되어 텡가 비행장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싱가포르 섬에 상륙한 제25군의 우익은 제18사단, 좌익은 제5사단이었다. 제5사단의 우익은 스기우라 부대(보병제21여단), 좌익은 가와무라 부대(보병제9여단)가 맡았으며 보병제41연대는 사단예비대였다. 스기우라 부대는 페르팟강과 무라유강 사이에서 발진하여 해협을 건넜다. 가와무라 부대의 제1회 상륙부대는 스쿠다이강 상류 약 4km 지점에서 승선하여 강을 따라 내려온 다음 해협을 건너 림추캉 도로 종단에 있는 불로강 유역에 상륙하고 제2회 상륙부대는 무라유강과 당가강 사이에서 승선하여 해협을 건넜다.
가와무라 부대의 제1파는 보병제11연대제3대대, 제2파는 제1대대였으며 제2대대는 여단예비대였다. 제1파인 제3대대는 스쿠다이 강 상류 약 4km 지점에서 소발동정에 승선하여 스쿠다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도중에 발동정들이 흩어졌으나 대형을 정비할 시간이 없었다. 제3대대를 실은 발동정들은 흩어진 상태로 스쿠다이 강을 나와 불로강 유역을 목표로 해협을 가로질렀다. 소발동정들이 스쿠다이강 하구를 벗어나자 대안의 호주군 기관총이 사격을 시작했다.
보병제11연대제3대대가 상륙한 불로강 유역은 제2/20호주대대 D 중대(리처드슨 대위)가 방어하고 있었다. D 중대에 배속된 제2/4기관총대대 소속의 기관총 1정이 림추캉 도로의 끝자락에 접근하던 일본군 주정에 사격을 가하자 불이 붙었다. 그러자 주변의 주정이 발각되었고 집중 사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더많은 주정들이 해안의 늪지대에 도달했다. D 중대의 기관총 사격으로 많은 주정이 피해를 입고 일부가 침몰했으나 다른 구역과 마찬가지로 D중대의 전력으로는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제1파인 보병제11연대제3대대가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스쿠다이강과 무라유강 사이에서 대기하던 제2파인 제1대대가 해협을 건너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제3대대가 확보한 해안에 상륙했다.
제2파의 상륙으로 숫자가 크게 늘어난 보병제11연대는 제2/20호주대대D중대의 우익을 압박했다. 이곳을 담당한 호주군 기관총은 연속적인 사격으로 냉각수가 끓어올랐다. 철조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이 철조망에 걸려 멈칫거리는 사이 기관총이 불을 뿜어 진격을 막았다. 일본군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실은 문교를 해안에서 90m 정도 떨어진 곳에 박아놓은 그물고정용 말뚝에 묶어놓고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호주군 기관총좌를 공격했다. 9일 오전 1시 30분이 되자 호주군 기관총의 총탄이 떨어졌다. 각 기관총은 이때까지 약 10,000발씩 발사했다. 소대장 웬키 소위는 기관총을 파괴한 다음 부상자를 이끌고 중대본부로 후퇴했다. 웬키 소위는 25명을 태운 일본군 주정이 20척 이상 접안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로써 가와무라 부대는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 과정에서의 일본군 사상자는 60명 정도였다.
중대방어선으로 물러선 D 중대는 9일 오전 5시 30분까지 브렌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때로는 총검으로 백병전을 벌이면서 방어선을 지켰다. 이후 제2/20호주대대장 애쉬톤 중령의 명령에 따라 아마켕 마을 북쪽 3.2km 지점의 나마지에 농장에 설정된 대대방어선으로 철수하려 했으나 이미 퇴로가 막힌 상태였다. D 중대는 어쩔 수 없이 방어에 유리한 언덕에 눌러앉아 사방에서 공격하는 일본군과 맞섰다.
D중대의 우익을 지키던 메렛 소령의 A중대도 대대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대의 우익에서 림추캉 도로의 종점을 지키던 공병 및 군악대로 이루어진 혼성소대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후퇴했다.
D중대의 좌익을 지키던 카터 대위의 C중대는 일본군의 사전포격과 사림분섬에서 쏘아대는 박격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C중대 구역을 공격한 일본군은 스기우라 부대로 대안에서 쏘아대는 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했다. 상륙에 성공한 보병제42연대제2대대 및 제3대대는 C중대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제2/18호주대대와의 경계선인 사림분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격했고 이어서 예비대인 제1대대도 상륙했다.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 처한 C중대는 명령에 따라 대대방어선으로 후퇴했다.
9일 오전 2시가 되었을 때 제2/20호주대대의 방어선에는 본부중대(코헨 소령), B중대(에와트 대위), C중대, 그리고 대대수송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 후 달포스의 2개 소대가 도착했으며 오전 7시에 A중대가 도착했다. D중대는 적에게 둘러싸여 도착하지 못했다.
보병제11연대는 경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밤새 제2/20호주대대의 방어선을 거세게 공격했다. 제2/20대대는 3인치 박격포의 화력 지원을 받아가며 아침이 될 때까지 수류탄을 던지고 백병전까지 불사하면서 버텼다.
이로써 제5사단은 상륙에 성공했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은 9일 오전 4시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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