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상륙(2) - 제2/18호주대대 구역


제22호주여단의 중앙을 지키던 제2/18호주대대의 우익은 A 중대(존스턴 대위), 좌익은 C 중대(오케이 대위)가 지키고 있었다. 제2/18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18사단의 좌익대였다.


제18사단의 좌익대는 보병제114연대제2대대와 보병제114연대제1대대, 우익대는 보병제56연대제1대대와 제55연대제1대대였다. 좌익대에서 보병제114연대제2대대가 우제1선을, 보병제114연대제1대대가 좌제1선을 맡았다.


제2/18호주대대의 A중대는 제7 및 제8소대를 전방의 두 언덕에 1개 소대씩 배치했다. 이 언덕은 밀물이 되면 섬으로 변했는데 일본군이 상륙할 당시에는 밀물이었다.

A중대를 공격한 것은 제18사단 좌익대의 좌제1선으로 상륙한 보병제114연대제1대대였다. 상륙이 시작되자 제8소대(버넌 중위)가 지키던 섬에 2척의 주정이 접안하여 약 80명의 일본군을 상륙시켰다. 제8소대가 사격을 퍼붓자 일본군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흩어졌다. 그러나 곧 더 많은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반격을 받은 제8소대도 크게 약화되었다. 소대장 버넌 중위는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썰물이 되지 않아 바다를 건너야 했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부상자가 문제였으며 수영을 못하는 병사도 있었다. 버넌 중위는 기지를 발휘하여 소총 멜빵끈을 풀어 여러 개를 연결했다. 이걸 섬의 나무에 묶고 헤엄 잘치는 병사가 반대끝을 잡고 헤엄쳐 건너가 육지 쪽의 나무에 묶었다. 그리하여 부상자들과 수영을 못하는 병사들은 이 멜빵끈을 잡고 육지로 나올 수 있었다. 

제7소대가 지키던 섬에는 일본군이 상륙하지 않았다. 제7소대는 아침까지 섬을 지키다가 날이 밝자 철수하려 했으나 사방이 일본군 천지였다. 결국 제7소대원들 중 소수만이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그동안 A 중대본부에서는 전방 소대와 연락이 끊어진 데다가 최소한 2개 중대가 넘는 일본군이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9일 오전 3시 30분에 A 중대장 존스턴 대위는 중대방어선 편성을 포기하고 급조한 예비소대와 함께 아마켕 북쪽에 있던 대대본부로 철수했다. A 중대에서 장교 3명을 포함한 43명만이 대대방어선에 도달했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제2/18호주대대의 좌익을 지키던 C 중대 구역에는 제18사단 좌익대의 우제1선을 맡은 보병제114연대제2대대가 상륙했다.

C 중대 방어선의 좌익인 무라이 강 하구 북쪽의 조그만 반도에는 2개 기관총반으로 이루어진 제2/4기관총대대의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기관총 소대는 접근하는 일본군 주정 6척을 향하여 사격을 시작한 이후 2시간 동안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일본군이 속속 상륙하면서 반도 밑둥이 차단되었다. 이어서 일본군의 수류탄이 날아들고 총탄마저 떨어지자 소대장 미클존 중위는 1개 기관총반을 이끌고 탈출했다. 탈출 도중 나무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던 일본군 2명과 맞닥뜨리자 미클존 중위가 1명을 리벌버로 사살했고 나머지 1명은 다른 병사가 삼각대를 휘둘러 쓰러뜨렸다. 미클존 중위는 기관총반의 탈출을 엄호하다가 전사했다.

다른 기관총반은 탈출 도중 일본군에게 포위당했다. 일본군 장교 1명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스팩맨 이병이 총검으로 쓰러뜨린 후 일본도를 집어들고 다른 일본군을 공격했다. 스팩맨 이병을 포함한 기관총반은 대부분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전사자 없이 전원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제2/18호주대대장 발리 중령은 9일 오전 1시 30분에 전방 중대들을 아마켕 마을 부근의 대대방어선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심하고 테일러 준장의 허가를 받았다. 테일러 준장은 또한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제2/10공병중대(로렌스 소령)을 제2/18호주대대에 배속시켜 주었다. 발리 중령은 B 중대장 오브라이언 소령에게 C 중대의 퇴로를 확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B 중대는 전장으로 달려가던 도중 우세한 세력을 가진 일본군과 만났다. 치열한 전투 끝에 B 중대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중에 일부만이 대대방어선으로 돌아왔다. 


B 중대가 퇴로를 확보하는데 실패함에 따라 C 중대는 그야말로 일본군의 바다를 헤치고 대대본부로 철수를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쉴새없이 전투를 치르며 후퇴하던 C 중대는 결국 대부분의 전력을 잃고 장교 4명을 포함한 45명만이 대대방어선에 도달했다.

 

발리 중령은 9일 오전 3시 30분에 대대방어선을 편성했다. 45명으로 이루어진 C 중대는 43명으로 이루어진 A 중대와 함께 림추캉 도로 서쪽의  언덕을 지켰다. 장교 5명을 포함하여 136명으로 이루어진 치점 대위의 D 중대는 아마켕 마을의 북쪽을 지켰다.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제2/10공병중대는 A 및 C 중대의 남쪽을 지켰다.


제18사단 입장에서도 좌익대의 상륙은 혼란스러운 격전이었다. 실제로 제3회 주정을 타고 좌익대 구역에 상륙한 제18사단장 무다구치 렌야 중장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제18사단사령부는 내륙으로 진입하다가 철수 중이던 호주군 소부대와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호주군이 던진 수류탄 1발이 사령부 요원 한가운데 떨어졌다. 이 수류탄의 폭발로 사령부의 장교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무다구치 중장도 파편이 가슴을 스치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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