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근위사단 상륙


둑길 지역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맥스웰 준장)은 9일 새벽에 인접한 제22호주여단 구역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2/29호주대대를 서부지구사령부에 빼앗겨 2개 대대만 가지고 있던 맥스웰 준장은 일본군이 서쪽으로부터 여단을 공격할까봐 두려워했으나 공격은 없었다.

맥스웰 준장은 9일 오후 1시 30분에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과 제2/30호주대대장 갈레간 중령을 여단사령부로 불러 회의를 가졌다. (옥스 소령은 원래 제2/29호주대대의 부대대장이었으나 제2/26호주대대장 보이스 중령이 싱가포르로 가서 행정병을 모아 만든 X대대의 지휘를 맡게 됨에 따라 중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제2/26호주대대장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2개 대대는 크란지 강과 둑길 사이의 해안방어선을 떠나 남쪽의 제12인도여단과 연결하여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방어선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제2/30호주대대는 철수하기 전에 자신의 작전구역 안에 있는 기름탱크의 석유를 방류한 후 폭발시켜 일본군에게 화공을 가하는 임무도 맡았다. 

당시 갈레간 중령은 일시적으로 난청이 와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희의가 끝난 후 맥스웰 준장은 치료를 위하여 갈레간 중령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제2/30호주대대의 부대대장이었던 램지 소령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대대장 2명이 모두 바뀌었는데 램지 소령은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아서 회의 내용을 대대 정보장교인 이튼 중위로부터 전달받았다.


일본군의 야포가 9일 하루종일 제27호주여단 지역을 포격하여 오후 6시가 되자 해안방어선으로 통하는 전화선이 모두 끊기고 방어시설이 파괴되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근위사단은 스쿠다이 강에서 승선을 마쳤다. 오후 8시 30분이 되자 포격이 멎더니 오후 9시부터 일본군이 둑길과 크란지강 사이의 해안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은 4개 제대로 나뉘어 상륙했다. 좌익을 담당한 좌측엄호대(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는 제2/30호주대대 구역인 둑길과 만다이 강 사이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의 주력인 보병단은 3개 제대로 나뉘어 크란지 강과 만다이 강 사이의 제2/26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했다. 보병단의 좌익인 좌공격대(근위보병제4연대제1대대)는 제2/26호주대대 B 중대가 지키던 만다이 강 서쪽에 상륙했다. 보병단의 중앙인 근위보병제3연대제3대대는 제2/26호주대대 A 중대가 지키던 크란지 마을 서쪽에 상륙했다. 보병단의 우익이자 주공인 우공격대(근위보병제4연대제2 및 제3대대)는 역시 제2/26호주대대 A 중대가 지키던 크란지 강 동쪽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은 상륙주정이 모자라 고생했다. 전날 상륙을 실시한 제5사단과 제18사단으로부터 많은 주정를 받아야 했으나 상륙 과정의 소모로 인하여 약속된 분량이 도착하지 않았다. 가령 우공격대의 경우 원래 제18사단으로부터 75척의 절첩주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도착한 것은 25척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제1파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제한되었으며 추가 병력의 투입에도 지장을 받았다.


제27호주여단의 화력지원을 담당한 것은 제2/10야포연대의 2개 포대였는데 제2/26호주대대에 배정된 1개 포대는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여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해가 진 이후에야 북상 명령을 받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상륙이 시작되었을 때 가용한 포대는 제2/30호주대대에 배정된 1개 포대 뿐이었다.


(근위사단 상륙 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28)


제27호주여단의 좌익을 맡은 제2/26호주대대의 탐조등은 이번에도 작동하지 않았고 병사들은 접근하는 일본군 주정을 발견하고 일제히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나 야포 지원도 없었다. 기관총의 반응도 늦어 첫 주정이 상륙한 지 20분이 지나서야 사격을 시작했다. 그나마 박격포들이 제 역할을 하여 상륙하는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나 계속 몰려드는 후속부대의 상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곧 제2/26호주대대의 선두 소대와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일선에 배치된 A 및 B 중대와 바로 후방에 있던 C 중대는 크란지 마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펴고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자정까지 버텼다.


제2/30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는 만다이케칠 강 하구에 상륙했는데 제2/30호주대대는 일본군의 상륙지점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는 방법으로 느슨한 포위망을 만들었다. 이때 일본군 교두보 내로 야포 사격을 가하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나 램지 소령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포탄이 떨어진 후였으며 추가 공급도 없었다. 포위망 내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는데 실패하자 일본군이 포위망의 약한 곳을 뚫고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상륙하자 제2/30호주대대 B중대장 더피 대위는 폭파반에게 기름탱크를 폭파하여 일본군에게 화공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와천 중위가 이끄는 폭파반이 폭약을 실은 트럭에 접근하는 순간 트럭이 적의 포탄에 맞아 부서졌으나 다행히 폭약은 터지지 않았다. 폭파반은 폭약을 들고 6km 를 걸어서 10일 새벽 3시에 기름탱크에 도착한 후 폭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일본군이 들이닥쳤으나 폭파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폭파반은 일본군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작업을 계속하여 폭약 설치를 마쳤다. 폭발시간을 새벽 4시로 설정한 폭파반은  밸브를 열어 기름을 방류하고는 무사히 탈출했다. 끈적거리는 기름이 강을 따라 해협으로 흘러들자 해안의 일본군은 영국군이 화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질렸다. 새벽 4시가 되자 900만 리터의 석유를 저장하고 있던 기름탱크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눈이 멀듯한 섬광이 밤하늘을 밝혔고 귀를 찢는듯한 폭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불타는 기름이 강으로 쏟아져 이미 강을 따라 해협에 흘러들어가고 있던 기름띠에 불을 붙였다. 불타는 기름은 오전 4시 50분에 만조가 된 밀물을 타고 해안가의 맹그로브 숲을 덮쳐 미처 해안을 벗어나지 못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같은 시각 제3인도군단의 공병과 해군공병대가 해군기지에 설치한 폭약도 폭발하면서 혼란을 부채질했다.


크란지 마을에서 저항하던 제2/26호주대대의 3개 중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자정이 되자 제2/26대대는 해안에서 460m 정도 떨어진 크란지 반도의 목을 이루는 좁은 지형까지 밀려났다. 대대는 이곳에 방어선을 펴고 거듭되는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때 제2/26호주대대와 제27호주여단사령부와의 통신이 반짝 가능해졌다. 맥스웰 준장은 옥스 중령에게 제2/30호주대대까지 통합 지휘할 권한을 부여하면서 옥스 중령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면 9일 오후에 설정한 방어선으로 물러서도 좋다고 허가했다.

맥스웰 준장은 제2/10야포연대에게도 남쪽의 경주로(Racecourse) 지역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은 9일 새벽 4시가 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침 그때 기름탱크와 해군기지가 동시에 폭발하면서 일본군이 동요하자 그는 제2/30호주대대와 자신의 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양 대대는 일본군의 혼란을 틈타 쉽게 철수했다. 제2/30호주대대는 만다이 도로의 14마일이정표 지역으로 철수했고 제2/26호주대는 제2/30호주대대의 남쪽에서 부킷판장 마을의 북쪽에 이르는 지역으로 철수했다. 제27호주여단이 둑길 지역을 포기함으로써 동쪽의 제11사단과 약 3,700m 에 달하는 공간이 생겨났다. 제2/30호주대대는 철수하기 전에 인접한 제2/2구르카대대에게 자신들이 서쪽으로 철수한다는 사실과 새로 배치될 지역을 적어 전달했다. 이 메모는 제2/2구르카대대가 소속된 제18여단사령부까지 도달했으나 제11사단과의 통신이 불량하여 한참을 지체한 후 제3인도군단으로 바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제11사단사령부는 제27호주여단의 철수 소식을 제3인도군단사령부로부터 들어야 했다.


이때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은 상황 판단에 착오를 일으켰다. 전방으로부터 고전하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는 데다가 영국군의 화공까지 겹치자 그는 그만 자신감을 잃었다. 니시무라 중장은 제25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영국군의 화공으로 제1선 부대가 대손해를 입었다며 공격을 취소하고 다음날 제5사단 구역에 상륙할 승인을 요청했다. 야마시타 중장은 상황 파악을 위하여 제25군 참모인 케라 중좌를 파견했다. 케라 중좌는 상황을 파악한 후 야마시타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근위)사단의 손해는 근소하며 제1선 부대는 목하 공격전진 중" 이라고 보고했다. 따라서 근위사단은 공격을 속행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을 마뜩잖게 생각하던 야마시타 중장의 불신감을 더욱 키웠다. 물론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이나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말레이 사령부는 근위사단의 상륙을 늦게 알았다. 둑길 구역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은 10일 새벽 5시에야 말레이사령부에 도착했고 5시 30분에는 제27호주여단이 후퇴한 것 같다면서 확인을 요구하는 보고가 제3인도군단으로부터 들어왔다. 오전 6시에 서부지구사령부는 제2/30호주대대가 크란지 해안을 떠나 만다이 도로의 14마일 이정표 지역에 있다고 말레이 사령부에 확인해 주었다.


제27호주여단의 동쪽을 지키던 제11사단장 키 소장이  제3인도군단사령부로부터 제27호주여단의 후퇴 소식을 들은 것은 오전 6시 30분이었다. 졸지에 사단의 왼쪽 옆구리가 열려버리자 키 소장은 즉시 사단예비대인 제8여단에게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간선도로 서쪽으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또한 오전 8시에는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에게 통신을 보내어 만다이 마을을 점령함으로써 간선도로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이로써 근위사단의 상륙도 성공했다. 이제 일본군 도항부대는 후속부대와 장비 및 보급품의 수송에 전력했다.

일본제25군의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 및 중장비 수송은 예정보다 늦어졌다. 주정들은 8일 밤에는 제5 및 제18사단을 상륙시켜야 했고 9일 밤에는 근위사단을 상륙시켜야 했다.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중화기 및 중장비의 도항이 이루어졌는데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수송순서에 혼란이 생겼으며 작업대와 도항부대의 연계는 부족했고 작업대는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결국 야포 일부가 도항하여 전투에 참가한 것은 2월 12일부터였고 군포병대를 비롯한 중화기가 모두 도항하여 전투준비를 완료한 것은 2월 14일이 되어서였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1942년 2월 8일에 조호르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조호르 왕궁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원래 제25군 사령부는 9일 아침에 도항하려 했으나 주정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9일 저녁으로 연기했다가 다시 10일 새벽으로 연기했다. 야마시타 중장은 10일 새벽 4시에 조호르 왕궁을 떠나 싱가포르 섬에 상륙하여 일선부대를 둘러본 후 10일 저녁에 텡가 비행장 부근에 사령부를 차렸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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