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부킷티마 함락
일본제5사단의 보병제42연대는 10일 저녁에 초아추캉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제12여단(파리스 준장)을 공격했다. 11마일 이정표 지역을 지키던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는 일격에 패배하여 부킷판장을 통하여 도망쳤다. 부킷판장을 지키던 제2/29호주대대의 3개 중대가 하이드라바드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보병과 교전하는 동안 중형전차 1개 중대가 들이닥쳤다. 제2/29호주대대는 3대를 격파했으나 나머지 전차는 호주군을 무시하고 부킷판장을 통과하여 우드랜드 도로를 따라 부킷티마로 남하했다. 이어서 최소한 2개 대대가 넘는 일본군 보병의 공격을 받은 제2/29호주대대는 부킷판장 마을 동쪽의 언덕으로 밀려났다. 이후 제2/29호주대대의 3개 중대는 송수관을 따라 경주로 지역까지 남하하여 오전에 헤어졌던 대대본부 및 A 중대와 만났다. 대대 전체를 다시 장악한 제2/29대대장 폰드 중령은 재편성을 실시한 다음 제2/15호주야포연대를 호위하면서 남하했다. 11일 아침에 부킷치마 남쪽에서 토머스 중령을 만난 제2/29호주대대는 톰포스에 편입되었다.
이제 남하하는 일본군과 부킷티마 사이에는 아길대대만 남았다. 아길대대는 보유한 차량과 몇 개 남은 대전차지뢰를 사용하여 황급히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10일 오후 10시 30분에 일본전차가 들이닥쳤다. 아길대대는 대전차포 3문과 장갑차 1대로 반격하여 일본전차 1대를 파괴하면서 일단 전진을 막았다. 그러나 곧 전차제6연대의 주력이 도착하여 전차 약 50대가 보병과 함께 재차 공격하자 아길 대대는 패배하여 제12여단 사령부와 함께 우드랜드 도로 서쪽의 목장 지역으로 밀려났다.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기 직전에 제12여단의 참모 2명이 부킷티마에 주둔 중인 제2/4호주대전차연대에게 일본전차의 남하를 알리려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들은 도중에 연락 임무를 띄고 서부지구사령부에서 제12여단으로 향하던 프레이저 소령과 만났다. 참모들로부터 설명을 들은 프레이저 소령은 연락 임무를 잠시 밀어두고 참모들과 함께 제2/4호주대전차포연대를 찾았다. 프레이저 소령은 주롱도로와 우드랜드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남쪽으로 약 270m 떨어진 지점에 트랙터 3대로 길을 막아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제2/4호주대전차포연대를 배치했다.
일본전차대는 자정이 되어 부킷티마의 교차로에 도착한 후 더 이상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교차로 북쪽에 머물렀다. 보병제42연대제2대대가 전차를 보호하면서 부킷티마 교차로 부근에 주둔했다. 제3대대는 부킷티마의 북동쪽 고지를, 그리고 제1대대는 부킷티마의 북서쪽 고지를 점령했다. 이로써 일본군이 요충지 부킷티마를 점령했다. 또한 일본군이 주롱도로의 종점을 통제함으로써 아침의 역습을 위하여 이동 중이던 제15여단 및 제22호주여단의 전진부대들은 고립되었다.
11일 아침까지 일본군의 위력정찰대가 남쪽으로 부오나비스타 15인치 포대와 슬리피밸리 지역까지 돌아다녔는데 후자는 홀랜드 도로에 있던 서부지구사령부에서 지척이었다. 슬리피밸리 지역에 남하한 위력정찰대는 11일 새벽에 후퇴하는 병력에 대해 매복을 실시하는가 하면 소년원 도로 지역에 있던 제22호주여단사령부를 습격하기도 했다.
목장 지역으로 밀려난 아길대대는 11일 새벽에 일본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찰대가 보고한 일본군의 규모는 아길대대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자신의 사령부와 아길대대를 이끌고 송수관을 따라 골프장 지역을 거쳐 탕글린으로 후퇴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영국군의 우익에서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제22호주여단의 전방부대들은 반격을 위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X 대대는 자정에 제15여단의 남쪽에 있는 138고지에 도착했다. 더 남쪽에서는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메렛 부대가 목표인 85고지를 찾지 못하여 슬리피밸리에서 새벽까지 기다렸다.
X 대대는 행정병을 모아 만든 부대로서 3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했으며 무장도 빈약했다. 소총을 제외하면 대대의 화기는 기관단총 15정, 경기관총 8정, 2인치 박격포 5문, 3인치 박격포 2문에 지나지 않았다. 소총도 없어서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병사도 있었으며 브렌건캐리어도 없었다.(보병대대의 무장 정수는 기관단총 42정, 경기관총 50정, 2인치 박격포 16문, 3인치 박격포 6문, 브렌건캐리어 14대, 3인치 박격포를 실은 유니버설캐리어 7대이다.)
138고지에 도착한 X 대대는 즉시 방어선을 폈으나 11일 새벽 1시가 되자 지친 병사들은 대부분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에 일본제18사단이 주롱도로를 따라 진격해 왔다. 제18사단 좌익대의 선두인 제56연대제2대대는 척후를 통해 X 대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잘 조율된 공격을 실시했다. X 대대는 비오듯 쏟아지는 박격포탄과 함께 정면과 측면에서 기습을 받았다. 공격 초기에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이 대대본부 옆에 있던 드럼통에 맞아 불타는 석유가 주변을 밝혀 일본군의 공격을 도왔다. 자다가 기습을 당한 X 대대는 궤멸되었다. 본부 옆의 드럼통이 불타면서 일본군의 총탄이 대대본부 텐트로 쏟아져 대대장 보이스 중령과 부대대장 브래들리 소령이 전투 초기에 전사했다. 3명의 중대장 중 1명은 전사했고 1명은 부상을 입었다. X 대대원 중 소수만이 살아남아 소년원 도로까지 철수했다.
X 대대의 북쪽에는 제15여단이 주둔 중이었다. 여단장 코츠 대령은 11일 새벽 2시 30분에 후방인 부킷티마가 불타는 것을 보고 참모를 파견했다. 부킷티마로 접근하던 참모는 타고 있던 자동차가 일본전차의 사격을 받아 파괴되고 구사일생으로 걸어서 여단사령부로 돌아왔다. 참모로부터 부킷티마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코츠 대령은 자신이 고립되었음을 깨달았다. 코츠 대령은 새벽 5시 30분에 2단계 반격을 취소했으나 제2/9자츠대대는 이미 출발한 후였다. 자츠대대는 이후 복귀하지 못하고 전선 후방에 고립되어 있다가 싱가포르 항복과 함께 해산했다. 병사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으나 대대장 커밍 중령은 장교 몇 명과 함께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로 탈출했다.
제15여단 사령부는 부킷티마 북서쪽 1.6km 지점에 있었는데 11일 오전 6시에 부킷티마의 일본군(보병제42연대)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코츠 대령은 영국대대 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1942년 2월 11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9)
X 대대를 분쇄한 제18사단은 11일 오전 7시 30분부터 진격을 재개했다. 이제 제15여단은 부킷티마로부터 추격하는 보병제42연대와 주롱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제18사단 사이에 끼었다. 절박한 상황에 빠진 제15여단은 우선 오전 9시에 제18사단 우익대의 선두인 보병제114연대제1대대에게 백병전을 불사하는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뜻밖의 일격에 놀란 일본군이 움찔하는 사이 제15여단은 재빨리 후퇴했다.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코츠 대령은 부하들을 영국군, 호주군, 인도군으로 나누어서 따로 소년원 도로 방면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철수하는 도중에 완전히 흩어졌으며 결국 약 1,500명에 달하던 제15여단의 병력 중 소년원 도로에 도착한 것은 약 4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슬리피 계곡에 자리잡고 있던 메렛부대도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소년원 도로 방면으로 후퇴하다가 일본위력정찰대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수만이 소년원 도로 지역에 도달했다.
소년원 도로 지역에 있던 제22호주여단사령부는 11일 새벽에 부킷티마에서 남하한 일본군 위력정찰대의 공격을 받았다. 참모, 행정병, 통신병에다가 후퇴하여 부근에 막 도착한 병력까지 가용한 병력들이 총동원되어 백병전까지 불사하는 혈투를 벌였다. 결국 제2/18호주대대의 브렌건캐리어 3대가 달려온 오전 7시에야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정보참모 후튼 중위가 전사하고 여단 부관 빌 소령과 방어소대장 반스 중위가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위력정찰대는 부오나비스타 15인치 포대 부근까지 출몰했으며 따라서 일출과 동시에 포대를 폭파해야만 했다.
이로써 악몽의 밤이 끝났다. 만약 일본군이 작정하고 전차대와 함께 부킷티마 남쪽으로 진출했다면 제15여단의 바리케이드를 뚫었을 것이며 11일 해가 뜨기 전에 일본전차대가 싱가포르 시가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싱가포르가 그날 밤에 함락되지 않은 이유는 일본군이 부킷티마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진격을 멈춘 이유는 이미 목표 지역을 확보한데다가 야포의 진출이 늦어지고 해협을 건너는 보급이 한계에 달하여 탄약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기원절(일본의 건국기념일)인 2월 11일에 맞추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11일 날이 밝으면 퍼시발 중장에게 항복권고문을 보낼 생각이었다.
'1941년 및 그 이전 > 싱가포르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가포르 함락(62)-최종 방어선으로의 철수 (0) | 2018.04.18 |
---|---|
싱가포르 함락(61)-항복권고문 투하 (0) | 2018.04.17 |
싱가포르 함락(59)-반격 계획 (0) | 2018.04.16 |
싱가포르 함락(58)-주롱방어선 상실 (0) | 2018.04.15 |
싱가포르 함락(57)-근위사단 상륙 (0) | 2018.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