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필리핀 증원(2) - 해군 및 요약
필리핀의 방어를 책임진 해군 세력은 토머스 하트 해군대장의 아시아 함대로서 사령부는 마닐라 시내의 마스만 빌딩에 있었다. 필리핀을 담당한 제16해군관구 사령부는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에 있었다.
1941년 5월 현재 아시아 함대의 세력은 하트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휴스턴, 경순양함 마블헤드, 제1차 세계대전형 구축함 13척으로 이루어진 3개 구축함전단, 그리고 잠수함 17척, 잠수모함 1척 및 구조함 1척으로 이루어진 제20잠수함전대였다. 항공세력은 24대의 카탈리나 비행정과 4척의 수상기 모함을 보유한 제10초계비행단이었다. 이외에 포함 7척, 요트 1척, 소해함 6척, 급유함 2척, 원양 예인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함대의 일부인 제4해병연대는 상하이에 주둔 중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200명 정도의 해병대원이 베이징과 텐진의 미국 외교공관을 지키고 있었다. 아시아 함대의 전력으로 일본연합함대와 맞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므로 하트 제독은 개전 이후 필요하면 함대를 인도양으로 철수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아시아 함대는 영국 극동함대 및 네덜란드 함대와 함께 싸우게 될 것이었다. 1941년 5월 현재 영국은 극동 지역에 전함 1척, 항공모함 1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3척, 그리고 구축함 몇 척을 배치하고 있었으며 12월까지 전함 3척과 구축함 3척을 추가로 배치할 것이라고 미국에 약속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해군은 경순양함 3척, 구축함 7척, 그리고 잠수함 15척을 보유했다.
태평양의 미해군 세력은 대부분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는 허즈번드 킴멜 대장의 태평양함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1941년 5월 현재 태평양함대의 세력은 전함 9척,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8척, 구축함 50척, 잠수함 33척, 초계기 100대였으며 진주만 기습 당시도 비슷했다.
아시아 함대 총사령관 하트 제독은 제한된 전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1941년 6월부터 초계에 나서는 카탈리나를 하루 3대에서 6대로 늘렸으며 8월말까지 마닐라 만과 수빅 만에 기뢰를 깔아 부상한 상태의 잠수함과 흘수가 얕은 상륙주정같은 소형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선박은 정해진 수로로만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바탄 반도 남단에 있는 마리벨스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만들어 7월 22일에 올롱가포에 있던 건선거 듀이를 옮겼다. 이제 항구로서 올롱가포의 역할은 축소되어 주로 상하이에서 철수한 제4해병연대의 주둔지로 기능했다.
아시아함대의 증강은 잠수함 위주로 실시되었다. 1941년 11월 24일까지 아시아함대에는 12척의 잠수함과 잠수모함 홀랜드가 도착하여 이제 하트 제독은 29척의 잠수함을 거느렸다. 9월에는 어뢰정 6척이 도착했으며 맥아더 장군은 하트 제독에게 만일 원한다면 어뢰정 2척을 보유한 필리핀 연안경비대를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하트 제독은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중국에 파견되어 있는 포함, 제4해병연대, 그리고 베이징과 텐진의 해외공관을 지키는 해병분견대를 철수시키기 위하여 1941년 여름부터 해군부에 여러차례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가 떨어진 것은 11월 10일이 되어서였다.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하트 제독은 중국에 있던 포함 7척에게 철수명령을 내렸고 5척이 마닐라에 도착했다. 포함 중 가장 작은 웨이크는 무장 해제 후 상하이에 정박한 채 뒤에 남겨진 미국인을 위한 숙소 및 통신소 역할을 하다가 진주만 기습 직후 일본군에게 나포되었다. 충칭에 있어 바다로 나올 수 없었던 투투일라는 현지에서 중국에 공여되었다.
상하이에 주둔 중이던 새뮤얼 하워드 대령의 제4해병연대도 철수 명령을 받았다. 아시아함대는 제4해병연대의 철수를 위하여 프레지던트급 대형 정기여객선 매디슨과 해리슨을 임대했다. 두척의 여객선은 제4해병연대를 태우고 11월 27일과 28일에 상하이를 출발하여 11월 30일과 12월 1일에 올롱가포에 도착했다. 장교 44명, 부사관 및 병 728 명, 해군에서 파견된 인원 32명등 총 804명으로 이루어진 제4해병연대는 3인치 대공포와 50구경 기관총을 포함하여 1,000톤에 달하는 모든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필리핀에 도착하여 마리벨스, 카비테 및 올롱가포의 방어를 맡았다.
해리슨은 제4해병연대의 병사들을 내려주고 베이징과 텐진의 해외공관을 지키던 해병분견대를 구하러 북중국으로 돌아갔으나 도착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텐진의 캠프 홀콤에 주둔한 해병분견대 주력을 지휘하던 루터 브라운 소령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임장교 윌리엄 아슈스트 대령은 2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과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기 위하여 항복 명령을 내렸다.
1941년 12월 5일 현재 극동미육군을 증원하기 위하여 전쟁부가 승인한 병력과 장비는 선박 100만 총톤에 달했으며 10만 총톤은 이미 항해 중이었다. 필리핀군을 위한 75mm 야포 188문 이외에 군단 및 군 포병단이 사용할 155mm 곡사포 48문과 155mm 평사포 24문도 보낼 예정이었으며 기동성이 강화된 대공포연대 3개도 파견될 것이었다. 필리핀 주둔 미군을 증원하기 위한 병력과 장비는 1942년 3월까지, 그리고 필리핀군을 위한 장비 및 보급품은 7월까지 도착할 것이었다. 전쟁부는 필리핀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국 의회에 269,000,000 달러의 예산을 요청했으며 일부는 승인이 떨어진 상태였다.
전쟁이 터졌을 때 증원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펜사콜라 호송선단은 1941년 11월 29일에 하와이를 떠나 일본의 신탁통치령을 피해 남쪽 항로를 따라 필리핀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선단에는 제27폭격비행전대의 A-24 경폭격기 52대, P-40전투기 18대, 차량 340대, 75mm 야포 48문, 30구경 및 50구경 총탄 3,500,000발, 폭탄 600톤, 항공유를 채운 드럼통 9,000개가 실려 있었으며 2개 경포대대와 제7중폭격비행전대의 지상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선단은 필리핀에 도착하지 못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극동미육군항공대의 병력은 5,609명으로 7월의 2배로 늘어나 있었으며 B-17 폭격기 35대와 P-40 전투기 107대를 포함하여 277대의 비행기가 주로 루손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필리핀에 배치된 신형 항공기의 숫자는 하와이나 파나마보다 많아 미군 기지 중 가장 많았다. 클라크 비행장은 대공포 연대가 보호하고 있었으며 레이더 2세트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원시적인 대공경보체계가 가동 중이었다.
아시아함대 또한 증강되어 12월 7일 현재 중순양함 1척(휴스턴), 경순양함 2척(마블헤드, 보이시), 구형 구축함 13척, 잠수함 29척, 포함 6척, 어뢰정 6척, 카탈리나 32대, 그리고 각종 지원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상군도 급속히 팽창했다. 비록 훈련 상태가 불량하고 장비가 빈약하기는 했지만 11월말까지 필리핀군 예비사단 10개가 2/3 정도 동원을 마쳤으며 개전후 1주일 만에 필리핀군의 총병력은 100,000명을 넘겼다.
미육군은 7월 31일에 비해 장교 1,070명과 부사관 및 병 7,473명이 늘었다. 정원이 법으로 정해진 필리핀 스카우트는 약 12,000명으로 변화가 없었다. 7월 31일에 1,836명이었던 지원부대 병력은 4달 만에 4,268명으로 늘었다. 7월 31일 현재 2,407명이던 육군항공대 병력은 11월 30일 현재 5,609명으로 늘었으며 12월 7일에는 장교 754명과 부사관 및 병 6,706명에 달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미육군수비대 병력은 31,095명이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필리핀 주둔 미육군 현황.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44)
참고로 아래는 1941년 7월 31일 현재 필리핀 주둔 미육군의 상황이다.
(1941년 7월 31일 현재 필리핀 주둔 미육군 현황.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24)
맥아더 장군이 극동미육군 사령관이 된 이래 4개월 동안 필리핀의 미육군은 증강되었으나 여전히 미흡했다. 전쟁부는 맥아더 장군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증원은 1942년 4월이 되어야 완료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1941년 및 그 이전 > 필리핀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핀 함락(8)-방어 계획 (0) | 2018.04.27 |
---|---|
필리핀 함락(7)-일본의 계획 (0) | 2018.04.26 |
필리핀 함락(5)-필리핀 증원(1) (0) | 2018.04.25 |
필리핀 함락(4)-필리핀군의 동원과 훈련 (0) | 2018.04.25 |
필리핀 함락(3)-극동미육군 (0) | 2018.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