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극동미육군


필리핀 자치령이 국군을 키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듬해인 1940년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5월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독일에 무릎을 꿇더니 급기야는 6월 21일에 프랑스마저 독일에게 항복했다. 영국은 힘들여 생산한 장비를 됭케르크에서 몽땅 잃고 병력만 간신히 탈출시킨 후 독일의 본토 침공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는 처지로 굴러 떨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군은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고 1941년 4월에는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으면서 남방으로 진출할 경우 배후의 위험을 없앴다.


미국은 세력을 팽창시키는 일본에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1940년 7월 26일에 미국은 1911년 이래 유지되어 오던 미일통상조약의 갱신을 거부했다. 같은 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항공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와 고철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선적 가능한 품목으로 지정했다. 1941년 전반기까지 고철, 강철 그리고 휘발유의 대일 수출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같은 기간 중국에 대한 원조는 확대했다. 1940년 11월에 수출입 은행을 통하여 5천만 달러를 공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은 연말까지 1억 7천만달러의 차관을 장개석 정부에 공급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일본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압박을 받자 오히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게 경제협정을 맺자면서 압력을 강화했다.


전쟁의 위협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미국 의회는 주저하면서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1938년에 10억 달러에 불과하던 국방예산은 39년에 12억 달러, 40년에는 22억 달러가 되었다가 41년에는 138억달러로 급증했다. 하지만 늘어난 예산이 필리핀 방위에 기여한 정도는 미미했다.

당시 미국에게 국방예산 사용의 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 육군의 확장과 훈련

2. 산업 동원

3. 우방 원조

4. 해군 및 육군항공대 정비

5. 해외영토 및 식민지 방어


따라서 해외 영토 및 식민지 방어는 국방예산 사용의 우선순위에서 꼴찌였는데 그나마 필리핀은 해외영토 중에서도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미서해안을 지키기 위한 알래스카, 하와이 및 파나마의 방어가 우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이 1941년 7월 25일에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면서 필리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일본이 남진하자 1937년 12월 31일에 퇴역한 맥아더를 미육군에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41년 5월에 필리핀 장거리전화회사의 회장인 조셉 스티브놋이 워싱턴에 와서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스티브놋은 맥아더 장군을 복귀시켜 필리핀 군관구를 직접 통제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스팀슨은 마셜 육군참모총장에게 권고했다.


6월 초에는 맥아더 자신이 합동참모본부, 전쟁부, 그리고 대통령에게 복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만간 필리핀군을 미군에 흡수시키고 자신은 미육군에 복귀하여 극동 지역의 미군을 통합 지휘하는 임무를 맡고 싶다고 적었다. 이는 극동에 새로운 사령부를 만든다는 의미로서 영국은 이미 비슷한 사령부를 만든 상태였다. 극동에 새로운 사령부를 만든다는 것은 맥아더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며 필리핀 군관구 또한 같은 주장을 1941년 초부터 반복하고 있었다. 


마셜은 맥아더의 요청을 합참 내의 전쟁계획국(War Plan Division)으로 보내 검토를 명했다. 6월 6일에 전쟁계획국장 레너드 지로 준장은 반대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이 비슷한 성격의 사령부를 창설한 것은 사실이나 극동의 영국군과 미군은 처지가 달랐다. 영국군은 극동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반면 미군은 필리핀에 모여 있었으며 필리핀만 지키면 되는 입장이었다. 지로 준장은 맥아더가 현역에 복귀한다면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전쟁계획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육군 수뇌부는 맥아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는 미육군소장으로 복귀하는 동시에 새로 만들어진 극동미육군(U.S. Army Forces in the Far East = USAFFE)사령관직에 올랐다. 극동미육군은 필리핀 군관구와 필리핀 자치령 국군으로 이루어졌으며 필요하면 추가 부대가 소속될 수 있었다. 이로써 1935년 이래 처음으로 필리핀 군관구와 필리핀 자치령 국군의 지휘 계통이 통일되었다. 맥아더는 61세의 나이로 미육군소장에 복귀했으나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 20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미육군에 복귀한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사령부를 만들고 필리핀군을 훈련시키며 임박한 침공에 대비하여 증원군과 증원물자를 최대한 확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령부는 기존의 군사고문실 참모를 중심으로 하고 추가로 필요한 인원은 필리핀 군관구에서 충당했다. 8월 중순에 극동미육군사령부가 마닐라의 칼레 빅토리아 1번지에 들어섰다. 참모들의 나이는 43세에서 52세 사이였다.


참모장은 리처드 서덜랜드 중령이 맡았다. 대령을 거치지 않고 1941년 8월에 바로 준장으로 승진한 서덜랜드 참모장은 1946년까지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았으며 중장까지 승진했다.

부참모장은 리처드 마셜 중령이었는데 임명과 동시에 대령이 되었고 1941년 12월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맥아더의 평가에 따르면 마셜 부참모장은 미육군 최고의 보급장교였다.


맥아더 장군이 극동미육군사령관이 되었을 때 필리핀 군관구는 1,434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22,532명이었으며 그중에서 11,972명은 필리핀 스카우트였다. 전체 병력 중 7,293명이 보병이었으며 해안포부대는 4,967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력은 대부분 루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필리핀 군관구가 보유한 가장 큰 단위부대는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의 필리핀 사단(Philippine Division)이었다. 1941년 7월 31일 현재 필리핀 사단의 병력은 아래와 같다.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html#table1)


표를 보면 사단 병력 중 장교를 제외하면  제31연대와 헌병대 일부만 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필리핀 스카우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이 1,729명인 제31연대는 1941년 7월 31일 현재 정원을 371명 초과한 반면 제45 및 제57연대는 정원이 2,435명이었으니 약간 미달한 상태였다. 제23야포연대는 이름이 무색하게 75mm 산포를 장비한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24야포연대는 영국제 75mm 야포를 가진 2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필리핀 사단은 사단 단위로 기능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예하 부대는 흩어져 주둔했다. 사령부와 사단 주력은 마닐라 남쪽의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 주둔했다. 제31보병연대는 마닐라 시내에 있는 마닐라 병영에 주둔했고 제12보급연대의 1개 대대는 마닐라 항에 주둔했다.

제1/45대대(1개 중대 감편)는 바탄반도 남동쪽 해안에 있는 리메이 병영에 주둔했다. 포병, 제12군수중대 및 보급연대의 1개 소대를 포함한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마닐라 북쪽으로 80km 떨어진 클라크 비행장 부근의 포트 스토첸버그에 주둔했다.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24)

필리핀 사단을 제외한 필리핀 군관구 소속 부대는 항만방어부대(Harbor Defense), 제26기병연대, 제86 및 제88야포연대, 그리고 보급, 통신 및 헌병대 등이다.

항만방어부대는 코레히도르 섬의 포트 밀스에 사령부를 둔 조지 무어 소장이 지휘했다. 휘하 부대 중 카발로 섬의 포트 휴이, 엘 프라일 섬의 포트 드럼, 카라바오 섬의 포트 프랭크가 마닐라 만 입구를 방어했으며 그란데 섬의 포트 윈트가 수빅 만 입구를 방어했다.

제26기병연대는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로서 3개 중대를 가진 2개 대대로 이루어져 병력이 838명에 지나지 않았다. 연대 주력은 포트 스토첸버그에 주둔하고 F 중대는 마닐라 남쪽의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했다.

제86 및 제88야포연대도 역시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로서 포트 스토첸버그에 주둔했다. 이외에 제43보병연대가 있었는데 329명이라는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름만 연대일 뿐 사실은 제45연대에서 바기오와 민다나오에 파견한 분견대였다.

필리핀 군관구의 지원병력 중 육군 항공대를 제외하고는 보급부대와 의무대의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들은 주로 루손에 주둔하고 일부가 민다나오에 주둔했다. 제808헌병중대는 마닐라에 주둔했다.


1941년 8월 4일에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미육군항공대 세력이 맥아더 사령부 휘하로 들어오면서 극동미육군항공대(USAFFE Air Force)가 되었다. 세력은 빈약했다. 210대의 항공기 중 31대만이 그나마 신형기라고 볼 수 있는 P-40B 이었으며 나머지는 구식인 P-26, P-35, B-10, B-18, A-29, C-39 와 관측기들이었다.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은 포트 스토첸버그 부근에 자리잡은 클라크 비행장 뿐이었다.

항공대 사령부는 마닐라 부근의 니엘슨 비행장에 있었으며 주력은 마닐라 부근의 니콜스 비행장과 마닐라 북쪽의 클라크 비행장에 있었다. 클라크 비행장의 제4혼성비행전대는 휘하에 3개 추격비행대대, 1개 폭격비행대대 그리고 1개 관측비행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보유 기종은 P-26(21대), P-35(56대), P-40B(31대), O-46(10대), O-19E(3대), A-9(10대), C-39(1대), A-27(9대), B-10B(14대), B-18(18대)이었다. 나머지 비행기는 대부분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한 제20기지전대가 보유하고 있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설립과 함께 필리핀 군관구의 역할은 축소되어 주로 필리핀 군의 훈련을 맡았다. 이제 전투계획을 짜고 야전부대를 편성하여 지휘하는 일은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임무였다. 필리핀 군관구의 역할이 축소됨에 따라 사령관 조지 그루넛 소장의 위치가 어정쩡해졌다. 전쟁부는 1941년 10월 23일에 그루넛 소장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고 맥아더 장군에게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을 겸직시켰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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