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필리핀군의 동원과 훈련


필리핀군을 동원하고 훈련시키며 보급하는 일은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시급하고 중요한 임무였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9월 1일을 기하여 10개 사단, 75,000명의 필리핀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동시에 25,00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전국 훈련소의 막사를 7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막사의 수용 능력 때문에 동원 속도는 느렸다. 전국 훈련소의 막사에 일단 25,000명을 수용하고 이후 막사가 건설되는대로 추가로 동원했다. 따라서 9월 1일의 동원령은 사단마다 1개 연대씩 10개 연대에 대해 적용되었으며 10개 사단이 동원을 완료하는 시기는 1941년 12월 15일로 예정되었다. 동원된 병력은 훈련소에서 실전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갔으며 예비군 형성을 위한 훈련은 중단되었다.


동원된 필리핀군은 미국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그들은 자체의 군복, 전투식량, 군법, 급료, 승진 체계, 보급망을 가졌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미육군이 부담했다.


1941년 8월 15일에 창설된 6개 비행대대로 이루어진 500명 규모의 필리핀육군항공군단(Philippine Army Air Corps)도 동원명령을 받았다.


(필리핀육군항공군단 창설식.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html#2-4 P.25)


1941년 11월 초에 2번째 연대가 소집되었으며 11월 중순에는 사단사령부와 지원부대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전쟁이 터졌다. 개전 당시 10개 사단 중에서 동원을 완료한 사단은 없었다. 대전차포가 부족하여 대전차대대를 가진 사단은 하나도 없었고 야포가 부족하여 대부분의 사단이 빈약한 포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사단에는 평균적으로 전쟁부가 보내준 40명의 미군 장교와 조교 역할을 하던 20명의 미군 및 필리핀 스카우트 출신 부사관이 있었는데 7,500명의 사단 병력 중에 사단장이 믿을만한 인원은 사실상 이들이 모두였다. 미군 장교는 주로 사단과 연대의 참모 역할을 했으므로 부사관인 조교가 중대, 심지어는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전 초기에 조교들은 황당한 처지에 빠졌다. 즉 작전권과 지휘권이 없는 상태에서 중대와 심지어는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의 혼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전쟁 초기인 1941년 12월 중순까지 동원된 필리핀군의 숫자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산은 가능하다. 일단 정원 7,500명인 사단 10개의 동원을 12월 중순에 완료했기 때문에 75,000 명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상비군인 제1정규사단(1st Regular Division), 경찰대, 사단에 편제되지 않은 독립 부대와 임시 부대까지 합쳐 필리핀군의 병력은 120,000명 정도였다.


첫번째 연대가 동원되면서 교육을 위한 각종 학교가 들어섰으며 여기서 훈련받은 장교와 부사관이 추가로 동원된 필리핀인을 교육했다. 바기오에는 사단장이 될 미군 영관급 장교와 필리핀 고위장교, 그리고 사단 참모장이 될 장교를 교육시킬 학교가 들어섰다. 각 사단이 위치한 군관구에는 사단의 장교와 특기병을 교육시킬 학교가 들어섰다. 미군과 필리핀 스카우트에서 파견된 조교가 사단, 연대 및 대대 참모, 중대장, 소대장, 선임 부사관, 취사병, 그리고 중대 행정병을 교육시켰다. 교육생은 특기 교육과 함께 기본적인 보병훈련도 받았다.


해안포 학교는 포트 밀스(코레히도르)와 포트 윈트(그란데 섬)에 들어섰다. 포트 스토첸버그 부근의 포트 다우에는 필리핀 포병을 위한 포병학교가 들어섰다. 두개의 공병학교가 세워져 필리핀 사단의 공병대인 제14공병연대(PS=필리핀 스카우트)에서 파견된 조교가 가르쳤다. 통신 및 의무 학교는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 만들어졌다. 두번째 의무학교가 만들어져 사단 소속이 아닌 의무병을 교육했다. 마닐라 항에는 운전병 학교가 들어섰다.


필리핀군의 훈련은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인과 필리핀인 뿐만 아니라 필리핀인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비사야에서 더욱 심했는데 장교는 대부분 영어나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를 쓰지만 비사야 출신 병사는 대부분 비사야어를 썼기 때문이었다. 임시 변통으로 통역을 훈련시켰지만 끝내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

필리핀군의 기강은 단속이 필요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필리핀군에는 군사재판이 없었으며 지휘관들은 군법 문제에 무지했다. 무리도 아닌 것이 선임 부사관과 중대 행정병 중에도 문맹이 있었다.

훈련장 상태도 열악했다. 부랴부랴 사격장을 만들었으나 동원된 병사 중 많은 숫자가 자신의 무기를 한번도 쏘아보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었다.


거의 모든 장비가 부족했다. 군복은 쉽게 떨어졌으나 재보급이 되지 않아 아무 옷이나 걸쳐야 했다. 천으로 만들고 고무로 밑창을 댄 신발 또한 쉽게 닳았다. 배낭, 담요, 모기장, 천막도 부족했다. 엔필드 및 스프링필드 소총은 정수를 맞추었으나 공용 화기는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야전삽, 방독면, 심지어 철모마저 모자랐다. 전쟁이 발발하자 사단은 부족한 보급품을 스스로 구해야 했으며 개별 사단의 장비 수준은 보급장교의 열정과 수완에 따라 결정되었다.


한 필리핀군 사단의 경험을 통하여 당시 필리핀군의 열악한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제31사단(PA=필리핀군)은 루손 잠발레스 주의 산 마르셀리노 부근에서 1941년 11월 18일에 창설되었다. 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대령은 미군으로 필리핀 사단의 제45보병연대(PS)를 지휘하다가 바기오로 가서 사단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블루멜 대령이 미군 및 필리핀 스카우트 장교로 이루어진 참모와 함께 11월 18일에 부임했을 때 막사는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으며 상수도가 없어서 우물을 파서 식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하수도 시설도 부족하여 사단은 하수도부터 만들어야 했다.


사단의 첫번째 연대인 제31보병연대(PA)는 블루멜 대령이 부임하기 이전인 9월 1일에 소집되어 막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일에 소집되었어야 할 두번째 연대인 제32보병연대는 12월 6일에야 사단에 합류했다. 세번째 연대인 제33보병연대가 오히려 일찍 도착하여 11월 25일에 사단에 합류했다. 11월 18일부터 30일 사이에 의무대대, 수송대, 근무부대, 사단본부중대가 만들어졌다. 통신중대는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서 3개월 간의 교육을 마친 통신병들이 사단에 도착한 12월 1일에 만들어졌다. 포병대인 제31야포연대는 전쟁이 터진 이후인 12월 12일에 동원이 시작되어 26일에야 완편 전력인 2개 대대를 갖추었는데 그때 사단은 이미 바탄반도에 들어온 이후였다.


제31사단은 다른 필리핀군 사단과 마찬가지로 장비가 열악했다. 모든 병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유물인 30구경 엔필드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체구가 작은 필리핀인 병사에게는 지나치게 길었다. 또한 탄피 배출기가 약하여 자주 부러졌는데 교체가 불가능했다. 다른 보병화기로는 보병중대마다 브라우닝 자동소총 1정이 있었고 기관총 중대는 30구경 브라우닝 수랭식 기관총 8정을 보유했다. 보병연대는 50구경 기관총 2정과 3인치 박격포 6문을 보유했는데 포탄의 70% 가 불발이었다. 12월 7일 저녁에 제1차 세계대전형 75mm 야포 8문이 도착했는데 조준기와 사격통제장치가 없는 상태였다. 결국 전쟁이 터진 후인 12월 12일부터 제31야포연대는 편제상의 6개 포대 대신 2개 포대만으로 사단을 지원할 수 있었다.


차량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단본부와 수송중대는 합쳐 승용차 1대, 지휘차 1대, 지프 1대, 1/2톤 트럭 1대, 그리고 1.5톤 트럭 1대를 가지고 있었다. 제31보병연대는 지휘차 1대와 1.5톤 트럭 8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3개 연대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사단에는 이외에도 통신장비, 공병장비, 사무용품, 예비부품, 그리고 공구가 모자랐다.


개인장비도 턱없이 모자랐다. 군복은 쉽게 떨어졌지만 재보급이 불가능했다. 천으로 만들고 고무로 밑창을 댄 신발은 약하여 2주면 다 떨어졌다. 운이 좋은 병사는 가죽구두를 구해 신고 다녔다. 사단에는 철모도 없었고 방독면도 없었다.


식량은 지휘관에게 지급되는 운영비로 시장에서 구입했다. 제31사단이 주둔한 잠발레스 주는 원래 식량 생산이 부족한데다가 바탄반도로 들어온 다른 부대들이 식량을 먼저 사는 바람에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단 전용의 철도역은 원래 12월 1일에 개통되어야 했으나 필리핀 장교인 보급참모의 경험부족으로 1주일 이상 늦어져 전쟁이 터진 이후에야 개통되었다. 


계획대로라면 사단은 첫번째 연대가 동원되었던 9월 1일부터 이미 훈련을 실시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블루멜 대령이 부임한 11월 18일까지 훈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격장이 없어서 블루멜 사단장이 수소문한 끝에 올롱가포 해군기지의 사격장을 빌려 11월 24일부터 소총 사격 연습을 실시했다. 제31보병연대의 첫번째 대대는 50발씩 사격했고 두번째 대대는 25발씩 사격했다. 세번째 대대가 사격하려 할 때 중국으로부터 철수한 제4해병연대가 올롱가포에 배치되면서 사격장을 비워줘야 했다. 제31사단은 새로운 사격장을 만들기로 했으나 공사 도중 전쟁이 터졌다. 따라서 제32연대와 제33연대는 동원 이후 사격훈련을 전혀 하지 못했다.


부하들과 이야기해 본 블루멜 사단장은 이전에 실시했던 6개월 간의 초기 훈련 과정이 매우 부실했음을 알았다. 병사들은 6개월의 초기 훈련 기간 동안 30구경 소총이나 30구경 기관총을 5발씩 쏘아 보았을 뿐이었으며 50구경 기관총이나 박격포를 사격해 본 병사는 없었다. 초기 훈련 과정의 부실함은 다른 사단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포병의 훈련 상황은 더 엉망이었다. 2개 포대가 만들어지자 시험삼아 2발씩 쏘았는데 대부분 발사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 75mm 야포의 발사 광경을 본 적도 없었다. 공병대대는 창설 이후 기지 내의 도로만 만들었을 뿐 다른 훈련은 받지 못했다. 통신중대는 포트 맥킨리에서 훈련을 받고 왔음에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필리핀인 장교인 통신중대장은 같은 기지 내에서 1.6km 떨어진 두 부대 사이의 무선연락망도 만들지 못했다.


필리핀인 장교는 대부분 전투에 대비해 부하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몰랐으며 일부는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부사관인 미군 및 필리핀 스카우트 출신 조교가 실질적으로 대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필리핀인 대대장들을 대부분 미군 장교로 교체해야 했다. 장교 수준이 이러니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블루멜 대령의 표현에 따르면 필리핀인 병사는 장교가 나타나면 크게 구령을 외치면서 경례하는 것과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 이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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