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리핀


필리핀은 7,6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만 남쪽으로부터 보르네오 북쪽까지 약 2,400km 에 걸쳐 있다.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80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필리핀은 일본, 중국,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잇는 지점을 점유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과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연결하는 항로를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을 기지로 하는 장거리 폭격기는 일본 및 중국해안을 폭격할 수 있으며 해군함정 또한 금방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필리핀.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1/Philippine_Sea_location.jpg)


필리핀은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마닐라와 호놀룰루 사이의 거리는 약 8,500km 이며 샌프란시스코와의 거리는 11,000km 에 달한다. 반면에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이 점유하고 있던 대만 남부 가오슝까지의 거리는 900km 에 지나지 않으며 도쿄까지의 거리도 3,000km 남짓하다. 홍콩까지의 거리는 약 1,100km, 싱가포르까지의 거리는 약 2,400km이다. 1920년대 이후로 필리핀과 미본토 사이에는 일본의 위임통치령인 마리아나 제도, 마셜 제도 및 캐롤라인 제도가 가로막고 있어서 전쟁시에는 적도 이남을 통하여 항해해야 했다.


필리핀의 육지 면적은 약 300,000㎢ 이다. 7,600개가 넘는 섬들 중 면적이 1 제곱마일(약 2.59㎢) 이 넘는 섬은 약 460개 뿐이며 1,000 제곱마일을 넘는 섬은 11개뿐이다.이 11개 섬의 면적이 전체 면적의 94% 를 차지한다. 가장 크고 중요한 섬은 북쪽의 루손 섬으로 면적이 109,960 ㎢ 이며 수도인 마닐라가 있다. 두번째로 큰 섬은 남쪽의 민다나오로서 면적이 104,630㎢ 이다. 민다나오 북쪽을 비사야라고 부르는데 중요한 섬은 사마르, 네그로스, 파나이, 레이테, 세부 등이다.

기후는 열대해양성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27도 정도이다. 6월에서 9월까지는 남서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동해안에 상륙하기 쉽다. 반면 10월에서 4월까지는 북동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남중국해에 면한 서해안에 상륙하기 쉽다.


(필리핀의 섬들. https://en.wikipedia.org/wiki/Outline_of_the_Philippines)


필리핀인은 말레이계로 1941년 당시 17,000,000 명 정도였다.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중부 루손과 세부였으며 가장 큰 도시는 마닐라로서 인구는 약 684,000명이었다.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중국인으로 약 117,000명이었다. 일본인은 30,000명 정도였는데 20,000명 이상이 남쪽 민다나오의 중심지인 다바오에 모여 살았다. 미국 민간인은 약 9,000명으로 대부분 루손에 살았다.


필리핀에서 쓰이는 사투리의 숫자는 60개 이상에 달했다. 미국이 40년간 통치하면서 영어를 열심히 보급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현재 영어 사용 인구는 27%에 불과했으며 스페인어 사용인구는 3%였다. 1937년에 중부 루손에서 많이 쓰는 타갈로그어를 국어로 정했으나 실제로는 비사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2배 정도 많았다. 이들 사투리들은 비슷한 점이 많았으나 다른 섬의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사투리 문제는 전국적으로 징병을 실시할 때 문제가 되었다. 어떤 섬에서 징병된 병사가 장교가 말하는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알아듣지 못하거나 다른 섬에서 징병된 병사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요 생산물은 주식인 쌀을 비롯하여 코프라, 사탕수수, 삼, 담배, 옥수수 등이었다. 산지에서는 구리, 금, 은, 철, 크롬, 망간, 납 등이 산출되었으나 구리를 제외하면 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전 국토의 60% 정도가 숲으로 덮여 있었는데 대부분 견목이었다. 마닐라 만과 술루 제도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혔으며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는 수산업이 중요한 산업이었다. 미국의 오랜 통치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은 거의 없었으며 기껏해야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다.


섬 사이나 해안의 교통을 주로 선박이 담당했기 때문에 도로나 철도의 필요성이 적었다. 1940년 현재 도로 연장은 2,300km 정도였는데 절반 가까운 1,130km 가 루손에 몰려 있었다. 자동차 숫자는 50,000 대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필리핀인들은 주로 물소가 끄는 수레에 짐을 싣거나 타고 다녔다. 철도 회사는 2개로서 국영 마닐라 철도회사가 루손에 400km, 미국인이 소유한 필리핀 철도회사가 파나이와 세부에 950km 의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는 협궤였다.


주요 도시는 전화 및 전보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이 소유한 필리핀 장거리전화회사가 마닐라와 루손의 주요 도시 및 파나이, 네그로스, 세부, 민다나오를 연결했다. 40개에 달하는 지방 정부들 또한 자체의 전화망으로 지역 내의 소도시들을 연결했다. 마닐라는 괌, 상하이 및 홍콩과 해저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4개의 국제라디오방송국이 바깥 세상과 소통했다.


북부 루손에는 북해안부터 남쪽으로 190km 에 걸쳐 평균 폭이 60km 인 평야가 북해안을 향하여 흐르는 카가얀 강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좌우는 산지로 막혀 있다. 중부 루손에도 마닐라 만부터 링가옌 만까지 190km 에 걸쳐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며 대규모 기동전에 적합하다. 북부 및 중부 루손의 해안에는 좁은 해안평야가 있으며 제한적인 기동만이 가능하다. 남부 루손에는 평지와 산지가 섞여 있으며 평탄한 해안을 가진 수많은 만이 있어 상륙작전에 적합하다.


루손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는 마닐라로 통하는 1,3,5번 도로이다. 2차선으로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며 수많은 지선 도로를 통해 마닐라와 루손의 다른 지역을 연결한다. 지선 도로는 대부분 1차선이었다.


(마닐라 만. 지도 출처 :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부속 지도)


마닐라 만은 극동 제일의 양항이었다. 20km 폭을 가진 만의 입구를 통과하면 너비는 50km 로 늘어난다. 입구를 마주보고 50km 떨어진 곳에 마닐라가 있다. 북쪽 입구에 있는 마리벨레스는 찾기 쉽고 좋은 정박지이며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 또한 훌륭한 정박지이다. 마닐라 만의 서쪽은 바탄 반도였는데 입구를 잠발레스 산맥이 막고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코레히도르 섬.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index.html P.471)


마닐라 만에는 몇개의 작은 섬이 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섬은 코레히도르로서 입구의 북쪽 끝에서 3.5km 떨어져 있으며 카발로 섬과 함께 마닐라 만의 입구를 북부와 남부 수로로 나눈다. 올챙이처럼 생긴 코레히도르 섬의 길이는 6.3k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2.3km 정도 된다. 코레히도르 섬의 꼬리에서 남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는 카발로 섬이 있는데 크기는 코레히도르 섬의 1/3 정도이다. 입구 남쪽에서 3.4km 떨어진 곳에는 높이 100 - 200m 의 바위섬인 엘 프라일이 있고 입구 남쪽 바로 바깥에는 카라바오 섬이 있다. 이 섬들은 필리핀 방어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리핀에는 67,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증거가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말레이 폴리네시아 어족이 와서 선주민인 네그리토인들을 산악지방으로 쫓아내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들어가기 전까지 통일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다. 서기 300년경부터 인도힌두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국과 자바의 마자파힛 왕국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중국 또한 주로 교역을 통하여 필리핀에 영향을 끼쳤으며 900년 경에는 중국과의 교역으로 부를 쌓은 톤도 왕국이 마닐라 부근에 출현했다. 14세기 후반부터는 이슬람교가 남부 지방에 영향을 끼쳤고 1450년 경에는 술루 제도에 이슬람교를 믿는 술루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도 루손 북해안의 아파리를 거점으로 필리핀과 교역했다.

유럽인으로 필리핀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1521년에 도착한 마젤란이었다. 그는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왕에게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했다. 마젤란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필리핀 남부를 공격하다가 반격을 받아 살해당하고 부하들은 필리핀을 떠났다.
1543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러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가 필리핀에 도착하여 사마르 섬과 레이테 섬에 필리페2세의 이름을 따서 '필리페의 섬'(Las Isla Filifinas)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필리핀의 어원이 되었다.
1565년에 스페인 사람인 미겔 로페스 드 레가스피가 5척의 배에 500명의 병력을 포함한 일단의 사람들을 데리고 세부 섬에 최초로 스페인 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은 1571년에 마닐라 왕국과 톤도 왕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도전을 물리치고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스페인도 필리핀 남부의 술루 왕국은 1898년에 미국에 필리핀을 잃을 때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필리핀에는 동양과 서양이 뒤섞인 독특한 관습과 제도가 자리잡았다. 이슬람 세력의 침투와 더불어 남쪽에는 이슬람적인 관습이 자리잡았다. 중국의 영향으로 교역과 상업이 자리잡았으며 중국인이 이 분야를 장악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지배를 거치면서 천주교, 유럽식 법체계, 그리고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말이 되자 스페인의 통치는 원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필리핀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미국이 미서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필리핀의 새 지배자가 되었다. 필리핀을 얻으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스페인에 대항하던 필리핀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제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과 맞섰다. 그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선출한 후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최대 12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01년에 아기날도를 체포하여 미국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선언을 이끌어 내면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다음해인 1902년에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완전히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3,500명과 20만명에 달하는 필리핀인이 희생되었다. 이제 미국은 1902년 7월에 통과된 필리핀 조직법에 따라 필리핀을 통치하는 한편 스페인이 제압하지 못한 술루 왕국을 공격하여 1915년에 멸망시킴으로서 필리핀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곧 필리핀을 식민지로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필리핀 조직법을 대신할 필리핀 자치법(존스법)이 1916년에 의회를 통과했다. 기존의 필리핀 조직법이 필리핀 의회의 하원만 선거로 선출하고 상원과 총독은 미국이 지명한데 비하여 존스법은 상원도 선거로 뽑음으로서 자치권을 늘리는 내용이었다. 또한 총독을 제외한 행정부 관료도 대부분 필리핀인을 뽑아 현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존스법에 따라 자치권이 늘어나면서 필리핀인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타이딩스-맥더피 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10년의 유예 기간을 거친 이후 필리핀을 완전히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35년 5월에 미국 헌법을 본딴 필리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9월에는 자유 선거를 치러 마누엘 케손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필리핀 자치령(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이 성립되었다. 필리핀 자치령과 미국이 해군기지 사용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인 결과 필리핀 독립은 2년 미루어져 1946년에 독립하기로 합의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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