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필리핀 증원(1) - 육군 및 육군항공대


미육군은 1941년 7월까지는 필리핀군의 훈련을 돕고 동원시 사단 및 연대 참모로 일할 400명의 장교를 파견하는 이외에 별도의 증원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8월에 들어서자 필리핀을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전쟁부가 방침을 바꾼 이유를 명확하게 나타낸 기록은 없지만 B-17 중폭격기와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B-17 폭격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한 전쟁부는 필리핀에 B-17 폭격기를 배치함으로써 일본을 억제하고 만일 침공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보잉 B-17 플라잉포트리스 중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Boeing_B-17_Flying_Fortress)


또다른 요인은 맥아더 장군의 현역 복귀였다. 전직 참모총장이자 미육군에서 극동 정세에 가장 밝은 맥아더 장군의 복귀는 사람들 마음에 필리핀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는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필리핀을 지킬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전쟁부의 분위기는 8월에 들어서자 필리핀을 포기하고 손실을 줄이자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필리핀을 방어하자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필리핀에 대한 증원 의도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드러낸 것은 전쟁계획국이 1941년 8월 14일에 제출한 보고서이다. 전쟁계획국장 지로 소장은 필리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공포, 신형 군용기, 그리고 전차라고 지적했다.

9월에 접어들자 필리핀 증원은 전쟁부의 우선순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전쟁부는 육군을 확장 및 훈련시키고 산업을 동원하며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고 육군항공대를 정비하는 와중에 최선을 다하여 필리핀에 증원 병력을 보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첫번째 증원선단이 9월 말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이때 도착한 부대는 3인치 대공포 12문, 37mm 대공포 24문, 50구경대공기관총 24정, 그리고 60인치 스페리 탐조등을 장비한 제200해안대공포연대(장교 76명, 부사관 및 병 1,681명), M-3 경전차 54대를 보유한 제194전차대대(장교 34명, 부사관 및 병 390명), 그리고 제17군수대대의 1개 중대(155명) 이었다. 10월 15일에는 경전차 54대를 장비한 제192전차대대와 75mm 자주포 25문이 도착했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11월 21일에 제192 및 제194전차대대와 제17기갑군수중대로 이루어진 임시전차단(Provisional Tank Group)을 만들고 제임스 위버 대령을 지휘관으로 삼았다.

물론 이것으로는 부족했으며 맥아더 장군은 1개 보병연대를 포함하여 추가 증원을 계속 요청했다.


(M-3 스튜어트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3_Stuart)


해안방어를 위하여 맥아더 장군은 155mm 야포 24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전쟁부는 1942년 4월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맥아더 장군은 12인치 열차포 4문, 8인치 열차포 4문, 155mm 야포 22문, 탐조등 30개를 추가로 요구했으나 이 요구사항은 12월 초에야 전쟁부에 도착했다.


필리핀군 사단을 위한 무기도 필요했다. 동원된 10개 필리핀군 사단을 위하여 75mm 야포 240문이 필요했으나 9월 말 현재 보유수량은 48문에 불과했다. 맥아더 장군은 사단용 이외에도 교육용 36문과 예비 60문을 합쳐 288문의 75mm 야포를 요청했다. 필리핀군 사단에게는 37mm 대전차포와 50구경 기관총도 필요했다.


이외에도 맥아더 장군이 요청한 무기와 장비는 상당했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8월에만 M1 개런드 소총 84,500정, 30구경 기관총 330정, 50구경 대공기관총 326정, 37mm 대전차포 450문, 81mm 박격포 217문, 75mm 야포 288문을 요구했다. 전쟁부는 9월 18일에 렌드리스 때문에 요청한 무기를 모두 공급하기는 어려우나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개런드 소총은 명확하게 거절했다. 물량이 딸려 해병대에도 주지 못하는 신형 소총을 필리핀에 줄 수는 없었다.


9월 10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철모 125,000개와 화학, 공병 및 통신장비를 요청했다. 한달 후 전쟁부는 요청을 받아들이고 철모를 즉시 보냈으나 현지에서 배급이 늦어져 많은 필리핀 병사들이 철모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다. 다른 장비는 선박을 물색하던 중에 전쟁이 터졌다.

9월 20일에 맥아더 장군은 2개 155mm 곡사포연대, 3개 105mm 곡사포연대, 1개 155mm 자주포 대대, 3개 대전차 대대, 그리고 근무, 통신, 의무부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250병상짜리 야전병원 10개를 차릴 수 있는 장비와 연대구호소용 장비 180세트도 요청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젔으나 선적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C 레이션 500,000식과 55갤런(208 리터)짜리 드럼통에 담긴 휘발유 1,000,000 갤런(약 380만 리터)은 도착했다. 휘발유는 바탄반도에 저장되어 필리핀 전역 동안 도움이 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증원 요청에 대하여 전쟁부는 1941년 11월 중순에 제34보병연대를 포함한 장교 1,312명, 간호사 25명, 부사관 및 병 18,047명과 전문 병과의 장교 200명, 부사관 및 병 2,968명으로 이루어진 육군 병력 22,552명의 증원을 결정했다. 이들의 선두는 12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선할 예정이었다.

무기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105mm 곡사포 40문, 75mm 야포 188문, 37mm 대전차포 35문, 그리고 30구경 기관총 123정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선적하기로 했다. 차량 또한 최대한 끌어모아 선박을 확보하는 대로 선적하기로 했다.


전쟁부는 동분서주한 끝에 11월 말부터 12월에 걸쳐 출항할 수 있는 수송선 9척을 확보했다. 여기에는 1개 경폭격 및 1개 중폭격비행전대, 1개 추격비행전대, 1개 정찰비행대대, 1개 보병연대, 1개 야포여단, 2개 경포대대, 그리고 지상 및 항공지원부대가 탈 것이었다. 마지막 수송선이 12월 20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예정이었다.


1941년 7월 현재 필리핀에 주둔한 미육군항공대는 약했다. 비행기 숫자는 210대에 지나지 않았고 31대의 P-41B  전투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구식기였다. 그때 미육군항공군단(U.S. Army Air Corps)에서 승격된 미육군항공대(U.S. Army Air Force) 사령관 헨리 아놀드 소장이 대담한 발언을 했다. 즉 필리핀에 주둔한 육군항공대에 합계 B-17 폭격기 272대와 68대의 예비기를 보유한 4개 중폭격비행전대와 각각 130대의 P-40 전투기를 보유한 2개 추격비행전대를 파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대담한 약속은 결국 지킬 수 없었으나 아놀드 장군은 최선을 다했다. 


50대의 P-40E 전투기가 공장에서 출고되자마자 바로 필리핀으로 떠나 10월 2일에 도착했으며 다른 부대에서 차출한 P-40B 전투기 28대도 9월 말까지 선적되었다.


B-17 폭격기는 스스로 날아서 필리핀까지 갔다.

1941년 9월 5일 아침에 B-17D 폭격기 9대와 승무원 75명으로 이루어진 제19중폭격비행전대 제14비행대대가 에멧 오도넬 소령의 지휘 아래 하와이의 히캄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들은 미드웨이, 웨이크, 포트모르즈비, 다윈을 거쳐 13,000km 가 넘는 거리를 비행한 끝에 9월 12일 오후에 마닐라 북쪽의 클라크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동안 지상요원들은 배를 타고 마닐라로 향했다. 추가로 26대의 B-17 폭격기가 11월 6일에 클라크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이제 필리핀의 B-17 은 35대가 되었다.

아놀드 장군은 12월에 33대, 1942년 1월에 51대, 그리고 2월에 46대를 추가로 보내어 3월까지 165대의 B-17 을 파견할 생각이었다. 같은 기간 B-17 및 B-24 의 생산 댓수가 220대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아놀드 장군이 자신의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폭격기의 증원도 시도되었다. 제27경폭격비행전대의 조종사와 지상요원들이 배를 타고 11월 20일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돈틀레스의 육군형인 A-24 경폭격기 52대를 실은 수송선 메이그는 도중에 하와이에 들렀다가 해군의 호위함이 준비된 11월 28일에 출항했으나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필리핀에는 35대의 B-17 폭격기와 81대의 P-40 전투기가 있었으며 52대의 A-24 경폭격기가 항해 중이었다. 또한 P-40 전투기 24대가 10월 19일에, 40대가 11월 9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스팀슨 전쟁장관에게 12월 31일까지 극동미육군항공대는 240대의 최신형 전투기를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전쟁부는 필리핀에 비행기를 증원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1941년 12월 1일 당시 미본토 밖에 배치되어 있던 미육군항공대 소속 비행기는 총 913대로 중폭격기 61대, 중형폭격기 157대, 경폭격기 59대, 전투기 636대였는데 필리핀에 중폭격기 절반 이상과 전투기 1/6 이 모여 있었으며 급격히 증강될 예정이었다.


 

(1941년 12월 1일 현재 필리핀과 하와이의 비행기 보유 현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html#3-2)


비행기의 증원과 함께 필리핀 주둔 육군항공대의 지휘관도 바뀌었다. 제3항공대사령관이던 루이스 브레러튼 소장이 11월 3일에 필리핀에 도착하여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이 되었다.

마닐라의 니엘슨 비행장에 사령부를 둔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유진 유뱅크 중령의 제5폭격사령부, 헨리 클라겟 준장의 제5요격사령부, 그리고 처칠 대령의 극동항공지원사령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5폭격사령부의 중추는 35대의 B-17 폭격기를 보유한 제19중폭격비행전대로 제14, 제28, 제30 및 제93비행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52대의 A-24 경폭격기를 운용할 제27경폭격비행전대도 편성되었으나 정작 비행기들은 수송선에 실려 바다를 건너는 중이었으며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제5요격사령부의 중추는 제3, 제17, 제20추격비행대대로 이루어진 제24추격비행전대였다. 11월에 본토에 주둔 중이던 제35추격비행전대 소속의 제21 및 제34추격비행대대가 필리핀으로 와서 임시로 제24추격비행전대에 소속되었는데 제35추격비행전대는 끝내 옮겨오지 않았다. 추격비행대대 중 델 카르멘 비행장에 전개한 제34비행대대를 제외한 4개 비행대대는 11월 말까지 모두 신형인 P-40 전투기를 장비했다.


(커티스 P-40 워호크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Curtiss_P-40_Warhawk)


비행장 정비도 실시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를 위하여 8월에 2,273,000달러, 10월에 7,000,000 달러의 예산을 받았다. 이 예산은 대부분 루손에 자리잡은 6개의 비행장을 정비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클라크 비행장이 일본기의 공습 거리 내에 있었으므로 세부에 B-17 을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기로 했다.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예산의 일부를 얻어 세부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민다나오의 델 몬테 농장에 있는 활주로를 정비하여 B-17 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임시 비행장을 만들기로 하고 11월 중순에 맥아더 장군의 허가를 받았다. 즉시 제20비행장전대가 민다나오로 파견되어 밤낮없이 일했으나 충분한 시설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12월 초가 되자 델 몬테 비행장은 필리핀에 전개 중인 B-17폭격기 35대 모두를 수용할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제7폭격비행전대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만일 델 몬테 비행장에 B-17폭격기 35대를 모두 옮겨오면 새로 도착할 제7폭격비행전대의 B-17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결국 브레러튼 소장은 12월 5일에 2개 비행대대 16대만 클라크 비행장으로부터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겼다. 수송기 역할을 한 B-18 폭격기 몇 대도 따라갔다. 

훗날 서덜랜드는 브레러튼이 B-17 을 모두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기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고도 절반만 옮기는 바람에 나머지 B-17 이 클라크 비행장에 남아 있다가 일본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케니 장군도 동조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브레러튼은 애당초 B-17 을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긴다는 것은 극동미육군항공대의 발상이었으며 오히려 서덜랜드 참모장은 델 몬테 비행장으로 이동한 B-17 이 세부 및 루손 비행장의 정비가 끝나는대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이동을 허가했다고 반박했다.


대공경보체계는 미흡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필리핀에는 레이더 7세트가 있었으나 인력 부족으로 실제로 가동한 것은 이바 비행장과 마닐라 외곽에 설치한 2세트 뿐이었다. 미본토에서 부랴부랴 필리핀에 보낼 제557대공경보대대를 만들었으나 이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2월 6일로 너무 늦었다.

레이더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원시적 대공경보망을 조직했다. 주로 눈이 밝고 귀가 예민한 필리핀인을 교육시켜 루손의 중요 지점에 배치했다. 이들이 접근하는 적기를 발견하고 즉시 전화나 전보로 니엘스 비행장에 있는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부로 보고하면 사령부에서 텔레타이프를 통해 클라크 비행장에 경보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대공방어의 또다른 축인 대공포 세력 또한 충분하지 못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 창설 당시 대공포 세력은 필리핀 해안포 사령부 소속의 제60해안대공포연대 뿐이었다. 연대 주력은 마닐라 만의 4개 섬(코레히도르, 엘 프라일, 카발로, 카라바오)과 바탄 반도 남단에 배치되어 마닐라 만 상공을 지켰다. 1개 대공포대와 1개 탐조등 소대는 수빅 만의 포트 윈트에 배치되었다. 9월 말에 도착한 제200해안대공포연대는 포트 스토첸버그에 배치되어 클라크 비행장을 지켰다. 필리핀에 배치된 3인치 대공포는 구형으로 고도 5,100m 까지만 사격이 가능했다.


따라서 필리핀 전체에서 대공포가 지키는 공역은 마닐라 만 상공과 클라크 비행장 뿐이었다. 11월 말에 전쟁부에서는 2개 대공포여단과 3개 대공포연대를 필리핀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다급해진 극동미육군사령부는 11월 29일에 제59해안포연대(US = 미군)의 1개 포대와 제91해안포연대(PS)의 2개 포대를 대공임무로 돌렸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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