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본의 계획
1941년 7월 26일에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하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뒤따르자 일본은 굴복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느냐 아니면 석유가 나는 극동의 영국 및 네덜란드 영토를 무력으로 탈취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두번째 길을 택할 경우 일본의 전략가들은 미국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참전할 것으로 보았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일본이 남쪽으로 진출할 경우 배후의 위협이 사라진 상태였으므로 일본은 두번째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극동에서라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미국이었는데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고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미국의 우위가 전장에서 발휘되기 전에 남방지대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일본 대본영은 대략 6개월 간의 작업을 거쳐 1941년 11월 초에 남방작전 계획을 만들었으며 이후로는 작은 수정만이 가해졌다. 남방작전에서 일본의 목표는 말레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계획과 1941년 11월 현재 병력 배치.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4.html#4-1 P.53)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고 괌과 웨이크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끊은 다음 필리핀을 점령할 것이었다. 남방 지대를 차지한 다음에는 주변에 비행장을 짓고 항공기를 배치하며 강력한 항모기동부대를 전략 예비대로 활용하여 방어선에 접근하는 미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새로 얻은 지역 및 일본 본토와의 교통로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이럴 경우 일본의 방어선은 북쪽의 쿠릴열도에서 시작하여 웨이크 , 마셜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뉴기니,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버마를 거쳐 중국의 일본군 점령지로 이어질 것이었다. 백악관에 일장기를 꽂을 생각은 없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일본의 계획은 남방 자원 지대를 차지한 상태에서 협상을 통하여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일본은 여러 곳을 동시에 공격할 것이었다.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말레이 상륙작전이 실시될 것이었다. 그 직후 필리핀의 미군비행장에 대한 공습이 실시되고 필리핀 상륙이 뒤따를 것이었다. 태국은 '안정화' 시킬 것이었다. 홍콩과 웨이크 및 괌도 공격할 것이었으며 웨이크와 괌을 공격한 부대는 비스마르크 제도를 장악할 것이었다. 이어서 제2단계가 시작되어 싱가포르가 함락되면 수마트라를 공격하고 최종적으로 자바를 점령할 것이었다.
1941년 12월 1일 현재 일본육군은 51개 사단, 1개 기병집단, 59개 여단급 부대, 그리고 151개 비행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본토에는 별도로 유수사단 10개가 있었다. 이러한 병력들은 만주, 중국, 한국, 대만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남방작전에 투입될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1941년 12월 1일 현재 일본육군의 편제 및 분포.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55)
남방작전을 담당할 남방군은 1941년 11월 6일에 설립되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이 지휘하는 남방군 휘하에는 제14, 제15, 제16 및 제25군이 소속되었으며 병력은 사단 10개와 혼성여단 3개였다. 제14군이 필리핀, 제15군이 태국, 제16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제25군이 말레이를 맡았다. 필리핀을 맡은 제14군은 제16 및 제48사단과 제65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제5비행집단의 지원을 받았다.
11월 10일부터 남방군의 고위 지휘관들이 모여 세부 사항을 다듬었으며 20일에 남방군은 개전 날짜를 제외한 작전 명령을 발령했다. 필리핀 작전의 세부 사항을 결정하기 위하여 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제5비행집단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 제3함대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 해군중장, 그리고 제11항공함대사령장관 츠카하라 니시조 해군중장이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혼슈 남단의 이와쿠니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필리핀 침공은 개전 당일 제5비행집단과 제11항공함대가 필리핀의 미군비행장을 공습하면서 시작될 것이었다. 동시에 해군과 육군의 선발대가 루손 북쪽 해상의 바탄 섬, 루손의 아파리, 비간, 레가스피, 그리고 민다나오의 다바오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을 점령할 것이었다. 비행장을 확보하면 즉시 비행기들이 이동하여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미군의 항공력과 해군력을 공격할 것이었다. 필리핀의 미군 항공력을 제거하면 제14군의 주공이 마닐라 북쪽의 링가옌 만에, 조공이 마닐라 남동쪽의 라몬 만에 상륙하여 마닐라로 진공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마닐라 인근에서 결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았다. 이 결전에서 승리하면 마닐라를 점령하고 마닐라 만의 섬들을 점령한 후 루손 전역을 점령할 것이었다. 대본영과 남방군은 루손 전투에 50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이후에는 제14군의 1개 사단이 지원부대 및 항공대 대부분과 함께 필리핀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고 제14군은 남은 전력으로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제14군은 전차의 존재를 포함하여 미군과 필리핀군의 전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나 방어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들은 미군과 필리핀군이 마닐라에 모여 일본군과 결전을 벌일 것으로 보았다.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이 1941년 10월에 열린 회의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이 바탄 반도로 철수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무시당했다.
제14군이 받은 사단은 제16 및 제48사단이었으며 전차연대 2개, 중형포 연대 2개와 대대 1개, 공병연대 3개, 대공포연대 5개, 그리고 다수의 지원부대가 공격을 지원할 것이었다. 일단 루손을 점령하면 제48사단은 항공병력 대부분 및 다수의 지원부대와 함께 필리핀을 떠날 것이었다. 대신 제65여단이 상륙하여 루손의 소탕 및 경비임무를 맡고 제16사단은 남쪽의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필리핀 공격은 약 550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제5비행집단 및 제11항공함대가 개전 당일 루손의 미군 비행장을 공습하면서 시작될 것이었다. 기습을 위하여 비행장에 대한 사전정찰은 없을 것이었다.
해군과 육군 사이의 협약에 따라 항속거리가 짧은 육군기가 북위 16도 이북을 공격하고 해군기가 남쪽을 공격할 것이었다. 따라서 클라크 비행장과 마닐라 근교의 비행장 및 카비테 군항 등 중요한 목표는 해군기가 공격하게 되었다. 또한 팔라우를 출발한 제4항공전대가 다바오와 레가스피 상륙을 엄호할 것이었다.
선발대가 상륙하여 비행장을 확보하면 육군기들이 아파리, 비간, 라오아그에 전개하고 해군기들은 레가스피와 다바오에 전개할 것이었다. 제5비행집단의 주력은 중폭격기의 운용이 가능하다고 잘못 알고 있던 아파리에 전개할 것이었다. 육군기의 이동은 개전 1주일 내로 완료할 것이었다. 그동안 다카하시 중장의 제3함대는 수송선단을 보호하고 대만과 필리핀 근해에서 대잠작전을 실시할 것이었다.
제3함대는 수송선단과 호위하는 순양함 및 구축함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상륙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보호하고 상륙작전을 지원하는 것이 임무였다. 기습을 위하여 상륙준비포격은 실시하지 않을 것이었다.
선발대의 상륙을 위하여 제3함대는 분산되었다. 바탄 섬에 상륙하는 제3급습대는 구축함 1척, 수뢰정 4척, 그리고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졌다. 아파리에 상륙하는 제1급습대는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졌다. 비간에 상륙하는 제2급습대는 경순양함 1척, 구축함7척,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졌다. 레가스피에 상륙하는 제4급습대는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및 기타 함정으로 이루어졌으며 경항모 류조와 수상기모함 치토세 및 미즈호의 항공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제14군 주력의 상륙에는 전함 2척(공고,하루나)과 중순양함 2척(아타고, 다카오), 그리고 제4, 제5 및 제8구축대로 이루어진 곤도 노부다케 중장의 제2함대도 참가할 것이었다.
1941년 11월 초부터 필리핀 침공에 참가할 부대들은 출발지로 이동했다. 만주에 주둔하던 제5비행집단은 11월 말까지 대만 남부로 이동을 마쳤다. 11월 23일에는 선견부대 2개가 가오슝에서 승선하여 펑후 제도로 이동했다. 11월 27일에서 12월 6일에 걸쳐 제48사단이 펑후 제도, 가오슝, 그리고 지룽에 집결했다. 11월 20일에는 제16사단의 선두가 나고야를 떠나 팔라우로 향했으며 닷새 후에는 주력이 나고야를 떠나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에 집결했다. 대만 남부 가오슝에 사령부를 차린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12월 1일에 대본영으로부터 12월 8일(도쿄 시간)에 작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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