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방어 계획
맥아더 장군이 극동미육군사령관이 되기 전까지 필리핀의 방어계획은 미육해군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1941년 3월에 개정한 오렌지전쟁계획-3(War Plan Orange-3 = WPO-3)이었다. 오렌지 계획은 일본이 선전포고없이 경고 48시간 이내에 공격을 가하며 미본토에서 당분간 증원이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했다. 따라서 초기 전투는 기존의 필리핀 주둔 미군과 필리핀군만으로 치러야 했다.
필리핀 군관구는 1940년 7월 1일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일본이 필리핀 공격에 강력한 항공력과 함대의 지원을 받는 병력 100,000명을 투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사전 경고를 받지 못할 것이며 일본군은 필리핀의 지형을 익혀둔 상태에서 30,000명에 달하는 필리핀 거주 일본민간인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주요 목표는 루손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일본군은 주력의 상륙에 앞서 선발대를 여럿 상륙시켜 비행장을 탈취할 것으로 보았으며 주력 상륙시에는 제2차 상륙이나 양동작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일본기들은 전투 초기에 탈취한 루손의 비행장으로 옮겨와서 필리핀의 미군항공력을 제거하고 군사목표를 폭격하려 할 것이었다.
오렌지 계획에 따르면 필리핀 수비대의 목표는 일본이 마닐라 만을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오래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하여 미군과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되 실패하면 바탄반도로 들어가 농성할 것이었다. 필리핀 수비대는 중부 루손에서만 싸울 것이었으며 필리핀 제도 전체를 지킬 생각은 없었다.
오렌지 계획은 루손을 6개 지구로 나누었다. 필리핀 유일의 미군 사단인 필리핀 사단장은 바탄 반도 전투를 지휘할 것이었다. 극동미육군항공대의 전신인 제4혼성비행전대가 항공지원을 맡아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하고 지상전투를 지원할 것이었다. 오렌지 계획은 제4혼성비행전대와 필리핀육군항공군단의 증강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 해군은 마닐라 만과 수빅 만의 입구를 지키는데 주력할 것이었다.
포트 스토첸버그, 포트 윌리엄 맥킨리, 타를락, 샌 페르난도, 그리고 마닐라 등지에 보관 중인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은 초기에 루손의 6개 지구에 공급되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바탄반도로 옮겨야 했다. 바탄반도로 옮겨야 할 식량은 40,000명이 180일 동안 먹을 양이었으며 궁극적으로 필리핀 군관구가 가진 모든 보급품을 바탄반도로 옮길 것이었다. 군대가 보유한 차량이 부족했으므로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하여 루손 전역의 버스와 4,000대에 달하는 민간인 트럭을 징발할 것이었다.
필리핀 수비대가 바탄반도에서 농성하는 6개월 이내에 미태평양함대는 일본연합함대를 쳐부수고 증원 병력 및 보급품과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이후 강화된 필리핀 수비대는 반격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바다로 밀어넣을 것이었다.
1941년 4월부터 미군 수뇌부는 오렌지 계획이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군은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필리핀은 봉쇄될 것이며 태평양함대는 2년 후에야 필리핀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해군의 예상은 너무 낙관적이었다. 실제로 미군이 루손에 돌아간 것은 개전 이후 3년이 지나서였다. 오렌지 계획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7월 말에 극동미육군 사령관이 되자 오렌지 계획을 거부했다. 낙관주의자인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부하와 필리핀 국민을 신뢰했다. 그는 필리핀 수비대가 바탄반도에 틀어박히는 대신 침공해오는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 필리핀 전체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일단 침공을 좌절시키고 나면 필리핀은 다수의 B-17 을 날려서 남중국해를 통한 일본과 남방지대 사이의 교통을 봉쇄하는 요새가 될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실전 배치가 시작된 B-17 에 대한 과대평가와 맞물려 전쟁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전쟁부는 기존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1941년 8월부터 적극적으로 필리핀에 증원 병력과 함께 비행기를 비롯한 장비와 물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 육해군합동위원회는 생각이 달랐다. 1941년 9월에 합동위원회가 만든 레인보우5 계획의 사본을 전달받은 맥아더 장군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독일 및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게 될 경우 독일을 먼저 타도한다는 독일우선주의를 채택한 레인보우 계획의 필리핀 부분은 오렌지 계획을 차용했으며 암암리에 필리핀 포기를 전제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10월 1일에 전쟁부로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짧은 시간 내에 강력한 항공지원을 받는 11개 사단과 군단 및 군 사령부, 지원부대로 이루어진 200,000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될 것이며 이정도 병력이면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필리핀 전체를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이 맥아더를 지지하자 결국 합동위원회가 물러섰다. 합동위원회는 11월 21일에 레인보우 계획에서 필리핀 수비대의 목표를 마닐라만 방어에서 필리핀 제도 전체를 방어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자신이 방어계획이 받아들여지자 맥아더 장군은 1941년 11월 초에 결정해 두었던 방어구역을 12월 3일에 확정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을 4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1941년 12월 8일 현재 극동미육군 배치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4.html#4-2)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이 지휘하는 북부루손군(Nothern Luzon Force) 구역에는 중부 평원, 링가옌 만, 잠발레스 해안 및 바탄반도 등 루손의 요충지가 대부분 포함되었다. 북부루손군의 임무는 비행장을 지키고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 상륙을 허용했을 경우 오렌지 계획과 달리 바탄반도로 후퇴하지 않고 해안에서 결전을 치를 것이었다. 따라서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는 초소를 배치했으며 해안에서 4시간 거리에 집결지를 설정했다. 북부루손군은 3개 필리핀군 사단(제11, 제21 및 제31사단), 제26기병연대(PS), 그리고 바탄반도에 주둔한 제45보병연대(PS)의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55mm 평사포 2개 포대와 75mm 산포 1개 포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71사단(PA)은 북부루손군 소속이기는 했으나 맥아더 장군의 허락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조지 파커 준장이 지휘하는 남부루손군(Southern Luzon Force)은 마닐라의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방어했다. 파커 준장의 임무도 비행장을 보호하고 상륙을 저지하며 만일 상륙하면 해안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남부루손군의 규모는 북부루손군보다 작아서 2개 필리핀군 사단(제41 및 제51사단)과 야포 1개 포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윌리엄 샤프 준장이 지휘하는 비사야-민다나오군(Visayan-Mindanao Force)은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을 방어했다. 샤프 준장의 주요 임무는 비사야의 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상륙을 막되 일본군이 상륙했을 경우 해안에서 결전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민다나오의 델 몬테에 만들어진 임시 비행장에 1개 대대를 보내어 보호하는 것도 샤프 준장의 임무였다. 비사야-민다나오군에는 사령부를 제외하면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가 없었으며 3개 필리핀군 사단(제61, 제81 및 제101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부와 남부루손군 사이에는 마닐라와 그 북쪽을 포함하는 예비 지대가 설정되어 극동미육군사령부가 직접 통제했다. 예비 지대에는 필리핀사단(1개 대대 감편), 제91사단(PA), 제86야포연대(PS), 극동항공대, 그리고 필리핀 군관구 및 필리핀군 사령부가 있었다.
마닐라 만과 수빅 만 입구는 무어 장군이 지휘하는 해안방어부대가 담당했으며 필리핀해안포 사령부도 가세했다.
개전 당시 미군과 12,000명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스카우트의 상태는 양호했다. 문제는 주력을 맡아야 할 필리핀군의 상태였다.
(1941년 12월 3일 현재 극동미육군 배정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4.html#4-2 P.70)
P.70)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주로 루손의 방어를 담당했다. B-17 폭격기 35대는 마닐라 북쪽의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했으나 12월 5일에 16대는 B-18 폭격기 몇 대와 함께 민다나오의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겼다.
(세베르스키 P-35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Seversky_P-35)
전투기는 주로 루손의 비행장에 흩어져 주둔했다. 클라크 비행장에는 P-40B 전투기 18대를 가진 제20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으며 마닐라 남쪽의 니콜스 비행장에는 각각 P-40E 전투기 18대를 가진 제17 및 제21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다. 클라크 비행장의 서쪽인 이바 비행장에는 P-40E 전투기 18대를 보유한 제3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으며 클라크 비행장의 남쪽인 델 카르멘 비행장에는 구형 P-35전투기 18대를 보유한 제34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다. 루손 남쪽의 바탕가스 비행장에는 고색창연한 P-26전투기 12대를 보유한 필리핀 항공대가 주둔했다.
나머지 구형기들은 대부분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했다.
(보잉 P-26 피슈터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Boeing_P-26_Peashooter)
(루손의 미국 비행장.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AAF-I-6.html P.202)
1941년 11월 말이 되자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11월 24일에 태평양 및 아시아 함대 사령관은 해군부로부터 일본과의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낮으며 일본군이 필리핀과 괌을 포함한 어디서든 기습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3일 후인 27일에는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맥아더 장군과 하와이의 쇼트 중장에게 최종 경고라는 말이 들어간 전문을 보냈다. 마셜 장군은 일본과의 협상은 사실상 끝났으며 일본군이 언제든 기습공격을 가할 수 있으니 정찰강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조치 내용을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해군부도 태평양의 해군지휘관들에게 전쟁경고라는 단어가 들어간 전문을 보내어 며칠 내로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니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11월 27일의 전문을 받은 직후 맥아더 장군, 하트 제독, 고등판무관 프랜시스 사이어, 그리고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 케손이 모여 회의를 했다. 케손 대통령은 자치령의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다음날 마셜 장군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맥아더 장군은 육군과 해군이 협조하여 정찰을 강화하고 전투에 대비하고 있다고 적었다.
12월이 되자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미군 정찰기가 말레이로 향하는 일본선단을 발견했으며 루손 상공에 정체불명의 항공기가 출몰했다. 12월 5일에 영국극동함대 사령관 톰 필립스 해군대장이 마닐라로 날아와 하트 제독 및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다. 이튿날 일본선단이 타이 만을 서진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필립스 제독은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1941년 12월 6일 토요일에 맥아더 장군은 해안방어지대에 병력을 배치하라는 명령을 북부루손군에 내렸으며 파괴활동에 대비하여 비행기의 경비를 강화했다.
12월 7일 일요일(하와이는 12월 6일 토요일)은 긴장되기는 했으나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제27폭격비행전대는 마닐라 호텔에서 파티를 열었다. 브레러튼 장군은 리처드 서덜랜드 준장 및 하트 제독의 참모장인 윌리엄 퍼넬 해군소장과 같은 테이블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퍼넬은 길어야 며칠 어쩌면 몇 시간 내로 발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후 하트 제독의 부름을 받고 테이블을 떠났다. 서덜랜드도 전쟁부와 해군부는 전쟁이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브레러튼은 자신의 참모장을 불러 12월 8일 월요일 아침을 기해 전투경계태세를 발령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필리핀의 미군 중 12월 7일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잠자리에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도 별다른 뉴스는 없었다. 포트 스토첸버그에서는 제194전차대대장 어니스트 밀러 중령이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콘체르토 B 플랫 마이너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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