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필리핀군 건설


필리핀 자치령이 성립하기 전까지 필리핀의 방어는 미국이 전담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약 10,000명으로 절반은 미군이고 절반은 필리핀 스카우트(Philippine Scouts)였다. 필리핀 스카우트는 미군의 일부로 장교는 대부분 미국인이고 부사관 및 병은 필리핀인이었다. 1913년부터 필리핀 수비대는 필리핀 군관구(Philippine Department)로 불렸으며 미군 장성의 지휘를 받았다. 1901년에 창설된 필리핀 경찰대(Philippine Constabulary)는 이름과 달리 군대식으로 편성되고 훈련받았다.


1935년에 필리핀 자치령이 성립하자 필리핀 국군 건설이 과제로 떠올랐다. 국군 건설을 위해서는 군사 및 운영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필요했는데 필리핀인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자치령의 대통령 마누엘 케손은 자신의 친구이자 미육군 참모총장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자치령 정부가 국군을 건설할 수 있도록 군사고문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허락하자 맥아더는 1935년 10월에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마치고 미육군 소장의 신분으로 필리핀에 부임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MacArthur#Field_Marshal_of_the_Philippine_Army)


필리핀에서 맥아더가 맡은 직책의 정식 명칭은 '자치령정부 군사고문'(Military Advisor to the Commonwealth Government)이었으며 그 임무는 '국방체계를 형성 및 발전시키는 것' 이었다. 이 임무를 위하여 맥아더에게 주어진 권한은 광범위했다. 필리핀 원수의 계급을 받은 맥아더는 자치령의 전쟁부와 참모본부를 직접 통제했으며 미군 소속으로 맥아더의 권한을 벗어나 있던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 루시우스 홀브룩 소장도 본국으로부터 최대한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맥아더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소령과 제임스 오드 소령에게 실무를 맡겼다. 두 사람은 미육군대학의 지원을 받아 독립이 예정된 1946년까지 필리핀 자치령의 방어태세를 확립할 계획을 작성했다.

계획에 따르면 정규군은 소규모로 유지할 것이었다. 대신 매년 일정 병력을 징병하여 6개월간 훈련시킨 다음 예비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1년에 두번씩 예비군을 배출하여 방대한 예비전력을 갖춘다는 것이었다. 항공대는 소규모가 될 것이며 함대 또한 어뢰정 중심으로 적의 상륙을 물리칠 정도면 족할 것이었다. 사단의 정원은 7,500명이며 장비는 경제사정과 지형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갖출 것이었다. 


맥아더의 참모진은 소규모였다. 아이젠하워와 오드에 더하여 맥아더는 마닐라에 도착하자 필리핀 군관구에서 장교 4명을 차출했으며 해군참모로 예비역 해군장교인 시드니 허프를 기용했다. 1938년에 오드 대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리처드 서덜랜드 중령을 뽑았고, 다음해 아이젠하워 중령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리처드 마셜 중령을 받아들였다. 1937년 10월에 휴이 케이시 대위가 공병참모가 되었고 나중에 윌리엄 마쾃 소령이 대공참모가 되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 장군과 함께 했다.


필리핀 국회(Philippine National Assembly)는 1935년 12월 21일에 맥아더가 제출한 계획을 기반으로 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정규군은 6,000명의 필리핀 경찰대를 주축으로 한 10,000명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경찰대는 1938년에 군대에서 분리되었다가 1941년 말에 다시 군대에 흡수된다. 21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은 모두 징병 대상이었으며 이들은 6개월의 훈련을 거친 후 예비군에 편입될 것이었다. 한번에 2만명씩 1년에 2번 훈련을 실시하여 매년 4만명의 예비군을 배출함으로써 독립이 예정된 1946년까지 40만명의 예비군을 확보한다는 방침이었다. 초급 장교의 훈련을 위하여 루손의 바기오에 웨스트포인트를 본딴 사관학교를 만들어 매년 100명의 장교를 배출할 계획이었다.


자치령은 비슷한 인구를 가진 10개의 군관구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군관구마다 예비사단 1개씩을 배치하고 독립할 때까지는 3개씩 배치할 계획이었다. 루손과 인접한 민도로, 팔라완, 그리고 마스바테를 합쳐 5개 군관구가 설치되었다. 비사야에 4개 군관구가 만들어졌으며 민다나오와 술루제도를 합쳐 1개 군관구가 되었다.

군관구 사령관은 평시에 훈련과 방어준비를 책임졌으며 전시에는 군관구를 방어했다. 주지사들은 징병과 동원을 도와야 했다. 이론상 군관구 사령관이 해당 군관구의 방어를 책임졌지만 실제로 주요 섬(루손, 세부, 네그로스, 파나이, 레이테, 민다나오, 보홀, 민도로 등)에 대한 방어계획은 맥아더의 군사고문실(Office of Military Advisor)에서 작성했다.

국방법은 미국보다 더 긴 필리핀의 해안방어를 위하여 별도의 해군을 창설하지 않고 육군 소속의 연안경비대(Off Shore Patrol)을 만들었다. 이들이 사용할 어뢰정 36척은 1946년까지 영국에서 도입할 계획이었다. 어뢰정은 길이 20m, 폭 4m 로서 12기통 엔진 3개를 장착하여 41노트를 낼 수 있었다. 무장은 어뢰 2발, 폭뢰, 그리고 대공기관총이었다.

국방법은 또한 연안방어를 위하여 1946년까지 고속폭격기 100대와 전투기 및 지원기들로 이루어진 항공대를 만들 계획이었다.


맥아더가 1936년의 연설에서 밝힌 자치령 방어의 핵심 개념은 적이 필리핀을 점령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의 방어력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열강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

필리핀은 방어에 유리했다. 국토가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대군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어려웠다. 내륙은 교통이 불편하고 산지가 많았으며 해안 평야는 좁았다.

맥아더는 필리핀에 강력한 함대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강력한 함대는 바다 건너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으며 식민지가 없는 필리핀의 함대는 적의 상륙과 해상보급을 저지하면 충분했다. 적절한 항공지원을 받는다면 어뢰정 중심의 소규모 함대로도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1946년이 되면 필리핀이 충분한 방어력을 가지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필리핀 국군의 성장은 느렸다.

1936년은 필리핀 경찰대가 주축이 되어 훈련소를 만들고 기간요원을 육성하고 조교를 훈련시키면서 보냈다.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은 필리핀 스카우트를 조교로 제공했으며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평가하고 행정업무를 조직하기 위하여 미군 장교를 파견했다. 1936년 말이 되자 조교의 훈련과 훈련소 건설이 끝났다.

1937년 1월 1일에 2만명이 입소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말까지 장교 4,800명과 부사관 및 병 104,000명이 훈련을 마치고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보병훈련은 필리핀 각지에 흩어진 훈련소에서 실시했다. 야포훈련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앙헬레스 부근의 포트 스토첸버그에서 실시했다. 해안포 훈련은 코레히도르 섬에서 파견나온 장교의 지휘 아래 포트 스토첸버그나 수빅만의 그란데섬에서 실시했다. 전문적인 훈련은 마닐라 남쪽의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서 실시했다.


필리핀 국군의 건설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유능한 장교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필리핀 경찰대의 장교들은 우수하고 경험이 풍부했으나 훈련보다는 치안에 관심이 많았다. 가장 뛰어난 장교 중 일부는 필리핀 스카우트에서 왔으며 이들은 고위장교가 되었다.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훈련소와 예비역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할 다수의 초급장교였다. 바기오에 설립된 사관학교에서 장교가 나오려면 4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숫자도 턱없이 모자랐다. 필리핀군 수뇌부는 징집병에게 눈길을 돌렸다.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병사 중에서 우수한 자를 모아 6개월의 추가 훈련을 거쳐 부사관으로 삼았으며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장교후보학교(Officer Candidate School)에서 교육시켜 소위로 임관했다. 일부 장교는 대학에 설립한 학생군사교육단(ROTC)을 통하여 충원했다.


항공대 정비도 예정보다 늦어졌다. 마닐라 외곽에 필리핀군의 항공기지가 건설되고 3대의 훈련기를 도입하여 훈련이 시작되었다. 1940년 말이 되었을때 항공대는 약 40대의 비행기와 100여명의 조종사를 보유했다.


함대의 정비는 가장 부진했다. 2척의 어뢰정을 인수한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이 수출을 중단했다. 자치령 정부는 엔진은 제3국에서 수입하고 선체는 스스로 만드는 방식으로 어뢰정을 건조했으나 1941년 말까지 1척을 완성하는데 그쳤다. 어뢰정 3척으로 강력한 함대를 가진 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한 적을 막으려면 역시 강력한 함대를 가진 나라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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