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공권 및 제해권 상실


레인보우5 계획에 따르면 아시아함대의 임무는 육군과 협력하여 필리핀 방어를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었다. 아시아함대 사령관은 필요할 경우 함대를 영국이나 네덜란드 기지로 철수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아시아함대의 세력은 북부 루손부터 보르네오까지 2,400km 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다. 마닐라 만에는 구축함 5척(포프, 존 포드, 폴 존스, 피어리, 필즈베리)가 있었는데 피어리와 필즈베리는 오버홀 중이었다. 잠수함은 29척이 있었으며 3척(샤크, 시드래건, 시 라이언)은 오버홀 중이었다. 잠수모함은 2척(캐노퍼스, 홀랜드)이었으며 오투스는 잠수모함으로 개조하던 중 전쟁이 터지자 그냥 보급함으로 사용했다. 포함은 상하이에서 탈출한 5척에 홍콩에서 탈출한 민다나오를 더해 6척이었다. 프랭크 와그너 대령이 지휘하는 제10초계비행단은 카탈리나 28대, 잡용기 4대 및 수상정찰기 1대, 수상기모함 2척(랭글리, 차일즈)로 이루어져 카비테와 올롱가포에 주둔했다. 이외에 소해함 5척, 급유함 2척, 예인선 3척(케즈윅은 민간선박을 징발)이 있었다. 건선거 듀이는 마리벨레스에 있었다. 카비테에 사령부를 둔 프랜시스 록웰 소장의 제14해군관구는 약 2,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새뮤얼 해리스 대령의 제4해병연대는 약 1,600명으로 증강되어 올롱가포에 주둔했다.


(CA-30 휴스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USS_Houston_(CA-30)


많은 함정들이 제5기동부대로 편성되어 마닐라 만 남쪽에 흩어져 있었다. 아시아함대의 기함인 동시에 제5기동부대의 기함인 중순양함 휴스턴은 파나이 섬의 일로일로에 정박 중이었다. 경순양함 보이시는 세부를 지나고 있었다. 보이시는 원래 태평양함대 소속으로 증원선단을 호위하여 마닐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하트 제독의 요청으로 아시아 함대에 편입되었다. 잠수함 S-36은 링가옌 만 바깥을 초계 중이었고, S-39는 남부 루손의 소르소곤 만을 초계하고 있었다. 카탈리나 4대는 수상기모함 윌리엄 프레스톤과 함께 다바오에 있었고 수상정찰기 4대는 수상기모함 헤론과 함께 팔라완에 있었다.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의 타라칸에는 경순양함 마블헤드와 구축함 4척이, 발릭파판에는 구축함 4척과 구축모함 블랙호크가 있었다.


(나카지마 B5N 97식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Nakajima_B5N)


아시아함대의 함정 중 12월 8일에 공습을 받은 함정은 다바오 만에 정박 중이던 수상기모함 윌리엄 프레스톤이 유일했다. 8일 오전 8시에 약 200km 떨어진 일본의 경항모 류조에서 발진한 97식 함상공격기 13대가 아이오이 다카히데 대위가 이끄는 96식함상전투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공격해 왔다. 4대의 카탈리나 중 2대는 정찰을 나간 상태였고 2대가 해면에 정박하고 있다가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1차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수상기 모함 프레스톤은 재빠른 회피기동으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대공기관총으로 반격을 가하여 96식함상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 일본기들이 사라지자 프레스톤은 카탈리나 승무원들을 구한 다음 다바오 만을 떠났다. 


(미츠비시 A5M 96식함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A5M)


제5기동부대 사령관 윌리엄 글래스포드 소장은 8일 정오 경에 일로일로에 있던 중순양함 휴스턴에 사령기를 올렸다. 곧 경순양함 보이시가 달려와 합류했고 2척의 순양함은 하트 제독의 명령에 따라 발리파판을 향하여 남하했다. 카비테에 정박 중이던 수상기 모함 랭글리도 8일 저녁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마닐라 만을 탈출하여 발릭파판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아시아 함대의 유력한 수상함정들은 대부분 12월 10일까지 필리핀을 벗어나 남하했다.


일본군은 9일에도 공습을 계속했다. 일본해군은 니콜스 비행장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계획했으나 또다시 대만에 안개가 끼는 바람에 육상공격기 7대로 공습 규모를 축소했다. 일본기는 동트기 전에 마닐라 근교의 니콜스 비행장을 폭격하여 P-40전투기 3대와 B-18폭격기 1대를 포함한 비행기 몇 대를 파괴하고 격납고를 비롯한 지상시설을 파괴했다. 미군 3명이 전사하고 중상자 4명을 포함하여 9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은 대공포 배치를 조정했다. 제60대공해안포연대의 기관총 포대가 8일 밤에 코레히도르 섬을 떠나 마닐라 항과 니콜스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클라크 비행장 상공을 지키던 제200대공해안포연대 소속의 병력 500명은 마닐라로 파견되어 필리핀병기창에서 꺼내온 장비로 무장한 후 제515대공연대가 되었다. 10일에 제515대공연대의 3인치 대공포 8문은 마닐라에, 3문은 니엘슨 비행장 동쪽에 배치되었다. 37mm 대공포 4문은 니콜스 비행장에, 4문은 니엘슨 비행장에, 4문은 마닐라에 배치되었다.


9일 아침이 되자 미군은 정찰기를 내보냈다. 오전 8시에 클라크 비행장에서 B-17 한대가 대만 촬영 임무를 띄고 이륙했으나 기계적 고장으로 되돌아왔다. 전투기는 북부 루손을 정찰했으며 해군의 제10초계비행단은 서쪽과 북서쪽 해상을 정찰했다. 하루종일 잘못된 정찰보고가 난무했다. 하트 제독의 회고에 따르면 아무 것도 없는 해상에서 적의 수송선이나 전함을 보았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민다나오에 있던 B-17은 루손으로 돌아왔다. 세실 콤즈 소령이 지휘하는 6대의 B-17이 45kg 짜리 폭탄을 20발씩 실은 채 9일 아침 7시 30분에 델몬테 비행장을 이륙하여 오후 2시 30분에 클라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전날처럼 지상에서 파괴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재급유를 받고 다시 이륙하여 해가 질 때까지 공중에 머물렀다. 오후에는 또다른 B-17 폭격기 7대가 델몬테 비행장을 떠나 클라크 비행장 서쪽의 산 마르셀리노 임시비행장에 착륙했다.


(루손의 미국 비행장.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AAF-I-6.html P.202)


10일에 일본군은 니콜스 비행장과 카비테 해군기지를 목표로 재차 공격을 가했다. 오전 10시에 대만의 비행장을 이륙한 일본해군기들은 오전 11시 15분에 미군 레이더에 잡혔다. 10대의 P-40 을 가진 제17추격비행대대가 마닐라 만 상공에, 역시 10대의 P-40 으로 이루어진 제21추격비행대대가 마닐라 항구 상공에, 그리고 15대의 P-35를 가진 제34비행대대가 바탄반도 상공에 전개했다. 제3항공대 소속 제로기 34대가 마닐라만 상공에서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는 사이 1식육상공격기 27대가  니콜스, 델 카르멘 및 니엘슨 비행장을 공격했다. 주요 목표인 니콜스 비행장에는 폭탄이 비처럼 쏟아져 막사, 사무실, 그리고 창고를 파괴했다. 이어서 미군전투기를 제압한 제로기가 몰려들어 이틀 전과 마찬가지로 기총소사를 가했다. 대공포화도 없었고 요격기도 없었다. 미군 전투기는 모두 마닐라만 상공의 공중전에 투입되었다. 이날 격추된 일본기는 제로기 2대였다.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 해군기지도 공격을 받았다. 육상공격기 27대가 6,000m 고도에서 폭격을 가했는데 매우 정확하여 폭탄은 거의 모두 해군 기지 내에 떨어졌다. 이어서 제로기 18대의 호위를 받는 27대의 육상공격기가 함정들을 노리고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의 3인치 대공포 9문이 불을 뿜었으나 5,100m 가 한계고도였다. 이날 일본기의 피해는 제로기 3대였다.


카비테 기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발전기, 진료소, 창고, 사무실, 막사 및 장교 숙소, 매점, 우체국, 통신소가 직격탄을 맞았으며 불길이 강풍을 타고 번져 진화가 불가능했다. 약 500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어뢰정비소가 직격당해 구축함용 어뢰 230발도 터졌다. 주탄약창이 폭발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해군기지 전부와 카비테 시가지의 1/3이 불길에 휩싸였다. 하트 제독은 마닐라의 마스만 빌딩 옥상에서 카비테 기지가 불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11일 아침이 되자 불길은 더욱 거세어졌다. 하트 제독은 제14해군관구 사령관 록웰 소장과 의논하여 카비테를 포기하고 남은 보급품과 부품, 어뢰, 기뢰, 그리고 탄약을 마닐라, 코레히도르 및 마리벨레스로 옮겼다. 다만 생글리 곶의 통신소와 연료보급창은 최대한 오래 유지하다가 코레히도르로 철수하기로 했다.


카비테의 피해는 건물과 인명에 한하지 않았다. 부두에 계류되어 있던 잠수함 시라이언은 직격탄 2발을 맞아 4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침몰했으며 나란히 정박 중이던 소해함 비턴도 침몰했다. 역시 나란히 정박 중이던 시드래건은 잠수모함 피젼이 마지막 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끌어낸 덕분에 피해는 입었으나 침몰은 면했다. 오버홀 중이던 구축함 피어리는 폭탄에 맞아 전방 마스트가 반으로 쪼개졌다. 부두에 정박 중이던 예인선과 바지 몇 척도 피해를 입었다.


10일 저녁에 하트 제독은 워싱턴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군이 제공권을 가지고 있는 한 카비테는 해군기지로 사용하기 어렵지만 최대한 오랫동안 육군과 협력하여 잠수함 및 항공작전을 지속하겠다고 보고했다.

수상함정은 철수해야 했다. 하트제독의 명령에 따라 구축함 2척, 포함 3척, 잠수모함 2척, 그리고 소해함 2척이 제5기동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떠났다. 훗날 하트 제독은 그때 좀 더 많은 함정을 남쪽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개전 당시 마닐라 항에는 약 40척의 상선이 정박 중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해군은 마닐라 만을 완전히 봉쇄했다. 상선들은 해군요원의 지원을 받아 위장한 다음 흩어져 마닐라 만의 구석진 곳에 숨었다. 그러나 10일 오후에 일본기가 상선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다. 하트 제독은 11일 밤에 상선의 출항을 허가했다. 1척을 빼고 모든 상선이 탈출에 성공하여 이후 연합군 반격의 초기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은 항공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1일에는 대만 기상이 나빠 공세를 쉬었고 12일부터 다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12일 아침이 되었을 때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가용한 P-40 은 22대로 줄었고 6대가 수리 중이었다. 이외에는 8대의 P-35 와 고색창연한 P-26  몇 대가 미군이 가진 전투기의 모두였다. B-17 은 12일 아침에 16대가 가용했으나 5대는 저고도 작전만이 가능했고 다른 4대는 아예 공격작전에 투입하기 힘든 상태였다.

미군은 공중전이나 폭격을 피하고 정찰 위주로 최대한 오래 항공작전을 지속하기로 했다. 전투기는 클라크 및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했으며 B-17 은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12일 오전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대만 가오슝에서 이륙한 1식육상공격기 63대가 이바 및 클라크 비행장을 폭격했다. 미군전투기는 대부분 전투를 피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피했으나 미군기 10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이날 아침에 올랑가포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7대가 루손 해안을 따라 남하 중이라고 잘못 보고된 일본항공모함을 찾으러 출격했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마침 마닐라 비행장을 폭격하려는 육상공격기 52대를 호위하던 제로기 63대가 해면에 착수한 카탈리나를 공격하여 7대를 모두 파괴했다. 승무원들은 대부분 해안으로 도망쳤으나 2명이 전사했다. 이날 일본의 피해는 육상공격기 1대였다.


13일에도 일본은 200대 이상의 비행기를 내보내어 루손을 공격했다. 이제 루손 북부에 전개한 육군전투기가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비간에 진출한 비행제24전대는 13일 아침에 97식전투기 8대를 보내어 델 카르멘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어서 오전 10시 30분에는 6대가 클라크 비행장을, 오후 1시 30분에는 9대가 카바나투안 비행장을 공격했다.

아파리에 진출한 비행제50전대는 97식전투기 9대를 내보내어 오전 10시에 클라크 비행장을, 오후 12시 30분에 카바나투안 비행장을 공격했다.

아직 대만에 주둔 중이던 육군기도 공격에 참가했다. 조주에 주둔한 비행제14전대는 97식중폭격기 6대를 내보내어 오전11시에 클라크 비행장을 공격했다. 폭격기들은 4,000m 고도에서 50kg 짜리 폭탄 60발을 떨어뜨렸다. 오후 2시에도 6대의 97식 중폭격기가 클라크 비행장을 재차 공격했다.

대만 저둥에 주둔 중이던 비행제8전대는 오전 8시 30분에 99식경폭격기 17대를 발진시켰다. 경폭격기들은 탈락과 바기오를 폭격하고 오후 1시 30분에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이 폭격은 항속거리 800km 인 99식경폭격기의 한계에 가까운 장거리 폭격이었다.

이날 상실한 육군기는 없었다.


13일 오후 12시 30분부터는 일본해군기가 나타나 델카르멘, 클라크, 니콜스, 카바나투안, 그리고 바탕가스를 공격했다. 수빅만 상공에서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일본해군의 피해는 제로기 2대였다.

13일 저녁이 되자 일본군이 루손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은 살아남은 제10초계비행단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과 수상기모함 3척을 남쪽으로 보냈다. 이제 필리핀에 남은 해군 세력은 구축함 2척(1척은 수리중), 어뢰정 6척, 어뢰정모함 2척, 포함3척, 잡다한 지원함정과 잠수함 27척으로 줄어들었다. 하트 제독은 잠수함이 활동을 지속하는 한 마닐라에 남아 함대를 지휘하기로 결심했다.


민다나오에는 16대의 B-17 이 남아 있었으나 임시 비행장에 불과한 델몬테 비행장에는 B-17에게 적당한 시설이 없었다. 엔진, 프로펠러, 그리고 예비 부품이 없어서 일부 B-17을 부품 공급용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도구도 부족했다.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공습경보로 B-17은 이륙하여 저녁까지 공중에 떠 있어야 할 경우가 많았고 밤에도 공습경보 때문에 승무원과 정비원들이 밤잠을 설쳤다. 이런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실시하기는 어려웠다.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관 브레러튼 소장은 B-17을 호주 북부의 다윈까지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의 승인을 받았다. 12월 17일 저녁까지 10대의  B-17이 델몬테를 떠나 호주 다윈의 바첼로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제 B-17은 필요시 델몬테나 클라크 비행장을 전진 비행장으로 사용할 것이었다. B-17의 후퇴는 시의적절했다. 이틀 후인 12월 19일에 일본 경항모 류조의 함재기들이 델몬테 비행장을 공격했다. 일본전투기가 저공으로 비행장을 누비며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남아있던 B-17폭격기들은 잘 분산해서 정성들여 위장한 덕분에 공격을 면했다. 그날 저녁에 아직 남아있던 B-17 폭격기 4대는 델몬테 비행장을 떠나 바첼로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이제 필리핀의 미군항공력은 약간의 전투기로 줄어들었다. 상륙군을 싣고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요격하고 상륙한 일본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임무는 약간의 항공기와 아시아 함대의 잠수함이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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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클라크 비행장 피습


12월 8일 오전 3시 30분에 마닐라 라디오 방송이 진주만 기습을 알린 직후 이바 비행장의 레이더가 해안으로부터 120km 떨어진 곳에서 코레히도르로 접근하는 정체불명의 비행기를 발견했다. 즉시 이바 비행장에서 P-40 전투기 6대가 이륙하여 추격했다. 레이더 상에서 전투기들은 정체불명기와 겹쳐졌으나 실제로는 고도가 낮아서 접촉하지 못했다. 잠시 후 정체불명기는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비행기는 일본해군이 띄운 기상관측기였다.


(가와사키 ki-48 99식쌍발경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Kawasaki_Ki-48)


8일 새벽부터 대만을 감싸고 있던 안개는 동틀녁에 육군비행장부터 걷히기 시작했다. 8일 오전 5시 50분부터 7시에 걸쳐 비행제8전대의 99식 경폭격기 25대가 자둥 비행장에서, 그리고 비행제14전대의 97식 중폭격기 18대가 조주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남하하던 일본기들은 오전 9시가 되기 조금 전에 미군 레이더에 잡혔다. 경보를 받은 클라크 비행장의 B-17 은 황급히 공중으로 대피했고 전투기들이 요격하러 날아올랐다. 그러나 일본기들은 미군 전투기가 전개한 로살레스 상공까지 오지 않고 9시 23분부터 비행제8전대가 투게가라오를, 그리고 비행제14전대가 바기오를 폭격했다. 오전 10시에 미군 레이더가 철수 중인 일본기를 카가얀 하곡 상공에서 포착하고 일본기가 남하 중이라는 잘못된 경보를 보냈으나 20분 후에 북쪽으로 철수 중이라고 정정했다. 일본육군기들은 오전 11시 30분까지 1대도 빠짐없이 귀환했다.


(미츠비시 Ki-21 97식중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Ki-21)


그동안 대만에서는 해군비행장 상공의 안개도 걷혀서 제11항공함대는 공격대를 내보낼 수 있었다. 오전 10시 15분에 제로기 85대의 호위를 받는 일본해군의 96식 및 1식 육상공격기 106대가 클라크와 이바 비행장을 목표로 이륙했다.


일본해군기들이 북부 루손에 접근하는 동안 오전 9시에 이륙했던 B-17과 미군전투기들은 착륙하기 시작했다. 남하하던 일본해군기가 레이더에 잡힌 오전 11시 27분이 되자 필리핀의 미군기는 1-2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상에 있었다. B-17 은 클라크 비행장에 착륙하여 오후에 실시될 대만 폭격을 위하여 폭탄을 장착하고 급유를 받았다. 일본육군기를 요격하러 이륙했던 제20추격비행대대의 전투기들도 착륙하여 급유를 받았고 제20추격비행대대를 대신하여 클라크 비행장 상공을 지키던 제17추격비행대대도 니콜스 비행장에 착륙하여 급유를 받았다. 제3추격비행대대는 이바 비행장에서, 제34추격비행대대는 델 카르멘 비행장에서 대기 중이었다.


(루손의 미국 비행장.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AAF-I-6.html P.202)


오전 11시 30분부터 남하하는 일본기에 대한 경보가 니엘슨 비행장의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레이더 기지 뿐만 아니라 루손 서북쪽 해안에 배치된 대공 경계원들도 고공 비행하는 일본폭격기를 발견하고 전화나 전보로 보고했다. 제5추격사령부 참모장 해럴드 조지 대령은 휘하의 추격비행대대에 발진 명령을 내렸다.


니콜스 비행장의 제17추격비행대대는 바탄 반도 상공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21추격비행대대는 마닐라 상공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델 카르멘 비행장의 제34추격비행대대는 클라크 비행장 상공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비행장 상공의 기상이 나빠서 이륙하지 못했다. 클라크 비행장에서는 제20추격비행대대가 재급유를 받고 있었다. 이바 비행장의 제3추격비행대대는 본대에 앞서 남중국해를 남하 중인 일본기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일본기들은 일본폭격기를 선행한 제로기로서  제3추격비행대대와 만나기 전에 클라크 비행장 방향으로 변침했다.


이후에 극동미육군항공대 내부에서 벌어진 상황은 불명확하다. 항공경계대장 알렉산더 캠벨 대령은 텔레타이프를 사용하여 오전 11시 45분에 경고 메시지를 클라크 비행장에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라크 비행장에 있던 제5폭격사령관 유뱅크 중령은 폭격 직전까지 경고를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정황을 보면 두 사람이 모두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제24추격비행전대사에는 오전11시 45분에 폭격대형이 링가옌 만을 남하 중이라는 출처 미상의 텔레타이프가 들어왔으나 문장이 깨져서 읽기 어려웠다는 기술이 나온다. 그런데 제24추격비행전대의 본부는 니콜스 비행장에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실수로 경고 메시지가 클라크 비행장이 아닌 니콜스 비행장에 전달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비행전대사의 기술은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하던 제20추격비행대대의 일지를 보고 적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제20추격비행대대가 텔레타이프가 전한 경고 메시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되는데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제20추격비행대대는 새벽부터 여러번 잘못된 경보를 받았고 오전 9시에는 실제로 출격하여 하릴없이 공중에서 대기하다가 적기는 보지도 못한 채 연료가 떨어져 착륙한 후 재급유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발신자도 알 수 없고 문장이 깨져서 읽기도 어려운 경고 메시지에 따라 전투기의 재급유를 중단하고 긴급발진시킬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무시한 경고 메시지를 폭격사령부에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폭격사령관 유뱅크 중령은 그날 오전에 잘못된 경고가 2-3번 있었다고 말하여 은연 중에 이런 가능성을 시사했다.


오후 12시 15분에 제20추격비행대대의 재급유가 끝나자 전투기들이 차례로 이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본해군 제1항공대의 96식 육상공격기 27대가 클라크 비행장 상공에 나타나 6,600m - 7,500m 고도에서 폭격을 시작했다. 공습 경보는 첫 폭탄이 떨어지기 불과 몇 초 전에야 울렸다. 1대를 제외한 B-17 모두가 지상에 주기중이었고 전투기는 막 이륙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전투기 4대가 이륙에 성공했고 전투기 4대는 지상주행 중에 폭탄을 맞아 파괴되었다. 일본해군항공대의 에이스였던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의 저서 대공의 사무라이에서 폭격이 놀라울만큼 정확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출격 지연에도 불구하고 진주만처럼 완전한 전술적 기습에 성공했다.


(미츠비시 G3M 96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3M)


공격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미국 역사가들은 대체로 오후 12시 15분에서 40분 사이에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 전사총서에는 도쿄시간 오후 1시 30분(현지시간 오후 1시)에 폭격을 시작했다고 되어 있고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의 책에 도쿄시간 오후 1시 45분(현지시간 오후 1시 15분)에 폭격이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제1파가 지나간지 15분 후에 1식 육상공격기 26대로 이루어진 제2파가 들이닥쳐 폭격을 가하고 사라졌다. 2차례의 폭격이 끝나자 신고 히데키 중위가 지휘하는 타이난 해군항공대의 제로기 34대가 저공비행으로 지상을 기총소사하기 시작했다. 폭탄을 싣고 있던 B-17과 항공유를 만재한 P-40 전투기들이 지상에서 제로기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공격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미츠비시 A6M 제로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A6M_Zero)

 


미군의 대공포화는 비효율적이었다. 제200대공해안포연대가 보유한 3인치 대공포탄의 불발율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발사된 포탄 6발 중 1발만이 실제로 터졌으며 그나마 일본기의 600m - 1200m 아래에서 폭발했다. 지상정비요원이나 경비병들이 주기된 비행기의 기관총을 잡고 저공비행으로 기총소사를 가하는 제로기에 대항했다.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륙한 P-40 전투기 4대는 제로기 3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델 카르멘 비행장의 날씨가 좋아지면서 제34추격비행대대의 구형 P-35 전투기 18대가 이륙하여 클라크 비행장으로 달려왔으나 숫자와 성능에서 압도적인 제로기에게 막혔다. 다만 제로기들이 기총소사하느라고 20mm 기관포탄을 거의 소모하고 7.7mm 기총으로 상대한 까닭에 P-35 모두가 피해를 입었으나 격추된 기체는 3대에 그쳤다. P-35 조종사들은 제로기 3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바탄반도 및 마닐라 상공에는 제17 및 제21추격비행대대의 P-40 전투기들이 있었으나 클라크 비행장의 통신소가 폭격을 받는 바람에 구원 요청을 타전할 수 없었다. 바탄반도 및 마닐라 상공의 조종사들이 불과 80km 떨어진 클라크 비행장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를 왜 보지 못했는지는 의문이다.


(세베르스키 P-35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Seversky_P-35)


폭격 당시 B-17의 분산은 불완전했다. 그러나 어차피 대부분의 B-17 이 폭탄이 아니라 집요하게 B-17을 물고 늘어진 제로기의 기총소사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분산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연료자동방루장치의 수리를 위하여 이날 아침 9시 35분에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을 이륙한 B-17 한대가 하필이면 제로기가 한참 기총소사하고 있을 때 클라크 비행장에 접근했다. B-17은 제로기 3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기장 얼 타쉬 중위는 큰 피해를 입은 자신의 폭격기를 끌고 델몬테 비행장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 중이던 B-17 중 1대만이 파괴를 모면했다. 존 카펜터 중위의 B-17은 루손 동해안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클라크 비행장을 떠나 공습이 끝난 이후에 돌아왔다.


클라크 비행장에 대한 제11항공함대의 공격은 성공했다. 일본폭격기들은 격납고, 막사, 식당, 작업장 그리고 창고를 박살내었다. 미육군항공대의 공식전사에 의하면 주기 중이던 미군기들은 대부분 제로기의 기총소사로 파괴되었다. 미군의 전사자는 55명이었으며 부상자는 100명 이상이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4M

 


가오슝해군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53대와 요코야마 타모츠 중위가 지휘하는 제3항공대의 제로기 51대는 이바 비행장을 공격했다. 남중국해를 초계하다 돌아온 제3추격비행대대의 P-40 전투기 12대가 착륙하려고 선회하던 중 일본기가 들이닥쳤다. 착륙 준비 중이던 P-40 전투기는 제로기와 맞붙어 3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댓가로 5대가 격추되고 3대가 연료 부족으로 추락했다. 제로기는 이들을 상대하느라 클라크 비행장에서와 달리 지상에 대한 기총소사를 거의 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피해는 상당했다. 제3추격비행대대의 P-40 은 2대를 빼고 모두 파괴되었다. 이바 비행장의 막사, 창고, 장비 그리고 레이더가 박살났으며 지상 병력의 피해도 컸다. 


이로써 개전 하루 만에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절반 가까운 전력을 잃었다. 35대의 B-17 중 18대가 파괴되었다. 107대의 P-40 중 9대가 격추되고 3대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했으며 40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3대의 P-35도 파괴되었으며 B-10, B-18 및 정찰기 25-30대가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비행기 중에서도 많은 수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클라크 및 이바 비행장의 시설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인명 피해는 전사 80명, 부상 150명에 달했다. 일본의 손실은 제로기 7대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루손 상공의 제공권 다툼에서 기선을 제압했다.


진주만 기습에 이은 일대 참사였던 클라크 비행장 피습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브레러튼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지만 가장 큰 책임은 맥아더에게 있다고 본다. 그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남서태평양지역사령관이 되어 만회할 기회를 얻은 맥아더는 진주만 기습을 당한 킴멜 제독이나 쇼트 장군과 비교하면 엄청난 행운아였다. 소련같으면 9시간 전에 경고를 받고도 기습을 허용하여 하루 만에 항공력의 절반을 잃은 사령관은 총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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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전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었을 때 날짜변경선 서쪽에 있던 일본과 필리핀은 1941년 12월 8일이었다. 8일 새벽에 일본은 여러 목표를 동시에 공격했다. 일본군은 도쿄 시간으로 새벽 1시 40분에 말레이 코타바루에 상륙했고 2시 50분에 진주만을 기습했으며 3시 5분에 태국 국경을 넘었고 싱가포르는 6시 10분에, 괌은 8시 5분에, 그리고 홍콩은 9시에 공격했다. 웨이크와 필리핀도 공격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은 개전 몇 시간 만에 필리핀 수비대의 처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레인보우 계획에 따르면 전쟁이 벌어지면 태평양함대는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를 탈취한 다음 증원 병력 및 보급품과 함께 필리핀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하와이 시간으로 12월 7일 오전 10시가 되자 태평양함대의 주력은 진주만 바닥에 있거나 연기를 내뿜으며 무력화되었다. 이제 필리핀은 극동미육군항공대와 아시아함대의 지원을 받는 필리핀 주둔 미군과 필리핀군이 방어해야 했다.


필리핀에서 진주만 기습 소식을 가장 일찍 접한 것은 해군이었다. 아시아함대 사령부가 있던 마닐라 마스만 빌딩의 통신실에서 당직을 서던 통신수가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30분에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워싱턴과 해상의 모든 함정에 보내는 통신을 가로챘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 명의로 된 이 통신문은


"공습, 진주만 -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Pearl Harbor - This is no drill.)


라고 되어 있었다. 필리핀의 8일 오전 2시 30분은 하와이의 7일 오전 8시로서 진주만의 휠러 비행장에 일본군의 첫 폭탄이 떨어진 지 9분 후였다.


통신수는 즉시 당직장교인 윌리엄 클레먼트 해병중령에게 보고했다. 클레먼트 중령은 이 통신을 킴멜 제독이 보낸 것이 맞는지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통신문을 주의깊게 살펴본 통신수는 타전 방식으로 보아 진주만에 근무하는 자신의 오랜 친구가 발신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클레먼트 중령은 하트 제독에게 전화를 걸어 중요한 보고 내용이 있으니 방문하겠다고 말한 후 당직실을 나섰다.


마스만 빌딩과 하트 제독의 숙소가 있던 마닐라 호텔은 300m 거리였으므로 잠시 후 하트 제독은 자신의 침실에서 클레먼트 중령이 내민 통신문을 읽었다. 이때 시간이 오전 3시.. 이로써 하트 제독은 필리핀의 주요 지휘관 중 진주만 기습을 가장 먼저 알았다.

하트 제독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메모지에 자신의 함대에 보내는 명령서를 갈겨 썼다.


'아시아 함대, 지급

일본이 적대행위를 시작했다.

스스로 적절하게 처신하라.'

(Asiatic Fleet, Priority

Japan started hostiliries.

Govern yourselves accordingly.)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듯한 이 명령에 대해 훗날 하트 제독은 자다가 깨어 긴급사태를 맞이하자 머리가 복잡해서 적당한 문장을 생각해 낼 여유가 없었다고 겸연쩍게 말했다.


(하트 제독이 아시아함대에 내린 명령서 원본.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170)


하트 제독은 이어서 참모장 퍼넬 소장에게 전화를 걸고 옷을 갖추어 입은 다음 급히 아침식사를 하고 새벽 4시에 마스만 빌딩의 사령관실로 출근했다. 퍼넬 참모장은 이 소식을 육군 및 육군항공대에 알렸다. 그러나 실무자들이 지휘부에 보고하기 전인 오전 3시 30분에 마닐라 라디오 방송국이 진주만 기습 소식을  긴급 뉴스로 내보냈다. 맥아더 장군의 참모장 서덜랜드 준장이 라디오 뉴스에 대해 보고를 받고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관 브레러튼 소장도 라디오를 통해 진주만 기습을 알았다. 


같은 시각 북쪽으로 800km 떨어진 대만의 비행장에서는 일본육군 및 해군항공대 조종사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짙은 안개가 비행장을 감싸 예정된 시간에 이륙이 불가능했다. 미군 수뇌부가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었을 것이므로 기습은 불가능했다.

가장 두려운 사태는 일본기가 지상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미군이 B-17 폭격기를 보내어 대만의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오전 8시에 B-17 이 이륙했음을 암시하는 미군 통신을 감청하자 긴장은 더욱 높아졌고 오전 10시 10분에 미군의 B-17 이 접근 중이라는 잘못된 경보가 울리자 허겁지겁 방독면을 착용했다.

일본군이 오전 8시에 감청한 통신의 정체는 확실하지 않다. 그 시각에 극동미육군항공대사령부와 휘하 부대에서 대만 폭격을 논의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을 송신할 이유는 없었다. 클라크 비행장의 B-17 에게 지상에서 공격당하지 않도록 공중으로 피하라는 명령이 감청된 것으로 보기에도 이상한 것이 실제로 B-17 에게 대피명령이 내려진 것은 오전 9시였다.


일본군의 걱정과 달리 B-17 의 대만 공습은 없었다. 대만의 일본기들이 안개 때문에 지상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필리핀에서 극동미육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 그리고 극동미육군항공대사령관 브레러튼 장군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불명확하다. 3명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식 기록이 사라진 상황에서 클라크 비행장 피습 책임과 관련이 있는 12월 8일의 행적을 둘러싸고 3명이 나중에 엇갈린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 중에서는 극동미육군항공대가 만든 '극동항공대사령부 조치요약'(Summary of Activities of Headquarters, Far East Air Force)이 몇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장 믿을만하다. 브레러튼 장군의 회고록인 '브레러튼 일지'(The Brereton Diary)의 관련 내용도 대부분 이 요약보고서를 기초로 쓴 것이다. 하지만 요약보고서에도 브레러튼 장군의 당일 행적이 모두 나타나지는 않으며 맥아더 장군과 서덜랜드 참모장의 행적은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맥아더 장군과 서덜랜드 참모장의 전체 행적을 보여줄 극동미육군사령부의 공식 기록은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사라졌다. 요약보고서는 브레러튼 장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할 때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브레러튼 장군은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고 새벽 5시에 극동미육군사령부로 갔으나 맥아더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 서덜랜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날이 밝자마자 대만을 공습하겠다면서 허가를 요청했는데 서덜랜드 참모장은 폭격 준비를 하되 이륙은 맥아더 장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브레러튼은 니엘슨 비행장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로 돌아와 클라크 비행장에서 막 날아온 폭격사령관 유뱅크 중령에게 대만 폭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브레러튼은 오전 7시 15분에 다시 맥아더 사령부로 가서 대만 폭격 허가를 재차 요구했으나 서덜랜드 참모장은 다시 명령을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니엘슨 비행장에 돌아온 브레러튼은 육군항공대사령관 아놀드 장군의 전화를 받았다. 아놀드 장군은 진주만의 상황을 알려주면서 브레러튼에게 지상에서 공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오전 9시가 되기 조금 전에 레이더 기지로부터 다수의 적기가 마닐라로 접근 중이라는 경고가 들어오자 클라크 비행장의 B-17 은 폭탄을 장착하지 않은 채 공중으로 피신했다.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한 제20추격비행대대도 이륙하여 남하 중인 적기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한 제17추격비행대대장 보이드 와그너 중위는 제20대대를 대신하여 클라크 비행장 상공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레이더에 나타난 적기는 북부 루손을 목표로 하는 일본육군기였다. 이들은 투게가라오와 바기오로 향했고 남쪽 로살레스 상공에 전개한 제20추격비행대대는 접촉에 실패했다. 오전 9시 10분이 되자 미군전투기 54대가 공중에 있었으나 일본기와 전혀 접촉하지 못했다. 오전 9시 23분에 투게가라오와 바기오가 폭격을 받았다.


요약보고서에 따르면 오전 10시에 브레러튼은 다시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서덜랜드에게 대만 폭격 허가를 요청했다. 서덜랜드는 재차 거부하면서 대만을 폭격하기 전에 B-17을 보내어 사진촬영을 요구했다. 오전 10시 10분에 폭격사령관 유뱅크 중령은 사진촬영 준비를 위하여 클라크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요약보고서에 따르면 오전 10시 14분에 맥아더 장군이 브레러튼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 상에서 두 사람은 먼저 B-17 을 내보내어 사진촬영을 한 후 오후 늦게 대만을 폭격하기로 합의했다.

브레러튼은 부하들과 회의를 가진 다음 10시 45분에 클라크 비행장에 텔레타이프를 보내어 먼저 사진촬영을 한 후 오후 늦게 2개 중폭격비행대대로 대만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폭격사령관 유뱅크 중령은 공중을 떠돌고 있는  B-17 에게 돌아오라는 명령을 보냈다. 오전 11시 20분에 같은 내용의 야전명령 1호가 정식으로 발령되었다. B-17은 돌아와 클라크 비행장에 착륙했으며 연료가 떨어진 전투기들도 착륙하여 재급유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전11시 30분이 되자 필리핀의 미군기는 1-2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상에 있었다. 클라크 비행장은 이 상태에서 일본기의 기습을 받았다.


훗날 맥아더는 1941년 12월 8일 내내 브레러튼으로부터 대만을 폭격하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서덜랜드 또한 8일 오전에 맥아더와 브레러튼이 통화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아 브레러튼이 8일 오전에 대만을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며 사진촬영을 위하여 공격이 늦추어졌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미육군항공대의 교리에 따르면 B-17의 가치는 공격적인 운용에 있었다. 대만공격은 동시에 적의 예상 접근로인 필리핀 북쪽 해상을 정찰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는데 이는 레인보우 계획에서 극동미육군항공대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교리에 비추어 볼 때 8일 오전에 브레러튼이 대만 공격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짚어두어야 할 것은 12월 8일 오전에 대만 공격을 실시했다면 십중팔구 실패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극동미육군은 대만에 전개한 일본기 세력을 정확하게 몰랐는데 약 550대의 일본기가 전개하고 있었으며 전투기만 제로기 110대를 포함하여 210대에 달했다. 따라서 미군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대만에 접근하는 B-17은 제로기의 대군과 만났을 것이며 대부분 격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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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방어 계획


맥아더 장군이 극동미육군사령관이 되기 전까지 필리핀의 방어계획은 미육해군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1941년 3월에 개정한 오렌지전쟁계획-3(War Plan Orange-3 = WPO-3)이었다. 오렌지 계획은 일본이 선전포고없이 경고 48시간 이내에 공격을 가하며 미본토에서 당분간 증원이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했다. 따라서 초기 전투는 기존의 필리핀 주둔 미군과 필리핀군만으로 치러야 했다.


필리핀 군관구는 1940년 7월 1일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일본이 필리핀 공격에 강력한 항공력과 함대의 지원을 받는 병력 100,000명을 투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사전 경고를 받지 못할 것이며 일본군은 필리핀의 지형을 익혀둔 상태에서 30,000명에 달하는 필리핀 거주 일본민간인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주요 목표는 루손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일본군은 주력의 상륙에 앞서 선발대를 여럿 상륙시켜 비행장을 탈취할 것으로 보았으며 주력 상륙시에는 제2차 상륙이나 양동작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일본기들은 전투 초기에 탈취한 루손의 비행장으로 옮겨와서 필리핀의 미군항공력을 제거하고 군사목표를 폭격하려 할 것이었다.


오렌지 계획에 따르면 필리핀 수비대의 목표는 일본이 마닐라 만을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오래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하여 미군과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되 실패하면 바탄반도로 들어가 농성할 것이었다. 필리핀 수비대는 중부 루손에서만 싸울 것이었으며 필리핀 제도 전체를 지킬 생각은 없었다.


오렌지 계획은 루손을 6개 지구로 나누었다. 필리핀 유일의 미군 사단인 필리핀 사단장은 바탄 반도 전투를 지휘할 것이었다. 극동미육군항공대의 전신인 제4혼성비행전대가 항공지원을 맡아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하고 지상전투를 지원할 것이었다. 오렌지 계획은 제4혼성비행전대와 필리핀육군항공군단의 증강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 해군은 마닐라 만과 수빅 만의 입구를 지키는데 주력할 것이었다.


포트 스토첸버그, 포트 윌리엄 맥킨리, 타를락, 샌 페르난도, 그리고 마닐라 등지에 보관 중인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은 초기에 루손의 6개 지구에 공급되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바탄반도로 옮겨야 했다. 바탄반도로 옮겨야 할 식량은 40,000명이 180일 동안 먹을 양이었으며 궁극적으로 필리핀 군관구가 가진 모든 보급품을 바탄반도로 옮길 것이었다. 군대가 보유한 차량이 부족했으므로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하여 루손 전역의 버스와 4,000대에 달하는 민간인 트럭을 징발할 것이었다.


필리핀 수비대가 바탄반도에서 농성하는 6개월 이내에 미태평양함대는 일본연합함대를 쳐부수고 증원 병력 및 보급품과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이후 강화된 필리핀 수비대는 반격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바다로 밀어넣을 것이었다.


1941년 4월부터 미군 수뇌부는 오렌지 계획이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군은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필리핀은 봉쇄될 것이며 태평양함대는 2년 후에야 필리핀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해군의 예상은 너무 낙관적이었다. 실제로 미군이 루손에 돌아간 것은 개전 이후 3년이 지나서였다. 오렌지 계획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7월 말에 극동미육군 사령관이 되자 오렌지 계획을 거부했다. 낙관주의자인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부하와 필리핀 국민을 신뢰했다. 그는 필리핀 수비대가 바탄반도에 틀어박히는 대신 침공해오는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 필리핀 전체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일단 침공을 좌절시키고 나면 필리핀은 다수의 B-17 을 날려서 남중국해를 통한 일본과 남방지대 사이의 교통을 봉쇄하는 요새가 될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실전 배치가 시작된 B-17 에 대한 과대평가와 맞물려 전쟁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전쟁부는 기존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1941년 8월부터 적극적으로 필리핀에 증원 병력과 함께 비행기를 비롯한 장비와 물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 육해군합동위원회는 생각이 달랐다. 1941년 9월에 합동위원회가 만든 레인보우5 계획의 사본을 전달받은 맥아더 장군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독일 및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게 될 경우 독일을 먼저 타도한다는 독일우선주의를 채택한 레인보우 계획의 필리핀 부분은 오렌지 계획을 차용했으며 암암리에 필리핀 포기를 전제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10월 1일에 전쟁부로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짧은 시간 내에 강력한 항공지원을 받는 11개 사단과 군단 및 군 사령부, 지원부대로 이루어진 200,000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될 것이며 이정도 병력이면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필리핀 전체를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이 맥아더를 지지하자 결국 합동위원회가 물러섰다. 합동위원회는 11월 21일에 레인보우 계획에서 필리핀 수비대의 목표를 마닐라만 방어에서 필리핀 제도 전체를 방어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자신이 방어계획이 받아들여지자 맥아더 장군은 1941년 11월 초에 결정해 두었던 방어구역을 12월 3일에 확정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을 4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1941년 12월 8일 현재 극동미육군 배치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4.html#4-2)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이 지휘하는 북부루손군(Nothern Luzon Force) 구역에는 중부 평원, 링가옌 만, 잠발레스 해안 및 바탄반도 등 루손의 요충지가 대부분 포함되었다. 북부루손군의 임무는 비행장을 지키고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 상륙을 허용했을 경우 오렌지 계획과 달리 바탄반도로 후퇴하지 않고 해안에서 결전을 치를 것이었다. 따라서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는 초소를 배치했으며 해안에서 4시간 거리에 집결지를 설정했다. 북부루손군은 3개 필리핀군 사단(제11, 제21 및 제31사단), 제26기병연대(PS), 그리고 바탄반도에 주둔한 제45보병연대(PS)의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55mm 평사포 2개 포대와 75mm 산포 1개 포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71사단(PA)은 북부루손군 소속이기는 했으나 맥아더 장군의 허락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조지 파커 준장이 지휘하는 남부루손군(Southern Luzon Force)은 마닐라의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방어했다. 파커 준장의 임무도 비행장을 보호하고 상륙을 저지하며 만일 상륙하면 해안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남부루손군의 규모는 북부루손군보다 작아서 2개 필리핀군 사단(제41 및 제51사단)과 야포 1개 포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윌리엄 샤프 준장이 지휘하는 비사야-민다나오군(Visayan-Mindanao Force)은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을 방어했다. 샤프 준장의 주요 임무는 비사야의 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상륙을 막되 일본군이 상륙했을 경우 해안에서 결전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민다나오의 델 몬테에 만들어진 임시 비행장에 1개 대대를 보내어 보호하는 것도 샤프 준장의 임무였다. 비사야-민다나오군에는 사령부를 제외하면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가 없었으며 3개 필리핀군 사단(제61, 제81 및 제101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부와 남부루손군 사이에는 마닐라와 그 북쪽을 포함하는 예비 지대가 설정되어 극동미육군사령부가 직접 통제했다. 예비 지대에는 필리핀사단(1개 대대 감편), 제91사단(PA), 제86야포연대(PS), 극동항공대, 그리고 필리핀 군관구 및  필리핀군 사령부가 있었다.

마닐라 만과 수빅 만 입구는 무어 장군이 지휘하는 해안방어부대가 담당했으며 필리핀해안포 사령부도 가세했다.


개전 당시 미군과 12,000명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스카우트의 상태는 양호했다. 문제는 주력을 맡아야 할 필리핀군의 상태였다.


 

(1941년 12월 3일 현재 극동미육군 배정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4.html#4-2 P.70)

P.70)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주로 루손의 방어를 담당했다. B-17 폭격기 35대는 마닐라 북쪽의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했으나 12월 5일에 16대는 B-18 폭격기 몇 대와 함께 민다나오의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겼다.


(세베르스키 P-35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Seversky_P-35)

전투기는 주로 루손의 비행장에 흩어져 주둔했다. 클라크 비행장에는 P-40B 전투기 18대를 가진 제20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으며 마닐라 남쪽의 니콜스 비행장에는 각각 P-40E 전투기 18대를 가진 제17 및 제21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다. 클라크 비행장의 서쪽인 이바 비행장에는 P-40E 전투기 18대를 보유한 제3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으며 클라크 비행장의 남쪽인 델 카르멘 비행장에는 구형 P-35전투기 18대를 보유한 제34추격비행대대가 주둔했다. 루손 남쪽의 바탕가스 비행장에는 고색창연한 P-26전투기 12대를 보유한 필리핀 항공대가 주둔했다.

나머지 구형기들은 대부분 클라크 비행장에 주둔했다.


(보잉 P-26 피슈터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Boeing_P-26_Peashooter)

 

(루손의 미국 비행장.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AAF-I-6.html P.202)


1941년 11월 말이 되자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11월 24일에 태평양 및 아시아 함대 사령관은 해군부로부터 일본과의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낮으며 일본군이 필리핀과 괌을 포함한 어디서든 기습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3일 후인 27일에는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맥아더 장군과 하와이의 쇼트 중장에게 최종 경고라는 말이 들어간 전문을 보냈다. 마셜 장군은 일본과의 협상은 사실상 끝났으며 일본군이 언제든 기습공격을 가할 수 있으니 정찰강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조치 내용을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해군부도 태평양의 해군지휘관들에게 전쟁경고라는 단어가 들어간 전문을 보내어 며칠 내로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니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11월 27일의 전문을 받은 직후 맥아더 장군, 하트 제독, 고등판무관 프랜시스 사이어, 그리고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 케손이 모여 회의를 했다. 케손 대통령은 자치령의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다음날 마셜 장군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맥아더 장군은 육군과 해군이 협조하여 정찰을 강화하고 전투에 대비하고 있다고 적었다.


12월이 되자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미군 정찰기가 말레이로 향하는 일본선단을 발견했으며 루손 상공에 정체불명의 항공기가 출몰했다. 12월 5일에 영국극동함대 사령관 톰 필립스 해군대장이 마닐라로 날아와 하트 제독 및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다. 이튿날 일본선단이 타이 만을 서진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필립스 제독은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1941년 12월 6일 토요일에 맥아더 장군은 해안방어지대에 병력을 배치하라는 명령을 북부루손군에 내렸으며 파괴활동에 대비하여 비행기의 경비를 강화했다.


12월 7일 일요일(하와이는 12월 6일 토요일)은 긴장되기는 했으나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제27폭격비행전대는 마닐라 호텔에서 파티를 열었다. 브레러튼 장군은 리처드 서덜랜드 준장 및 하트 제독의 참모장인 윌리엄 퍼넬 해군소장과 같은 테이블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퍼넬은 길어야 며칠 어쩌면 몇 시간 내로 발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후 하트 제독의 부름을 받고 테이블을 떠났다. 서덜랜드도 전쟁부와 해군부는 전쟁이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브레러튼은 자신의 참모장을 불러 12월 8일 월요일 아침을 기해 전투경계태세를 발령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필리핀의 미군 중 12월 7일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잠자리에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도 별다른 뉴스는 없었다. 포트 스토첸버그에서는 제194전차대대장 어니스트 밀러 중령이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콘체르토 B  플랫 마이너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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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본의 계획


1941년 7월 26일에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하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뒤따르자 일본은 굴복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느냐 아니면 석유가 나는 극동의 영국 및 네덜란드 영토를 무력으로 탈취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두번째 길을 택할 경우 일본의 전략가들은 미국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참전할 것으로 보았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일본이 남쪽으로 진출할 경우 배후의 위협이 사라진 상태였으므로 일본은 두번째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극동에서라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미국이었는데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고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미국의 우위가 전장에서 발휘되기 전에 남방지대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일본 대본영은 대략 6개월 간의 작업을 거쳐 1941년 11월 초에 남방작전 계획을 만들었으며 이후로는 작은 수정만이 가해졌다. 남방작전에서 일본의 목표는 말레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계획과 1941년 11월 현재 병력 배치.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4.html#4-1 P.53)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고 괌과 웨이크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끊은 다음 필리핀을 점령할 것이었다. 남방 지대를 차지한 다음에는 주변에 비행장을 짓고 항공기를 배치하며 강력한 항모기동부대를 전략 예비대로 활용하여 방어선에 접근하는 미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새로 얻은 지역 및 일본 본토와의 교통로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이럴 경우 일본의 방어선은 북쪽의 쿠릴열도에서 시작하여 웨이크 , 마셜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뉴기니,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버마를 거쳐 중국의 일본군 점령지로 이어질 것이었다. 백악관에 일장기를 꽂을 생각은 없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일본의 계획은 남방 자원 지대를 차지한 상태에서 협상을 통하여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일본은 여러 곳을 동시에 공격할 것이었다.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말레이 상륙작전이 실시될 것이었다. 그 직후 필리핀의 미군비행장에 대한 공습이 실시되고 필리핀 상륙이 뒤따를 것이었다. 태국은 '안정화' 시킬 것이었다. 홍콩과 웨이크 및 괌도 공격할 것이었으며 웨이크와 괌을 공격한 부대는 비스마르크 제도를 장악할 것이었다. 이어서 제2단계가 시작되어 싱가포르가 함락되면 수마트라를 공격하고 최종적으로 자바를 점령할 것이었다.


1941년 12월 1일 현재 일본육군은 51개 사단, 1개 기병집단, 59개 여단급 부대, 그리고 151개 비행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본토에는 별도로 유수사단 10개가 있었다. 이러한 병력들은 만주, 중국, 한국, 대만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남방작전에 투입될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1941년 12월 1일 현재 일본육군의 편제 및 분포.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55)


남방작전을 담당할 남방군은 1941년 11월 6일에 설립되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이 지휘하는 남방군 휘하에는 제14, 제15, 제16 및 제25군이 소속되었으며 병력은 사단 10개와 혼성여단 3개였다. 제14군이 필리핀, 제15군이 태국, 제16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제25군이 말레이를 맡았다. 필리핀을 맡은 제14군은 제16 및 제48사단과 제65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제5비행집단의 지원을 받았다.


11월 10일부터 남방군의 고위 지휘관들이 모여 세부 사항을 다듬었으며 20일에 남방군은 개전 날짜를 제외한 작전 명령을 발령했다. 필리핀 작전의 세부 사항을 결정하기 위하여 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제5비행집단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 제3함대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 해군중장, 그리고 제11항공함대사령장관 츠카하라 니시조 해군중장이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혼슈 남단의 이와쿠니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필리핀 침공은 개전 당일 제5비행집단과 제11항공함대가 필리핀의 미군비행장을 공습하면서 시작될 것이었다. 동시에 해군과 육군의 선발대가 루손 북쪽 해상의 바탄 섬, 루손의 아파리, 비간, 레가스피, 그리고 민다나오의 다바오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을 점령할 것이었다. 비행장을 확보하면 즉시 비행기들이 이동하여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미군의 항공력과 해군력을 공격할 것이었다. 필리핀의 미군 항공력을 제거하면 제14군의 주공이 마닐라 북쪽의 링가옌 만에, 조공이 마닐라 남동쪽의 라몬 만에 상륙하여 마닐라로 진공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마닐라 인근에서 결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았다. 이 결전에서 승리하면 마닐라를 점령하고 마닐라 만의 섬들을 점령한 후 루손 전역을 점령할 것이었다. 대본영과 남방군은 루손 전투에 50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이후에는 제14군의 1개 사단이 지원부대 및 항공대 대부분과 함께 필리핀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고 제14군은 남은 전력으로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제14군은 전차의 존재를 포함하여 미군과 필리핀군의 전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나 방어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들은 미군과 필리핀군이 마닐라에 모여 일본군과 결전을 벌일 것으로 보았다.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이 1941년 10월에 열린 회의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이 바탄 반도로 철수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무시당했다.


제14군이 받은 사단은 제16 및 제48사단이었으며 전차연대 2개, 중형포 연대 2개와 대대 1개, 공병연대 3개, 대공포연대 5개, 그리고 다수의 지원부대가 공격을 지원할 것이었다. 일단 루손을 점령하면 제48사단은 항공병력 대부분 및 다수의 지원부대와 함께 필리핀을 떠날 것이었다. 대신 제65여단이 상륙하여 루손의 소탕 및 경비임무를 맡고 제16사단은 남쪽의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필리핀 공격은 약 550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제5비행집단 및 제11항공함대가 개전 당일 루손의 미군 비행장을 공습하면서 시작될 것이었다. 기습을 위하여 비행장에 대한 사전정찰은 없을 것이었다.

해군과 육군 사이의 협약에 따라 항속거리가 짧은 육군기가 북위 16도 이북을 공격하고 해군기가 남쪽을 공격할 것이었다. 따라서 클라크 비행장과 마닐라 근교의 비행장 및 카비테 군항 등 중요한 목표는 해군기가 공격하게 되었다. 또한 팔라우를 출발한 제4항공전대가 다바오와 레가스피 상륙을 엄호할 것이었다.


선발대가 상륙하여 비행장을 확보하면 육군기들이 아파리, 비간, 라오아그에 전개하고 해군기들은 레가스피와 다바오에 전개할 것이었다. 제5비행집단의 주력은 중폭격기의 운용이 가능하다고 잘못 알고 있던 아파리에 전개할 것이었다. 육군기의 이동은 개전 1주일 내로 완료할 것이었다. 그동안 다카하시 중장의 제3함대는 수송선단을 보호하고 대만과 필리핀 근해에서 대잠작전을 실시할 것이었다.


제3함대는 수송선단과 호위하는 순양함 및 구축함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상륙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보호하고 상륙작전을 지원하는 것이 임무였다. 기습을 위하여 상륙준비포격은 실시하지 않을 것이었다.


선발대의 상륙을 위하여 제3함대는 분산되었다. 바탄 섬에 상륙하는 제3급습대는 구축함 1척, 수뢰정 4척, 그리고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졌다. 아파리에 상륙하는 제1급습대는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졌다. 비간에 상륙하는 제2급습대는 경순양함 1척, 구축함7척,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졌다. 레가스피에 상륙하는 제4급습대는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및 기타 함정으로 이루어졌으며 경항모 류조와 수상기모함 치토세 및 미즈호의 항공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제14군 주력의 상륙에는 전함 2척(공고,하루나)과 중순양함 2척(아타고, 다카오), 그리고 제4, 제5 및 제8구축대로 이루어진 곤도 노부다케 중장의 제2함대도 참가할 것이었다.


1941년 11월 초부터 필리핀 침공에 참가할 부대들은 출발지로 이동했다. 만주에 주둔하던 제5비행집단은 11월 말까지 대만 남부로 이동을 마쳤다. 11월 23일에는 선견부대 2개가 가오슝에서 승선하여 펑후 제도로 이동했다. 11월 27일에서 12월 6일에 걸쳐 제48사단이 펑후 제도, 가오슝, 그리고 지룽에 집결했다. 11월 20일에는 제16사단의 선두가 나고야를 떠나 팔라우로 향했으며 닷새 후에는 주력이 나고야를 떠나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에 집결했다. 대만 남부 가오슝에 사령부를 차린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12월 1일에 대본영으로부터 12월 8일(도쿄 시간)에 작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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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필리핀 증원(2) - 해군 및 요약


필리핀의 방어를 책임진 해군 세력은 토머스 하트 해군대장의 아시아 함대로서 사령부는 마닐라 시내의 마스만 빌딩에 있었다.  필리핀을 담당한 제16해군관구 사령부는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에 있었다.


1941년 5월 현재 아시아 함대의 세력은 하트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휴스턴, 경순양함 마블헤드, 제1차 세계대전형 구축함 13척으로 이루어진 3개 구축함전단, 그리고 잠수함 17척, 잠수모함 1척 및 구조함 1척으로 이루어진 제20잠수함전대였다. 항공세력은 24대의 카탈리나 비행정과 4척의 수상기 모함을 보유한 제10초계비행단이었다. 이외에 포함 7척, 요트 1척, 소해함 6척, 급유함 2척, 원양 예인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함대의 일부인 제4해병연대는 상하이에 주둔 중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200명 정도의 해병대원이 베이징과 텐진의 미국 외교공관을 지키고 있었다. 아시아 함대의 전력으로 일본연합함대와 맞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므로 하트 제독은 개전 이후 필요하면 함대를 인도양으로 철수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아시아 함대는 영국 극동함대 및  네덜란드 함대와 함께 싸우게 될 것이었다. 1941년 5월 현재 영국은 극동 지역에 전함 1척, 항공모함 1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3척, 그리고 구축함 몇 척을 배치하고 있었으며 12월까지 전함 3척과 구축함 3척을 추가로 배치할 것이라고 미국에 약속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해군은 경순양함 3척, 구축함 7척, 그리고 잠수함 15척을 보유했다.

태평양의 미해군 세력은 대부분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는 허즈번드 킴멜 대장의 태평양함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1941년 5월 현재 태평양함대의 세력은 전함 9척,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8척, 구축함 50척, 잠수함 33척, 초계기 100대였으며 진주만 기습 당시도 비슷했다.


아시아 함대 총사령관 하트 제독은 제한된 전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1941년 6월부터 초계에 나서는 카탈리나를 하루 3대에서 6대로 늘렸으며 8월말까지 마닐라 만과 수빅 만에 기뢰를 깔아 부상한 상태의 잠수함과 흘수가 얕은 상륙주정같은 소형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선박은 정해진 수로로만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바탄 반도 남단에 있는 마리벨스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만들어 7월 22일에 올롱가포에 있던 건선거 듀이를 옮겼다. 이제 항구로서 올롱가포의 역할은 축소되어 주로 상하이에서 철수한 제4해병연대의 주둔지로 기능했다.


아시아함대의 증강은 잠수함 위주로 실시되었다. 1941년 11월 24일까지 아시아함대에는 12척의 잠수함과 잠수모함 홀랜드가 도착하여 이제 하트 제독은 29척의 잠수함을 거느렸다. 9월에는 어뢰정 6척이 도착했으며 맥아더 장군은 하트 제독에게 만일 원한다면 어뢰정 2척을 보유한 필리핀 연안경비대를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하트 제독은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중국에 파견되어 있는 포함, 제4해병연대, 그리고 베이징과 텐진의 해외공관을 지키는 해병분견대를 철수시키기 위하여 1941년 여름부터 해군부에 여러차례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가 떨어진 것은 11월 10일이 되어서였다.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하트 제독은 중국에 있던 포함 7척에게 철수명령을 내렸고 5척이 마닐라에 도착했다. 포함 중 가장 작은 웨이크는 무장 해제 후 상하이에 정박한 채 뒤에 남겨진 미국인을 위한 숙소 및 통신소 역할을 하다가 진주만 기습 직후 일본군에게 나포되었다. 충칭에 있어 바다로 나올 수 없었던 투투일라는 현지에서 중국에 공여되었다.


상하이에 주둔 중이던 새뮤얼 하워드 대령의 제4해병연대도 철수 명령을 받았다. 아시아함대는 제4해병연대의 철수를 위하여 프레지던트급 대형 정기여객선 매디슨과 해리슨을 임대했다. 두척의 여객선은 제4해병연대를 태우고 11월 27일과 28일에 상하이를 출발하여 11월 30일과 12월 1일에 올롱가포에 도착했다. 장교 44명, 부사관 및 병 728 명, 해군에서 파견된 인원 32명등 총 804명으로 이루어진 제4해병연대는 3인치 대공포와 50구경 기관총을 포함하여 1,000톤에 달하는 모든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필리핀에 도착하여 마리벨스, 카비테 및 올롱가포의 방어를 맡았다.


해리슨은 제4해병연대의 병사들을 내려주고 베이징과 텐진의 해외공관을 지키던 해병분견대를 구하러 북중국으로 돌아갔으나 도착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텐진의 캠프 홀콤에 주둔한 해병분견대 주력을 지휘하던 루터 브라운 소령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임장교 윌리엄 아슈스트 대령은 2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과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기 위하여 항복 명령을 내렸다.


1941년 12월 5일 현재 극동미육군을 증원하기 위하여 전쟁부가 승인한 병력과 장비는 선박 100만 총톤에 달했으며 10만 총톤은 이미 항해 중이었다. 필리핀군을 위한 75mm 야포 188문 이외에 군단 및 군 포병단이 사용할 155mm 곡사포 48문과 155mm 평사포 24문도 보낼 예정이었으며 기동성이 강화된 대공포연대 3개도 파견될 것이었다. 필리핀 주둔 미군을 증원하기 위한 병력과 장비는 1942년 3월까지, 그리고 필리핀군을 위한 장비 및 보급품은 7월까지 도착할 것이었다. 전쟁부는 필리핀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국 의회에 269,000,000 달러의 예산을 요청했으며 일부는 승인이 떨어진 상태였다.


전쟁이 터졌을 때 증원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펜사콜라 호송선단은 1941년 11월 29일에 하와이를 떠나 일본의 신탁통치령을 피해 남쪽 항로를 따라 필리핀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선단에는 제27폭격비행전대의 A-24 경폭격기 52대, P-40전투기 18대, 차량 340대, 75mm 야포 48문, 30구경 및 50구경 총탄 3,500,000발, 폭탄 600톤, 항공유를 채운 드럼통 9,000개가 실려 있었으며 2개 경포대대와 제7중폭격비행전대의 지상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선단은 필리핀에 도착하지 못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극동미육군항공대의 병력은 5,609명으로 7월의 2배로 늘어나 있었으며 B-17 폭격기 35대와 P-40 전투기 107대를 포함하여 277대의 비행기가 주로 루손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필리핀에 배치된 신형 항공기의 숫자는 하와이나 파나마보다 많아 미군 기지 중 가장 많았다. 클라크 비행장은 대공포 연대가 보호하고 있었으며 레이더 2세트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원시적인 대공경보체계가 가동 중이었다.


아시아함대 또한 증강되어 12월 7일 현재 중순양함 1척(휴스턴), 경순양함 2척(마블헤드, 보이시), 구형 구축함 13척, 잠수함 29척, 포함 6척, 어뢰정 6척, 카탈리나 32대, 그리고 각종 지원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상군도 급속히 팽창했다. 비록 훈련 상태가 불량하고 장비가 빈약하기는 했지만 11월말까지 필리핀군 예비사단 10개가 2/3 정도 동원을 마쳤으며 개전후 1주일 만에 필리핀군의 총병력은 100,000명을 넘겼다.

미육군은 7월 31일에 비해 장교 1,070명과 부사관 및 병 7,473명이 늘었다. 정원이 법으로 정해진 필리핀 스카우트는 약 12,000명으로 변화가 없었다. 7월 31일에 1,836명이었던 지원부대 병력은 4달 만에 4,268명으로 늘었다. 7월 31일 현재 2,407명이던 육군항공대 병력은 11월 30일 현재 5,609명으로 늘었으며 12월 7일에는 장교 754명과 부사관 및 병 6,706명에 달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미육군수비대 병력은 31,095명이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필리핀 주둔 미육군 현황.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44)


참고로 아래는 1941년 7월 31일 현재 필리핀 주둔 미육군의 상황이다.

 

(1941년 7월 31일 현재 필리핀 주둔 미육군 현황.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24)


맥아더 장군이 극동미육군 사령관이  된 이래 4개월 동안 필리핀의 미육군은 증강되었으나 여전히 미흡했다. 전쟁부는 맥아더 장군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증원은 1942년 4월이 되어야 완료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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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필리핀 증원(1) - 육군 및 육군항공대


미육군은 1941년 7월까지는 필리핀군의 훈련을 돕고 동원시 사단 및 연대 참모로 일할 400명의 장교를 파견하는 이외에 별도의 증원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8월에 들어서자 필리핀을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전쟁부가 방침을 바꾼 이유를 명확하게 나타낸 기록은 없지만 B-17 중폭격기와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B-17 폭격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한 전쟁부는 필리핀에 B-17 폭격기를 배치함으로써 일본을 억제하고 만일 침공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보잉 B-17 플라잉포트리스 중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Boeing_B-17_Flying_Fortress)


또다른 요인은 맥아더 장군의 현역 복귀였다. 전직 참모총장이자 미육군에서 극동 정세에 가장 밝은 맥아더 장군의 복귀는 사람들 마음에 필리핀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는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필리핀을 지킬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전쟁부의 분위기는 8월에 들어서자 필리핀을 포기하고 손실을 줄이자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필리핀을 방어하자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필리핀에 대한 증원 의도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드러낸 것은 전쟁계획국이 1941년 8월 14일에 제출한 보고서이다. 전쟁계획국장 지로 소장은 필리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공포, 신형 군용기, 그리고 전차라고 지적했다.

9월에 접어들자 필리핀 증원은 전쟁부의 우선순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전쟁부는 육군을 확장 및 훈련시키고 산업을 동원하며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고 육군항공대를 정비하는 와중에 최선을 다하여 필리핀에 증원 병력을 보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첫번째 증원선단이 9월 말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이때 도착한 부대는 3인치 대공포 12문, 37mm 대공포 24문, 50구경대공기관총 24정, 그리고 60인치 스페리 탐조등을 장비한 제200해안대공포연대(장교 76명, 부사관 및 병 1,681명), M-3 경전차 54대를 보유한 제194전차대대(장교 34명, 부사관 및 병 390명), 그리고 제17군수대대의 1개 중대(155명) 이었다. 10월 15일에는 경전차 54대를 장비한 제192전차대대와 75mm 자주포 25문이 도착했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11월 21일에 제192 및 제194전차대대와 제17기갑군수중대로 이루어진 임시전차단(Provisional Tank Group)을 만들고 제임스 위버 대령을 지휘관으로 삼았다.

물론 이것으로는 부족했으며 맥아더 장군은 1개 보병연대를 포함하여 추가 증원을 계속 요청했다.


(M-3 스튜어트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3_Stuart)


해안방어를 위하여 맥아더 장군은 155mm 야포 24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전쟁부는 1942년 4월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맥아더 장군은 12인치 열차포 4문, 8인치 열차포 4문, 155mm 야포 22문, 탐조등 30개를 추가로 요구했으나 이 요구사항은 12월 초에야 전쟁부에 도착했다.


필리핀군 사단을 위한 무기도 필요했다. 동원된 10개 필리핀군 사단을 위하여 75mm 야포 240문이 필요했으나 9월 말 현재 보유수량은 48문에 불과했다. 맥아더 장군은 사단용 이외에도 교육용 36문과 예비 60문을 합쳐 288문의 75mm 야포를 요청했다. 필리핀군 사단에게는 37mm 대전차포와 50구경 기관총도 필요했다.


이외에도 맥아더 장군이 요청한 무기와 장비는 상당했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8월에만 M1 개런드 소총 84,500정, 30구경 기관총 330정, 50구경 대공기관총 326정, 37mm 대전차포 450문, 81mm 박격포 217문, 75mm 야포 288문을 요구했다. 전쟁부는 9월 18일에 렌드리스 때문에 요청한 무기를 모두 공급하기는 어려우나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개런드 소총은 명확하게 거절했다. 물량이 딸려 해병대에도 주지 못하는 신형 소총을 필리핀에 줄 수는 없었다.


9월 10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철모 125,000개와 화학, 공병 및 통신장비를 요청했다. 한달 후 전쟁부는 요청을 받아들이고 철모를 즉시 보냈으나 현지에서 배급이 늦어져 많은 필리핀 병사들이 철모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다. 다른 장비는 선박을 물색하던 중에 전쟁이 터졌다.

9월 20일에 맥아더 장군은 2개 155mm 곡사포연대, 3개 105mm 곡사포연대, 1개 155mm 자주포 대대, 3개 대전차 대대, 그리고 근무, 통신, 의무부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250병상짜리 야전병원 10개를 차릴 수 있는 장비와 연대구호소용 장비 180세트도 요청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젔으나 선적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C 레이션 500,000식과 55갤런(208 리터)짜리 드럼통에 담긴 휘발유 1,000,000 갤런(약 380만 리터)은 도착했다. 휘발유는 바탄반도에 저장되어 필리핀 전역 동안 도움이 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증원 요청에 대하여 전쟁부는 1941년 11월 중순에 제34보병연대를 포함한 장교 1,312명, 간호사 25명, 부사관 및 병 18,047명과 전문 병과의 장교 200명, 부사관 및 병 2,968명으로 이루어진 육군 병력 22,552명의 증원을 결정했다. 이들의 선두는 12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선할 예정이었다.

무기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105mm 곡사포 40문, 75mm 야포 188문, 37mm 대전차포 35문, 그리고 30구경 기관총 123정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선적하기로 했다. 차량 또한 최대한 끌어모아 선박을 확보하는 대로 선적하기로 했다.


전쟁부는 동분서주한 끝에 11월 말부터 12월에 걸쳐 출항할 수 있는 수송선 9척을 확보했다. 여기에는 1개 경폭격 및 1개 중폭격비행전대, 1개 추격비행전대, 1개 정찰비행대대, 1개 보병연대, 1개 야포여단, 2개 경포대대, 그리고 지상 및 항공지원부대가 탈 것이었다. 마지막 수송선이 12월 20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예정이었다.


1941년 7월 현재 필리핀에 주둔한 미육군항공대는 약했다. 비행기 숫자는 210대에 지나지 않았고 31대의 P-41B  전투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구식기였다. 그때 미육군항공군단(U.S. Army Air Corps)에서 승격된 미육군항공대(U.S. Army Air Force) 사령관 헨리 아놀드 소장이 대담한 발언을 했다. 즉 필리핀에 주둔한 육군항공대에 합계 B-17 폭격기 272대와 68대의 예비기를 보유한 4개 중폭격비행전대와 각각 130대의 P-40 전투기를 보유한 2개 추격비행전대를 파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대담한 약속은 결국 지킬 수 없었으나 아놀드 장군은 최선을 다했다. 


50대의 P-40E 전투기가 공장에서 출고되자마자 바로 필리핀으로 떠나 10월 2일에 도착했으며 다른 부대에서 차출한 P-40B 전투기 28대도 9월 말까지 선적되었다.


B-17 폭격기는 스스로 날아서 필리핀까지 갔다.

1941년 9월 5일 아침에 B-17D 폭격기 9대와 승무원 75명으로 이루어진 제19중폭격비행전대 제14비행대대가 에멧 오도넬 소령의 지휘 아래 하와이의 히캄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들은 미드웨이, 웨이크, 포트모르즈비, 다윈을 거쳐 13,000km 가 넘는 거리를 비행한 끝에 9월 12일 오후에 마닐라 북쪽의 클라크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동안 지상요원들은 배를 타고 마닐라로 향했다. 추가로 26대의 B-17 폭격기가 11월 6일에 클라크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이제 필리핀의 B-17 은 35대가 되었다.

아놀드 장군은 12월에 33대, 1942년 1월에 51대, 그리고 2월에 46대를 추가로 보내어 3월까지 165대의 B-17 을 파견할 생각이었다. 같은 기간 B-17 및 B-24 의 생산 댓수가 220대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아놀드 장군이 자신의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폭격기의 증원도 시도되었다. 제27경폭격비행전대의 조종사와 지상요원들이 배를 타고 11월 20일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돈틀레스의 육군형인 A-24 경폭격기 52대를 실은 수송선 메이그는 도중에 하와이에 들렀다가 해군의 호위함이 준비된 11월 28일에 출항했으나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필리핀에는 35대의 B-17 폭격기와 81대의 P-40 전투기가 있었으며 52대의 A-24 경폭격기가 항해 중이었다. 또한 P-40 전투기 24대가 10월 19일에, 40대가 11월 9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스팀슨 전쟁장관에게 12월 31일까지 극동미육군항공대는 240대의 최신형 전투기를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전쟁부는 필리핀에 비행기를 증원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1941년 12월 1일 당시 미본토 밖에 배치되어 있던 미육군항공대 소속 비행기는 총 913대로 중폭격기 61대, 중형폭격기 157대, 경폭격기 59대, 전투기 636대였는데 필리핀에 중폭격기 절반 이상과 전투기 1/6 이 모여 있었으며 급격히 증강될 예정이었다.


 

(1941년 12월 1일 현재 필리핀과 하와이의 비행기 보유 현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html#3-2)


비행기의 증원과 함께 필리핀 주둔 육군항공대의 지휘관도 바뀌었다. 제3항공대사령관이던 루이스 브레러튼 소장이 11월 3일에 필리핀에 도착하여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이 되었다.

마닐라의 니엘슨 비행장에 사령부를 둔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유진 유뱅크 중령의 제5폭격사령부, 헨리 클라겟 준장의 제5요격사령부, 그리고 처칠 대령의 극동항공지원사령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5폭격사령부의 중추는 35대의 B-17 폭격기를 보유한 제19중폭격비행전대로 제14, 제28, 제30 및 제93비행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52대의 A-24 경폭격기를 운용할 제27경폭격비행전대도 편성되었으나 정작 비행기들은 수송선에 실려 바다를 건너는 중이었으며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제5요격사령부의 중추는 제3, 제17, 제20추격비행대대로 이루어진 제24추격비행전대였다. 11월에 본토에 주둔 중이던 제35추격비행전대 소속의 제21 및 제34추격비행대대가 필리핀으로 와서 임시로 제24추격비행전대에 소속되었는데 제35추격비행전대는 끝내 옮겨오지 않았다. 추격비행대대 중 델 카르멘 비행장에 전개한 제34비행대대를 제외한 4개 비행대대는 11월 말까지 모두 신형인 P-40 전투기를 장비했다.


(커티스 P-40 워호크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Curtiss_P-40_Warhawk)


비행장 정비도 실시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를 위하여 8월에 2,273,000달러, 10월에 7,000,000 달러의 예산을 받았다. 이 예산은 대부분 루손에 자리잡은 6개의 비행장을 정비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클라크 비행장이 일본기의 공습 거리 내에 있었으므로 세부에 B-17 을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기로 했다.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예산의 일부를 얻어 세부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민다나오의 델 몬테 농장에 있는 활주로를 정비하여 B-17 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임시 비행장을 만들기로 하고 11월 중순에 맥아더 장군의 허가를 받았다. 즉시 제20비행장전대가 민다나오로 파견되어 밤낮없이 일했으나 충분한 시설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12월 초가 되자 델 몬테 비행장은 필리핀에 전개 중인 B-17폭격기 35대 모두를 수용할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제7폭격비행전대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만일 델 몬테 비행장에 B-17폭격기 35대를 모두 옮겨오면 새로 도착할 제7폭격비행전대의 B-17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결국 브레러튼 소장은 12월 5일에 2개 비행대대 16대만 클라크 비행장으로부터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겼다. 수송기 역할을 한 B-18 폭격기 몇 대도 따라갔다. 

훗날 서덜랜드는 브레러튼이 B-17 을 모두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기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고도 절반만 옮기는 바람에 나머지 B-17 이 클라크 비행장에 남아 있다가 일본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케니 장군도 동조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브레러튼은 애당초 B-17 을 델 몬테 비행장으로 옮긴다는 것은 극동미육군항공대의 발상이었으며 오히려 서덜랜드 참모장은 델 몬테 비행장으로 이동한 B-17 이 세부 및 루손 비행장의 정비가 끝나는대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이동을 허가했다고 반박했다.


대공경보체계는 미흡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필리핀에는 레이더 7세트가 있었으나 인력 부족으로 실제로 가동한 것은 이바 비행장과 마닐라 외곽에 설치한 2세트 뿐이었다. 미본토에서 부랴부랴 필리핀에 보낼 제557대공경보대대를 만들었으나 이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2월 6일로 너무 늦었다.

레이더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원시적 대공경보망을 조직했다. 주로 눈이 밝고 귀가 예민한 필리핀인을 교육시켜 루손의 중요 지점에 배치했다. 이들이 접근하는 적기를 발견하고 즉시 전화나 전보로 니엘스 비행장에 있는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부로 보고하면 사령부에서 텔레타이프를 통해 클라크 비행장에 경보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대공방어의 또다른 축인 대공포 세력 또한 충분하지 못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 창설 당시 대공포 세력은 필리핀 해안포 사령부 소속의 제60해안대공포연대 뿐이었다. 연대 주력은 마닐라 만의 4개 섬(코레히도르, 엘 프라일, 카발로, 카라바오)과 바탄 반도 남단에 배치되어 마닐라 만 상공을 지켰다. 1개 대공포대와 1개 탐조등 소대는 수빅 만의 포트 윈트에 배치되었다. 9월 말에 도착한 제200해안대공포연대는 포트 스토첸버그에 배치되어 클라크 비행장을 지켰다. 필리핀에 배치된 3인치 대공포는 구형으로 고도 5,100m 까지만 사격이 가능했다.


따라서 필리핀 전체에서 대공포가 지키는 공역은 마닐라 만 상공과 클라크 비행장 뿐이었다. 11월 말에 전쟁부에서는 2개 대공포여단과 3개 대공포연대를 필리핀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다급해진 극동미육군사령부는 11월 29일에 제59해안포연대(US = 미군)의 1개 포대와 제91해안포연대(PS)의 2개 포대를 대공임무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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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필리핀군의 동원과 훈련


필리핀군을 동원하고 훈련시키며 보급하는 일은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시급하고 중요한 임무였다. 맥아더 장군은 1941년 9월 1일을 기하여 10개 사단, 75,000명의 필리핀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동시에 25,00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전국 훈련소의 막사를 7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막사의 수용 능력 때문에 동원 속도는 느렸다. 전국 훈련소의 막사에 일단 25,000명을 수용하고 이후 막사가 건설되는대로 추가로 동원했다. 따라서 9월 1일의 동원령은 사단마다 1개 연대씩 10개 연대에 대해 적용되었으며 10개 사단이 동원을 완료하는 시기는 1941년 12월 15일로 예정되었다. 동원된 병력은 훈련소에서 실전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갔으며 예비군 형성을 위한 훈련은 중단되었다.


동원된 필리핀군은 미국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그들은 자체의 군복, 전투식량, 군법, 급료, 승진 체계, 보급망을 가졌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미육군이 부담했다.


1941년 8월 15일에 창설된 6개 비행대대로 이루어진 500명 규모의 필리핀육군항공군단(Philippine Army Air Corps)도 동원명령을 받았다.


(필리핀육군항공군단 창설식.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html#2-4 P.25)


1941년 11월 초에 2번째 연대가 소집되었으며 11월 중순에는 사단사령부와 지원부대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전쟁이 터졌다. 개전 당시 10개 사단 중에서 동원을 완료한 사단은 없었다. 대전차포가 부족하여 대전차대대를 가진 사단은 하나도 없었고 야포가 부족하여 대부분의 사단이 빈약한 포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사단에는 평균적으로 전쟁부가 보내준 40명의 미군 장교와 조교 역할을 하던 20명의 미군 및 필리핀 스카우트 출신 부사관이 있었는데 7,500명의 사단 병력 중에 사단장이 믿을만한 인원은 사실상 이들이 모두였다. 미군 장교는 주로 사단과 연대의 참모 역할을 했으므로 부사관인 조교가 중대, 심지어는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전 초기에 조교들은 황당한 처지에 빠졌다. 즉 작전권과 지휘권이 없는 상태에서 중대와 심지어는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의 혼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전쟁 초기인 1941년 12월 중순까지 동원된 필리핀군의 숫자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산은 가능하다. 일단 정원 7,500명인 사단 10개의 동원을 12월 중순에 완료했기 때문에 75,000 명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상비군인 제1정규사단(1st Regular Division), 경찰대, 사단에 편제되지 않은 독립 부대와 임시 부대까지 합쳐 필리핀군의 병력은 120,000명 정도였다.


첫번째 연대가 동원되면서 교육을 위한 각종 학교가 들어섰으며 여기서 훈련받은 장교와 부사관이 추가로 동원된 필리핀인을 교육했다. 바기오에는 사단장이 될 미군 영관급 장교와 필리핀 고위장교, 그리고 사단 참모장이 될 장교를 교육시킬 학교가 들어섰다. 각 사단이 위치한 군관구에는 사단의 장교와 특기병을 교육시킬 학교가 들어섰다. 미군과 필리핀 스카우트에서 파견된 조교가 사단, 연대 및 대대 참모, 중대장, 소대장, 선임 부사관, 취사병, 그리고 중대 행정병을 교육시켰다. 교육생은 특기 교육과 함께 기본적인 보병훈련도 받았다.


해안포 학교는 포트 밀스(코레히도르)와 포트 윈트(그란데 섬)에 들어섰다. 포트 스토첸버그 부근의 포트 다우에는 필리핀 포병을 위한 포병학교가 들어섰다. 두개의 공병학교가 세워져 필리핀 사단의 공병대인 제14공병연대(PS=필리핀 스카우트)에서 파견된 조교가 가르쳤다. 통신 및 의무 학교는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 만들어졌다. 두번째 의무학교가 만들어져 사단 소속이 아닌 의무병을 교육했다. 마닐라 항에는 운전병 학교가 들어섰다.


필리핀군의 훈련은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인과 필리핀인 뿐만 아니라 필리핀인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비사야에서 더욱 심했는데 장교는 대부분 영어나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를 쓰지만 비사야 출신 병사는 대부분 비사야어를 썼기 때문이었다. 임시 변통으로 통역을 훈련시켰지만 끝내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

필리핀군의 기강은 단속이 필요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필리핀군에는 군사재판이 없었으며 지휘관들은 군법 문제에 무지했다. 무리도 아닌 것이 선임 부사관과 중대 행정병 중에도 문맹이 있었다.

훈련장 상태도 열악했다. 부랴부랴 사격장을 만들었으나 동원된 병사 중 많은 숫자가 자신의 무기를 한번도 쏘아보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었다.


거의 모든 장비가 부족했다. 군복은 쉽게 떨어졌으나 재보급이 되지 않아 아무 옷이나 걸쳐야 했다. 천으로 만들고 고무로 밑창을 댄 신발 또한 쉽게 닳았다. 배낭, 담요, 모기장, 천막도 부족했다. 엔필드 및 스프링필드 소총은 정수를 맞추었으나 공용 화기는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야전삽, 방독면, 심지어 철모마저 모자랐다. 전쟁이 발발하자 사단은 부족한 보급품을 스스로 구해야 했으며 개별 사단의 장비 수준은 보급장교의 열정과 수완에 따라 결정되었다.


한 필리핀군 사단의 경험을 통하여 당시 필리핀군의 열악한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제31사단(PA=필리핀군)은 루손 잠발레스 주의 산 마르셀리노 부근에서 1941년 11월 18일에 창설되었다. 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대령은 미군으로 필리핀 사단의 제45보병연대(PS)를 지휘하다가 바기오로 가서 사단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블루멜 대령이 미군 및 필리핀 스카우트 장교로 이루어진 참모와 함께 11월 18일에 부임했을 때 막사는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으며 상수도가 없어서 우물을 파서 식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하수도 시설도 부족하여 사단은 하수도부터 만들어야 했다.


사단의 첫번째 연대인 제31보병연대(PA)는 블루멜 대령이 부임하기 이전인 9월 1일에 소집되어 막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일에 소집되었어야 할 두번째 연대인 제32보병연대는 12월 6일에야 사단에 합류했다. 세번째 연대인 제33보병연대가 오히려 일찍 도착하여 11월 25일에 사단에 합류했다. 11월 18일부터 30일 사이에 의무대대, 수송대, 근무부대, 사단본부중대가 만들어졌다. 통신중대는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서 3개월 간의 교육을 마친 통신병들이 사단에 도착한 12월 1일에 만들어졌다. 포병대인 제31야포연대는 전쟁이 터진 이후인 12월 12일에 동원이 시작되어 26일에야 완편 전력인 2개 대대를 갖추었는데 그때 사단은 이미 바탄반도에 들어온 이후였다.


제31사단은 다른 필리핀군 사단과 마찬가지로 장비가 열악했다. 모든 병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유물인 30구경 엔필드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체구가 작은 필리핀인 병사에게는 지나치게 길었다. 또한 탄피 배출기가 약하여 자주 부러졌는데 교체가 불가능했다. 다른 보병화기로는 보병중대마다 브라우닝 자동소총 1정이 있었고 기관총 중대는 30구경 브라우닝 수랭식 기관총 8정을 보유했다. 보병연대는 50구경 기관총 2정과 3인치 박격포 6문을 보유했는데 포탄의 70% 가 불발이었다. 12월 7일 저녁에 제1차 세계대전형 75mm 야포 8문이 도착했는데 조준기와 사격통제장치가 없는 상태였다. 결국 전쟁이 터진 후인 12월 12일부터 제31야포연대는 편제상의 6개 포대 대신 2개 포대만으로 사단을 지원할 수 있었다.


차량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단본부와 수송중대는 합쳐 승용차 1대, 지휘차 1대, 지프 1대, 1/2톤 트럭 1대, 그리고 1.5톤 트럭 1대를 가지고 있었다. 제31보병연대는 지휘차 1대와 1.5톤 트럭 8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3개 연대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사단에는 이외에도 통신장비, 공병장비, 사무용품, 예비부품, 그리고 공구가 모자랐다.


개인장비도 턱없이 모자랐다. 군복은 쉽게 떨어졌지만 재보급이 불가능했다. 천으로 만들고 고무로 밑창을 댄 신발은 약하여 2주면 다 떨어졌다. 운이 좋은 병사는 가죽구두를 구해 신고 다녔다. 사단에는 철모도 없었고 방독면도 없었다.


식량은 지휘관에게 지급되는 운영비로 시장에서 구입했다. 제31사단이 주둔한 잠발레스 주는 원래 식량 생산이 부족한데다가 바탄반도로 들어온 다른 부대들이 식량을 먼저 사는 바람에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단 전용의 철도역은 원래 12월 1일에 개통되어야 했으나 필리핀 장교인 보급참모의 경험부족으로 1주일 이상 늦어져 전쟁이 터진 이후에야 개통되었다. 


계획대로라면 사단은 첫번째 연대가 동원되었던 9월 1일부터 이미 훈련을 실시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블루멜 대령이 부임한 11월 18일까지 훈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격장이 없어서 블루멜 사단장이 수소문한 끝에 올롱가포 해군기지의 사격장을 빌려 11월 24일부터 소총 사격 연습을 실시했다. 제31보병연대의 첫번째 대대는 50발씩 사격했고 두번째 대대는 25발씩 사격했다. 세번째 대대가 사격하려 할 때 중국으로부터 철수한 제4해병연대가 올롱가포에 배치되면서 사격장을 비워줘야 했다. 제31사단은 새로운 사격장을 만들기로 했으나 공사 도중 전쟁이 터졌다. 따라서 제32연대와 제33연대는 동원 이후 사격훈련을 전혀 하지 못했다.


부하들과 이야기해 본 블루멜 사단장은 이전에 실시했던 6개월 간의 초기 훈련 과정이 매우 부실했음을 알았다. 병사들은 6개월의 초기 훈련 기간 동안 30구경 소총이나 30구경 기관총을 5발씩 쏘아 보았을 뿐이었으며 50구경 기관총이나 박격포를 사격해 본 병사는 없었다. 초기 훈련 과정의 부실함은 다른 사단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포병의 훈련 상황은 더 엉망이었다. 2개 포대가 만들어지자 시험삼아 2발씩 쏘았는데 대부분 발사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 75mm 야포의 발사 광경을 본 적도 없었다. 공병대대는 창설 이후 기지 내의 도로만 만들었을 뿐 다른 훈련은 받지 못했다. 통신중대는 포트 맥킨리에서 훈련을 받고 왔음에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필리핀인 장교인 통신중대장은 같은 기지 내에서 1.6km 떨어진 두 부대 사이의 무선연락망도 만들지 못했다.


필리핀인 장교는 대부분 전투에 대비해 부하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몰랐으며 일부는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부사관인 미군 및 필리핀 스카우트 출신 조교가 실질적으로 대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필리핀인 대대장들을 대부분 미군 장교로 교체해야 했다. 장교 수준이 이러니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블루멜 대령의 표현에 따르면 필리핀인 병사는 장교가 나타나면 크게 구령을 외치면서 경례하는 것과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 이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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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극동미육군


필리핀 자치령이 국군을 키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듬해인 1940년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5월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독일에 무릎을 꿇더니 급기야는 6월 21일에 프랑스마저 독일에게 항복했다. 영국은 힘들여 생산한 장비를 됭케르크에서 몽땅 잃고 병력만 간신히 탈출시킨 후 독일의 본토 침공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는 처지로 굴러 떨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군은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고 1941년 4월에는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으면서 남방으로 진출할 경우 배후의 위험을 없앴다.


미국은 세력을 팽창시키는 일본에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1940년 7월 26일에 미국은 1911년 이래 유지되어 오던 미일통상조약의 갱신을 거부했다. 같은 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항공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와 고철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선적 가능한 품목으로 지정했다. 1941년 전반기까지 고철, 강철 그리고 휘발유의 대일 수출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같은 기간 중국에 대한 원조는 확대했다. 1940년 11월에 수출입 은행을 통하여 5천만 달러를 공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은 연말까지 1억 7천만달러의 차관을 장개석 정부에 공급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일본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압박을 받자 오히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게 경제협정을 맺자면서 압력을 강화했다.


전쟁의 위협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미국 의회는 주저하면서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1938년에 10억 달러에 불과하던 국방예산은 39년에 12억 달러, 40년에는 22억 달러가 되었다가 41년에는 138억달러로 급증했다. 하지만 늘어난 예산이 필리핀 방위에 기여한 정도는 미미했다.

당시 미국에게 국방예산 사용의 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 육군의 확장과 훈련

2. 산업 동원

3. 우방 원조

4. 해군 및 육군항공대 정비

5. 해외영토 및 식민지 방어


따라서 해외 영토 및 식민지 방어는 국방예산 사용의 우선순위에서 꼴찌였는데 그나마 필리핀은 해외영토 중에서도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미서해안을 지키기 위한 알래스카, 하와이 및 파나마의 방어가 우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이 1941년 7월 25일에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면서 필리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일본이 남진하자 1937년 12월 31일에 퇴역한 맥아더를 미육군에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41년 5월에 필리핀 장거리전화회사의 회장인 조셉 스티브놋이 워싱턴에 와서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스티브놋은 맥아더 장군을 복귀시켜 필리핀 군관구를 직접 통제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스팀슨은 마셜 육군참모총장에게 권고했다.


6월 초에는 맥아더 자신이 합동참모본부, 전쟁부, 그리고 대통령에게 복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만간 필리핀군을 미군에 흡수시키고 자신은 미육군에 복귀하여 극동 지역의 미군을 통합 지휘하는 임무를 맡고 싶다고 적었다. 이는 극동에 새로운 사령부를 만든다는 의미로서 영국은 이미 비슷한 사령부를 만든 상태였다. 극동에 새로운 사령부를 만든다는 것은 맥아더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며 필리핀 군관구 또한 같은 주장을 1941년 초부터 반복하고 있었다. 


마셜은 맥아더의 요청을 합참 내의 전쟁계획국(War Plan Division)으로 보내 검토를 명했다. 6월 6일에 전쟁계획국장 레너드 지로 준장은 반대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이 비슷한 성격의 사령부를 창설한 것은 사실이나 극동의 영국군과 미군은 처지가 달랐다. 영국군은 극동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반면 미군은 필리핀에 모여 있었으며 필리핀만 지키면 되는 입장이었다. 지로 준장은 맥아더가 현역에 복귀한다면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전쟁계획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육군 수뇌부는 맥아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는 미육군소장으로 복귀하는 동시에 새로 만들어진 극동미육군(U.S. Army Forces in the Far East = USAFFE)사령관직에 올랐다. 극동미육군은 필리핀 군관구와 필리핀 자치령 국군으로 이루어졌으며 필요하면 추가 부대가 소속될 수 있었다. 이로써 1935년 이래 처음으로 필리핀 군관구와 필리핀 자치령 국군의 지휘 계통이 통일되었다. 맥아더는 61세의 나이로 미육군소장에 복귀했으나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 20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미육군에 복귀한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사령부를 만들고 필리핀군을 훈련시키며 임박한 침공에 대비하여 증원군과 증원물자를 최대한 확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령부는 기존의 군사고문실 참모를 중심으로 하고 추가로 필요한 인원은 필리핀 군관구에서 충당했다. 8월 중순에 극동미육군사령부가 마닐라의 칼레 빅토리아 1번지에 들어섰다. 참모들의 나이는 43세에서 52세 사이였다.


참모장은 리처드 서덜랜드 중령이 맡았다. 대령을 거치지 않고 1941년 8월에 바로 준장으로 승진한 서덜랜드 참모장은 1946년까지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았으며 중장까지 승진했다.

부참모장은 리처드 마셜 중령이었는데 임명과 동시에 대령이 되었고 1941년 12월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맥아더의 평가에 따르면 마셜 부참모장은 미육군 최고의 보급장교였다.


맥아더 장군이 극동미육군사령관이 되었을 때 필리핀 군관구는 1,434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22,532명이었으며 그중에서 11,972명은 필리핀 스카우트였다. 전체 병력 중 7,293명이 보병이었으며 해안포부대는 4,967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력은 대부분 루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필리핀 군관구가 보유한 가장 큰 단위부대는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의 필리핀 사단(Philippine Division)이었다. 1941년 7월 31일 현재 필리핀 사단의 병력은 아래와 같다.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html#table1)


표를 보면 사단 병력 중 장교를 제외하면  제31연대와 헌병대 일부만 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필리핀 스카우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이 1,729명인 제31연대는 1941년 7월 31일 현재 정원을 371명 초과한 반면 제45 및 제57연대는 정원이 2,435명이었으니 약간 미달한 상태였다. 제23야포연대는 이름이 무색하게 75mm 산포를 장비한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24야포연대는 영국제 75mm 야포를 가진 2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필리핀 사단은 사단 단위로 기능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예하 부대는 흩어져 주둔했다. 사령부와 사단 주력은 마닐라 남쪽의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 주둔했다. 제31보병연대는 마닐라 시내에 있는 마닐라 병영에 주둔했고 제12보급연대의 1개 대대는 마닐라 항에 주둔했다.

제1/45대대(1개 중대 감편)는 바탄반도 남동쪽 해안에 있는 리메이 병영에 주둔했다. 포병, 제12군수중대 및 보급연대의 1개 소대를 포함한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마닐라 북쪽으로 80km 떨어진 클라크 비행장 부근의 포트 스토첸버그에 주둔했다.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P.24)

필리핀 사단을 제외한 필리핀 군관구 소속 부대는 항만방어부대(Harbor Defense), 제26기병연대, 제86 및 제88야포연대, 그리고 보급, 통신 및 헌병대 등이다.

항만방어부대는 코레히도르 섬의 포트 밀스에 사령부를 둔 조지 무어 소장이 지휘했다. 휘하 부대 중 카발로 섬의 포트 휴이, 엘 프라일 섬의 포트 드럼, 카라바오 섬의 포트 프랭크가 마닐라 만 입구를 방어했으며 그란데 섬의 포트 윈트가 수빅 만 입구를 방어했다.

제26기병연대는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로서 3개 중대를 가진 2개 대대로 이루어져 병력이 838명에 지나지 않았다. 연대 주력은 포트 스토첸버그에 주둔하고 F 중대는 마닐라 남쪽의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했다.

제86 및 제88야포연대도 역시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로서 포트 스토첸버그에 주둔했다. 이외에 제43보병연대가 있었는데 329명이라는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름만 연대일 뿐 사실은 제45연대에서 바기오와 민다나오에 파견한 분견대였다.

필리핀 군관구의 지원병력 중 육군 항공대를 제외하고는 보급부대와 의무대의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들은 주로 루손에 주둔하고 일부가 민다나오에 주둔했다. 제808헌병중대는 마닐라에 주둔했다.


1941년 8월 4일에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미육군항공대 세력이 맥아더 사령부 휘하로 들어오면서 극동미육군항공대(USAFFE Air Force)가 되었다. 세력은 빈약했다. 210대의 항공기 중 31대만이 그나마 신형기라고 볼 수 있는 P-40B 이었으며 나머지는 구식인 P-26, P-35, B-10, B-18, A-29, C-39 와 관측기들이었다.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은 포트 스토첸버그 부근에 자리잡은 클라크 비행장 뿐이었다.

항공대 사령부는 마닐라 부근의 니엘슨 비행장에 있었으며 주력은 마닐라 부근의 니콜스 비행장과 마닐라 북쪽의 클라크 비행장에 있었다. 클라크 비행장의 제4혼성비행전대는 휘하에 3개 추격비행대대, 1개 폭격비행대대 그리고 1개 관측비행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보유 기종은 P-26(21대), P-35(56대), P-40B(31대), O-46(10대), O-19E(3대), A-9(10대), C-39(1대), A-27(9대), B-10B(14대), B-18(18대)이었다. 나머지 비행기는 대부분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한 제20기지전대가 보유하고 있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설립과 함께 필리핀 군관구의 역할은 축소되어 주로 필리핀 군의 훈련을 맡았다. 이제 전투계획을 짜고 야전부대를 편성하여 지휘하는 일은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임무였다. 필리핀 군관구의 역할이 축소됨에 따라 사령관 조지 그루넛 소장의 위치가 어정쩡해졌다. 전쟁부는 1941년 10월 23일에 그루넛 소장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고 맥아더 장군에게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을 겸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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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필리핀군 건설


필리핀 자치령이 성립하기 전까지 필리핀의 방어는 미국이 전담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약 10,000명으로 절반은 미군이고 절반은 필리핀 스카우트(Philippine Scouts)였다. 필리핀 스카우트는 미군의 일부로 장교는 대부분 미국인이고 부사관 및 병은 필리핀인이었다. 1913년부터 필리핀 수비대는 필리핀 군관구(Philippine Department)로 불렸으며 미군 장성의 지휘를 받았다. 1901년에 창설된 필리핀 경찰대(Philippine Constabulary)는 이름과 달리 군대식으로 편성되고 훈련받았다.


1935년에 필리핀 자치령이 성립하자 필리핀 국군 건설이 과제로 떠올랐다. 국군 건설을 위해서는 군사 및 운영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필요했는데 필리핀인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자치령의 대통령 마누엘 케손은 자신의 친구이자 미육군 참모총장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자치령 정부가 국군을 건설할 수 있도록 군사고문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허락하자 맥아더는 1935년 10월에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마치고 미육군 소장의 신분으로 필리핀에 부임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MacArthur#Field_Marshal_of_the_Philippine_Army)


필리핀에서 맥아더가 맡은 직책의 정식 명칭은 '자치령정부 군사고문'(Military Advisor to the Commonwealth Government)이었으며 그 임무는 '국방체계를 형성 및 발전시키는 것' 이었다. 이 임무를 위하여 맥아더에게 주어진 권한은 광범위했다. 필리핀 원수의 계급을 받은 맥아더는 자치령의 전쟁부와 참모본부를 직접 통제했으며 미군 소속으로 맥아더의 권한을 벗어나 있던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 루시우스 홀브룩 소장도 본국으로부터 최대한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맥아더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소령과 제임스 오드 소령에게 실무를 맡겼다. 두 사람은 미육군대학의 지원을 받아 독립이 예정된 1946년까지 필리핀 자치령의 방어태세를 확립할 계획을 작성했다.

계획에 따르면 정규군은 소규모로 유지할 것이었다. 대신 매년 일정 병력을 징병하여 6개월간 훈련시킨 다음 예비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1년에 두번씩 예비군을 배출하여 방대한 예비전력을 갖춘다는 것이었다. 항공대는 소규모가 될 것이며 함대 또한 어뢰정 중심으로 적의 상륙을 물리칠 정도면 족할 것이었다. 사단의 정원은 7,500명이며 장비는 경제사정과 지형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갖출 것이었다. 


맥아더의 참모진은 소규모였다. 아이젠하워와 오드에 더하여 맥아더는 마닐라에 도착하자 필리핀 군관구에서 장교 4명을 차출했으며 해군참모로 예비역 해군장교인 시드니 허프를 기용했다. 1938년에 오드 대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리처드 서덜랜드 중령을 뽑았고, 다음해 아이젠하워 중령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리처드 마셜 중령을 받아들였다. 1937년 10월에 휴이 케이시 대위가 공병참모가 되었고 나중에 윌리엄 마쾃 소령이 대공참모가 되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 장군과 함께 했다.


필리핀 국회(Philippine National Assembly)는 1935년 12월 21일에 맥아더가 제출한 계획을 기반으로 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정규군은 6,000명의 필리핀 경찰대를 주축으로 한 10,000명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경찰대는 1938년에 군대에서 분리되었다가 1941년 말에 다시 군대에 흡수된다. 21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은 모두 징병 대상이었으며 이들은 6개월의 훈련을 거친 후 예비군에 편입될 것이었다. 한번에 2만명씩 1년에 2번 훈련을 실시하여 매년 4만명의 예비군을 배출함으로써 독립이 예정된 1946년까지 40만명의 예비군을 확보한다는 방침이었다. 초급 장교의 훈련을 위하여 루손의 바기오에 웨스트포인트를 본딴 사관학교를 만들어 매년 100명의 장교를 배출할 계획이었다.


자치령은 비슷한 인구를 가진 10개의 군관구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군관구마다 예비사단 1개씩을 배치하고 독립할 때까지는 3개씩 배치할 계획이었다. 루손과 인접한 민도로, 팔라완, 그리고 마스바테를 합쳐 5개 군관구가 설치되었다. 비사야에 4개 군관구가 만들어졌으며 민다나오와 술루제도를 합쳐 1개 군관구가 되었다.

군관구 사령관은 평시에 훈련과 방어준비를 책임졌으며 전시에는 군관구를 방어했다. 주지사들은 징병과 동원을 도와야 했다. 이론상 군관구 사령관이 해당 군관구의 방어를 책임졌지만 실제로 주요 섬(루손, 세부, 네그로스, 파나이, 레이테, 민다나오, 보홀, 민도로 등)에 대한 방어계획은 맥아더의 군사고문실(Office of Military Advisor)에서 작성했다.

국방법은 미국보다 더 긴 필리핀의 해안방어를 위하여 별도의 해군을 창설하지 않고 육군 소속의 연안경비대(Off Shore Patrol)을 만들었다. 이들이 사용할 어뢰정 36척은 1946년까지 영국에서 도입할 계획이었다. 어뢰정은 길이 20m, 폭 4m 로서 12기통 엔진 3개를 장착하여 41노트를 낼 수 있었다. 무장은 어뢰 2발, 폭뢰, 그리고 대공기관총이었다.

국방법은 또한 연안방어를 위하여 1946년까지 고속폭격기 100대와 전투기 및 지원기들로 이루어진 항공대를 만들 계획이었다.


맥아더가 1936년의 연설에서 밝힌 자치령 방어의 핵심 개념은 적이 필리핀을 점령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의 방어력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열강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

필리핀은 방어에 유리했다. 국토가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대군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어려웠다. 내륙은 교통이 불편하고 산지가 많았으며 해안 평야는 좁았다.

맥아더는 필리핀에 강력한 함대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강력한 함대는 바다 건너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으며 식민지가 없는 필리핀의 함대는 적의 상륙과 해상보급을 저지하면 충분했다. 적절한 항공지원을 받는다면 어뢰정 중심의 소규모 함대로도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1946년이 되면 필리핀이 충분한 방어력을 가지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필리핀 국군의 성장은 느렸다.

1936년은 필리핀 경찰대가 주축이 되어 훈련소를 만들고 기간요원을 육성하고 조교를 훈련시키면서 보냈다.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은 필리핀 스카우트를 조교로 제공했으며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평가하고 행정업무를 조직하기 위하여 미군 장교를 파견했다. 1936년 말이 되자 조교의 훈련과 훈련소 건설이 끝났다.

1937년 1월 1일에 2만명이 입소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말까지 장교 4,800명과 부사관 및 병 104,000명이 훈련을 마치고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보병훈련은 필리핀 각지에 흩어진 훈련소에서 실시했다. 야포훈련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앙헬레스 부근의 포트 스토첸버그에서 실시했다. 해안포 훈련은 코레히도르 섬에서 파견나온 장교의 지휘 아래 포트 스토첸버그나 수빅만의 그란데섬에서 실시했다. 전문적인 훈련은 마닐라 남쪽의 포트 윌리엄 맥킨리에서 실시했다.


필리핀 국군의 건설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유능한 장교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필리핀 경찰대의 장교들은 우수하고 경험이 풍부했으나 훈련보다는 치안에 관심이 많았다. 가장 뛰어난 장교 중 일부는 필리핀 스카우트에서 왔으며 이들은 고위장교가 되었다.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훈련소와 예비역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할 다수의 초급장교였다. 바기오에 설립된 사관학교에서 장교가 나오려면 4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숫자도 턱없이 모자랐다. 필리핀군 수뇌부는 징집병에게 눈길을 돌렸다.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병사 중에서 우수한 자를 모아 6개월의 추가 훈련을 거쳐 부사관으로 삼았으며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장교후보학교(Officer Candidate School)에서 교육시켜 소위로 임관했다. 일부 장교는 대학에 설립한 학생군사교육단(ROTC)을 통하여 충원했다.


항공대 정비도 예정보다 늦어졌다. 마닐라 외곽에 필리핀군의 항공기지가 건설되고 3대의 훈련기를 도입하여 훈련이 시작되었다. 1940년 말이 되었을때 항공대는 약 40대의 비행기와 100여명의 조종사를 보유했다.


함대의 정비는 가장 부진했다. 2척의 어뢰정을 인수한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이 수출을 중단했다. 자치령 정부는 엔진은 제3국에서 수입하고 선체는 스스로 만드는 방식으로 어뢰정을 건조했으나 1941년 말까지 1척을 완성하는데 그쳤다. 어뢰정 3척으로 강력한 함대를 가진 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한 적을 막으려면 역시 강력한 함대를 가진 나라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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