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공권 및 제해권 상실
레인보우5 계획에 따르면 아시아함대의 임무는 육군과 협력하여 필리핀 방어를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었다. 아시아함대 사령관은 필요할 경우 함대를 영국이나 네덜란드 기지로 철수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아시아함대의 세력은 북부 루손부터 보르네오까지 2,400km 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다. 마닐라 만에는 구축함 5척(포프, 존 포드, 폴 존스, 피어리, 필즈베리)가 있었는데 피어리와 필즈베리는 오버홀 중이었다. 잠수함은 29척이 있었으며 3척(샤크, 시드래건, 시 라이언)은 오버홀 중이었다. 잠수모함은 2척(캐노퍼스, 홀랜드)이었으며 오투스는 잠수모함으로 개조하던 중 전쟁이 터지자 그냥 보급함으로 사용했다. 포함은 상하이에서 탈출한 5척에 홍콩에서 탈출한 민다나오를 더해 6척이었다. 프랭크 와그너 대령이 지휘하는 제10초계비행단은 카탈리나 28대, 잡용기 4대 및 수상정찰기 1대, 수상기모함 2척(랭글리, 차일즈)로 이루어져 카비테와 올롱가포에 주둔했다. 이외에 소해함 5척, 급유함 2척, 예인선 3척(케즈윅은 민간선박을 징발)이 있었다. 건선거 듀이는 마리벨레스에 있었다. 카비테에 사령부를 둔 프랜시스 록웰 소장의 제14해군관구는 약 2,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새뮤얼 해리스 대령의 제4해병연대는 약 1,600명으로 증강되어 올롱가포에 주둔했다.
(CA-30 휴스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USS_Houston_(CA-30)
많은 함정들이 제5기동부대로 편성되어 마닐라 만 남쪽에 흩어져 있었다. 아시아함대의 기함인 동시에 제5기동부대의 기함인 중순양함 휴스턴은 파나이 섬의 일로일로에 정박 중이었다. 경순양함 보이시는 세부를 지나고 있었다. 보이시는 원래 태평양함대 소속으로 증원선단을 호위하여 마닐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하트 제독의 요청으로 아시아 함대에 편입되었다. 잠수함 S-36은 링가옌 만 바깥을 초계 중이었고, S-39는 남부 루손의 소르소곤 만을 초계하고 있었다. 카탈리나 4대는 수상기모함 윌리엄 프레스톤과 함께 다바오에 있었고 수상정찰기 4대는 수상기모함 헤론과 함께 팔라완에 있었다.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의 타라칸에는 경순양함 마블헤드와 구축함 4척이, 발릭파판에는 구축함 4척과 구축모함 블랙호크가 있었다.
(나카지마 B5N 97식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Nakajima_B5N)
아시아함대의 함정 중 12월 8일에 공습을 받은 함정은 다바오 만에 정박 중이던 수상기모함 윌리엄 프레스톤이 유일했다. 8일 오전 8시에 약 200km 떨어진 일본의 경항모 류조에서 발진한 97식 함상공격기 13대가 아이오이 다카히데 대위가 이끄는 96식함상전투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공격해 왔다. 4대의 카탈리나 중 2대는 정찰을 나간 상태였고 2대가 해면에 정박하고 있다가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1차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수상기 모함 프레스톤은 재빠른 회피기동으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대공기관총으로 반격을 가하여 96식함상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 일본기들이 사라지자 프레스톤은 카탈리나 승무원들을 구한 다음 다바오 만을 떠났다.
(미츠비시 A5M 96식함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A5M)
제5기동부대 사령관 윌리엄 글래스포드 소장은 8일 정오 경에 일로일로에 있던 중순양함 휴스턴에 사령기를 올렸다. 곧 경순양함 보이시가 달려와 합류했고 2척의 순양함은 하트 제독의 명령에 따라 발리파판을 향하여 남하했다. 카비테에 정박 중이던 수상기 모함 랭글리도 8일 저녁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마닐라 만을 탈출하여 발릭파판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아시아 함대의 유력한 수상함정들은 대부분 12월 10일까지 필리핀을 벗어나 남하했다.
일본군은 9일에도 공습을 계속했다. 일본해군은 니콜스 비행장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계획했으나 또다시 대만에 안개가 끼는 바람에 육상공격기 7대로 공습 규모를 축소했다. 일본기는 동트기 전에 마닐라 근교의 니콜스 비행장을 폭격하여 P-40전투기 3대와 B-18폭격기 1대를 포함한 비행기 몇 대를 파괴하고 격납고를 비롯한 지상시설을 파괴했다. 미군 3명이 전사하고 중상자 4명을 포함하여 9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은 대공포 배치를 조정했다. 제60대공해안포연대의 기관총 포대가 8일 밤에 코레히도르 섬을 떠나 마닐라 항과 니콜스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클라크 비행장 상공을 지키던 제200대공해안포연대 소속의 병력 500명은 마닐라로 파견되어 필리핀병기창에서 꺼내온 장비로 무장한 후 제515대공연대가 되었다. 10일에 제515대공연대의 3인치 대공포 8문은 마닐라에, 3문은 니엘슨 비행장 동쪽에 배치되었다. 37mm 대공포 4문은 니콜스 비행장에, 4문은 니엘슨 비행장에, 4문은 마닐라에 배치되었다.
9일 아침이 되자 미군은 정찰기를 내보냈다. 오전 8시에 클라크 비행장에서 B-17 한대가 대만 촬영 임무를 띄고 이륙했으나 기계적 고장으로 되돌아왔다. 전투기는 북부 루손을 정찰했으며 해군의 제10초계비행단은 서쪽과 북서쪽 해상을 정찰했다. 하루종일 잘못된 정찰보고가 난무했다. 하트 제독의 회고에 따르면 아무 것도 없는 해상에서 적의 수송선이나 전함을 보았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민다나오에 있던 B-17은 루손으로 돌아왔다. 세실 콤즈 소령이 지휘하는 6대의 B-17이 45kg 짜리 폭탄을 20발씩 실은 채 9일 아침 7시 30분에 델몬테 비행장을 이륙하여 오후 2시 30분에 클라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전날처럼 지상에서 파괴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재급유를 받고 다시 이륙하여 해가 질 때까지 공중에 머물렀다. 오후에는 또다른 B-17 폭격기 7대가 델몬테 비행장을 떠나 클라크 비행장 서쪽의 산 마르셀리노 임시비행장에 착륙했다.
(루손의 미국 비행장.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AAF-I-6.html P.202)
10일에 일본군은 니콜스 비행장과 카비테 해군기지를 목표로 재차 공격을 가했다. 오전 10시에 대만의 비행장을 이륙한 일본해군기들은 오전 11시 15분에 미군 레이더에 잡혔다. 10대의 P-40 을 가진 제17추격비행대대가 마닐라 만 상공에, 역시 10대의 P-40 으로 이루어진 제21추격비행대대가 마닐라 항구 상공에, 그리고 15대의 P-35를 가진 제34비행대대가 바탄반도 상공에 전개했다. 제3항공대 소속 제로기 34대가 마닐라만 상공에서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는 사이 1식육상공격기 27대가 니콜스, 델 카르멘 및 니엘슨 비행장을 공격했다. 주요 목표인 니콜스 비행장에는 폭탄이 비처럼 쏟아져 막사, 사무실, 그리고 창고를 파괴했다. 이어서 미군전투기를 제압한 제로기가 몰려들어 이틀 전과 마찬가지로 기총소사를 가했다. 대공포화도 없었고 요격기도 없었다. 미군 전투기는 모두 마닐라만 상공의 공중전에 투입되었다. 이날 격추된 일본기는 제로기 2대였다.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 해군기지도 공격을 받았다. 육상공격기 27대가 6,000m 고도에서 폭격을 가했는데 매우 정확하여 폭탄은 거의 모두 해군 기지 내에 떨어졌다. 이어서 제로기 18대의 호위를 받는 27대의 육상공격기가 함정들을 노리고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의 3인치 대공포 9문이 불을 뿜었으나 5,100m 가 한계고도였다. 이날 일본기의 피해는 제로기 3대였다.
카비테 기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발전기, 진료소, 창고, 사무실, 막사 및 장교 숙소, 매점, 우체국, 통신소가 직격탄을 맞았으며 불길이 강풍을 타고 번져 진화가 불가능했다. 약 500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어뢰정비소가 직격당해 구축함용 어뢰 230발도 터졌다. 주탄약창이 폭발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해군기지 전부와 카비테 시가지의 1/3이 불길에 휩싸였다. 하트 제독은 마닐라의 마스만 빌딩 옥상에서 카비테 기지가 불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11일 아침이 되자 불길은 더욱 거세어졌다. 하트 제독은 제14해군관구 사령관 록웰 소장과 의논하여 카비테를 포기하고 남은 보급품과 부품, 어뢰, 기뢰, 그리고 탄약을 마닐라, 코레히도르 및 마리벨레스로 옮겼다. 다만 생글리 곶의 통신소와 연료보급창은 최대한 오래 유지하다가 코레히도르로 철수하기로 했다.
카비테의 피해는 건물과 인명에 한하지 않았다. 부두에 계류되어 있던 잠수함 시라이언은 직격탄 2발을 맞아 4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침몰했으며 나란히 정박 중이던 소해함 비턴도 침몰했다. 역시 나란히 정박 중이던 시드래건은 잠수모함 피젼이 마지막 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끌어낸 덕분에 피해는 입었으나 침몰은 면했다. 오버홀 중이던 구축함 피어리는 폭탄에 맞아 전방 마스트가 반으로 쪼개졌다. 부두에 정박 중이던 예인선과 바지 몇 척도 피해를 입었다.
10일 저녁에 하트 제독은 워싱턴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군이 제공권을 가지고 있는 한 카비테는 해군기지로 사용하기 어렵지만 최대한 오랫동안 육군과 협력하여 잠수함 및 항공작전을 지속하겠다고 보고했다.
수상함정은 철수해야 했다. 하트제독의 명령에 따라 구축함 2척, 포함 3척, 잠수모함 2척, 그리고 소해함 2척이 제5기동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떠났다. 훗날 하트 제독은 그때 좀 더 많은 함정을 남쪽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개전 당시 마닐라 항에는 약 40척의 상선이 정박 중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해군은 마닐라 만을 완전히 봉쇄했다. 상선들은 해군요원의 지원을 받아 위장한 다음 흩어져 마닐라 만의 구석진 곳에 숨었다. 그러나 10일 오후에 일본기가 상선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다. 하트 제독은 11일 밤에 상선의 출항을 허가했다. 1척을 빼고 모든 상선이 탈출에 성공하여 이후 연합군 반격의 초기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은 항공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1일에는 대만 기상이 나빠 공세를 쉬었고 12일부터 다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12일 아침이 되었을 때 극동미육군항공대는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가용한 P-40 은 22대로 줄었고 6대가 수리 중이었다. 이외에는 8대의 P-35 와 고색창연한 P-26 몇 대가 미군이 가진 전투기의 모두였다. B-17 은 12일 아침에 16대가 가용했으나 5대는 저고도 작전만이 가능했고 다른 4대는 아예 공격작전에 투입하기 힘든 상태였다.
미군은 공중전이나 폭격을 피하고 정찰 위주로 최대한 오래 항공작전을 지속하기로 했다. 전투기는 클라크 및 니콜스 비행장에 주둔했으며 B-17 은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12일 오전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대만 가오슝에서 이륙한 1식육상공격기 63대가 이바 및 클라크 비행장을 폭격했다. 미군전투기는 대부분 전투를 피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피했으나 미군기 10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이날 아침에 올랑가포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7대가 루손 해안을 따라 남하 중이라고 잘못 보고된 일본항공모함을 찾으러 출격했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마침 마닐라 비행장을 폭격하려는 육상공격기 52대를 호위하던 제로기 63대가 해면에 착수한 카탈리나를 공격하여 7대를 모두 파괴했다. 승무원들은 대부분 해안으로 도망쳤으나 2명이 전사했다. 이날 일본의 피해는 육상공격기 1대였다.
13일에도 일본은 200대 이상의 비행기를 내보내어 루손을 공격했다. 이제 루손 북부에 전개한 육군전투기가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비간에 진출한 비행제24전대는 13일 아침에 97식전투기 8대를 보내어 델 카르멘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어서 오전 10시 30분에는 6대가 클라크 비행장을, 오후 1시 30분에는 9대가 카바나투안 비행장을 공격했다.
아파리에 진출한 비행제50전대는 97식전투기 9대를 내보내어 오전 10시에 클라크 비행장을, 오후 12시 30분에 카바나투안 비행장을 공격했다.
아직 대만에 주둔 중이던 육군기도 공격에 참가했다. 조주에 주둔한 비행제14전대는 97식중폭격기 6대를 내보내어 오전11시에 클라크 비행장을 공격했다. 폭격기들은 4,000m 고도에서 50kg 짜리 폭탄 60발을 떨어뜨렸다. 오후 2시에도 6대의 97식 중폭격기가 클라크 비행장을 재차 공격했다.
대만 저둥에 주둔 중이던 비행제8전대는 오전 8시 30분에 99식경폭격기 17대를 발진시켰다. 경폭격기들은 탈락과 바기오를 폭격하고 오후 1시 30분에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이 폭격은 항속거리 800km 인 99식경폭격기의 한계에 가까운 장거리 폭격이었다.
이날 상실한 육군기는 없었다.
13일 오후 12시 30분부터는 일본해군기가 나타나 델카르멘, 클라크, 니콜스, 카바나투안, 그리고 바탕가스를 공격했다. 수빅만 상공에서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일본해군의 피해는 제로기 2대였다.
13일 저녁이 되자 일본군이 루손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은 살아남은 제10초계비행단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과 수상기모함 3척을 남쪽으로 보냈다. 이제 필리핀에 남은 해군 세력은 구축함 2척(1척은 수리중), 어뢰정 6척, 어뢰정모함 2척, 포함3척, 잡다한 지원함정과 잠수함 27척으로 줄어들었다. 하트 제독은 잠수함이 활동을 지속하는 한 마닐라에 남아 함대를 지휘하기로 결심했다.
민다나오에는 16대의 B-17 이 남아 있었으나 임시 비행장에 불과한 델몬테 비행장에는 B-17에게 적당한 시설이 없었다. 엔진, 프로펠러, 그리고 예비 부품이 없어서 일부 B-17을 부품 공급용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도구도 부족했다.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공습경보로 B-17은 이륙하여 저녁까지 공중에 떠 있어야 할 경우가 많았고 밤에도 공습경보 때문에 승무원과 정비원들이 밤잠을 설쳤다. 이런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실시하기는 어려웠다.
극동미육군항공대 사령관 브레러튼 소장은 B-17을 호주 북부의 다윈까지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의 승인을 받았다. 12월 17일 저녁까지 10대의 B-17이 델몬테를 떠나 호주 다윈의 바첼로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제 B-17은 필요시 델몬테나 클라크 비행장을 전진 비행장으로 사용할 것이었다. B-17의 후퇴는 시의적절했다. 이틀 후인 12월 19일에 일본 경항모 류조의 함재기들이 델몬테 비행장을 공격했다. 일본전투기가 저공으로 비행장을 누비며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남아있던 B-17폭격기들은 잘 분산해서 정성들여 위장한 덕분에 공격을 면했다. 그날 저녁에 아직 남아있던 B-17 폭격기 4대는 델몬테 비행장을 떠나 바첼로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이제 필리핀의 미군항공력은 약간의 전투기로 줄어들었다. 상륙군을 싣고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요격하고 상륙한 일본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임무는 약간의 항공기와 아시아 함대의 잠수함이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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