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본해군(1)

 

1921년의 워싱턴 조약에서 일본은 주력함을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10 :10 :6 의 비율로 제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1931년의 런던 조약에서 일본은 주력함 비율에서 10 :10 :6 을 유지했으나 보조함 비율에서는 10 :10 :7,  잠수함은 동률을 인정받았다.

 

제2차 런던조약을 앞두고 군국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에게 주력함과 보조함 모두에서 동률을 요구했다.

이는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의 압도적 우세를 인정하라는 소리로 미국과 영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일본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본은 1936년 1월 15일에 군축조약에서 탈퇴했고 연말에 런던조약의 시효가 만료되면서 세계는 건함경쟁시대로 돌아갔다.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1936년 군축조약이 실효되었을 때, 그리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 영국, 및 일본의 전투함 배수량을 비교해보면 일본해군의 배수량이 늘어났다는 것이 눈에 띈다.

 

1922년 워싱턴 조약에 의하여 초과분을 폐기한 이후(단위 : 만톤)

 

 

미국

영국

일본

 전함 및 순양전함

52.6

55.9

30.1

 항공모함

1.3

8.8

1.5

 순양함

18.3

39.3

14.2

 구축함

36.3

24.5

6.5

 잠수함

4.9

7.6

2.4

 합계

113.4

136.1

54.7

 

 

1936년 런던군축조약 실효시(단위 : 만톤)

 

 

미국

영국

일본

전함 및 순양전함

46.4

47.5

31.2

항공모함

8.1

11.5

6.8

순양함

24.9

35.9

24.2

구축함

21.6

19.1

9.6

잠수함

6.8

5.2

6.6

합계

107.8

119.2

78.4

 

1941년 진주만 기습 당시(단위 : 만톤)

 

 

미국

영국

일본

전함 및 순양전함

53.4

44.3

35.7

항공모함

13.5

16.1

17.8

순양함

32.9

47.1

29.9

구축함

23.7

26.8

15.4

잠수함

11.7

5.5

10.7

합계

135.2

139.8

109.5

 

 

1922년에 워싱턴 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일본해군의 배수량은 미해군의 48%, 그리고 영국해군의 40% 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19년 동안 미해군은 218,000 톤이 늘어나고 영국해군은 겨우 37,000 톤이 늘어나는 동안 일본해군은 548,000 톤이 늘어서 2배가 되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해군의 배수량은 미해군의 81%, 그리고 영국해군의 78% 에 달하였으며 태평양에서는 연합군 해군을 합친 것보다 우세했다.

게다가 일본해군의 함정들은 잘 정비되었고 대규모 개장을 실시하여 성능 또한 좋았다. 

 

육군과 해군을 통틀어 일본군 최고사령관은 천황이었으며 천황의 통수권 행사를 돕기 위하여 군사참의관회의가 있었다.

군사참의관회의에는 육상, 해상, 참모총장(육군), 군령부총장(해군)과 군의 원로인 군사참의관들,그리고 필요할 경우 내각의 각료들이 참석했다. 

작전은 참모본부(육군)와 군령부(해군)에서 짰으며 전쟁시에는 이 두 기관을 합쳐 대본영을 만들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중일전쟁이 터지자 1938년 11월에 대본영을 만들면서 군사참의관회의를 유명무실화하고 그 기능을 대본영-정부연락회의로 옮겼다.

연락회의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천황, 수상, 외상, 육상, 해상, 참모총장, 그리고 군령부총장이었으며 천황이 참석하기 때문에 어전회의라고도 불렀다.

미국 및 영국과의 개전을 결의한 것이 바로 이 대본영-정부연락회의였다.

 

해군의 작전은 군령부와 연합함대사령부에서 짰으며 협의를 통하여 의견을 조율했다.

만일 육군의 도움이 필요하면 참모본부와도 협의해야 했다.

육군도 상륙작전같은 경우 해군과 협의를 거쳐야 했다.

고위 레벨에서는 이런 식으로 육군과 해군 사이에 의사교환이 일어났으나 그 아래로는 거의 의사교환이 없었다.

 

일본의 육해군은 알력이 심하여 통합전력 발휘에 지장이 많았다.

전쟁 후반기의 섬 전투처럼 고립된 전장에서도 섬 사령관인 육군 장교가 휘하의 해군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일본은 섬나라였지만 해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존재였으며 일본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군의 훈련이나 조직은 영국해군의 영향을 받았으며 러일전쟁 당시 함정들도 대부분 영국에서 건조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함정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여 제1차 세계대전 즈음에는 함정을 대부분 국내에서 건조했다.

함정의 절반 가량은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그리고 마이즈루에 있는 4대 해군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나머지는 민간조선소가 건조했다.

일본의 조선소는 훌륭한 함정을 건조했으나 대량 건조 기술을 개발하거나 전시에 자재가 모자라는 상황에서 함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전함들은 미국의 구형전함들보다 빨랐으며 다른 면은 비슷했다.

일본이 건조한 야마토 급 전함은 기준배수량 64,000 톤에 460mm(18.1인치) 주포 9문을 장착하여 기준배수량 45,000 톤에 16인치(406mm) 주포 9문을 장착한 미해군 최대의 전함 아이오와 급보다 훨씬 컸다.

 

(일본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 최강의 함대항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항공모함 세력은 정규항공모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을 포함하여 10척의 항공모함, 배수량 178,000 톤으로 항공모함 7척에 배수량 135,000 톤을 보유한 미해군이나 역시 7척에 배수량 161,000 톤을 보유한 영국해군보다 규모가 컸다.

함재기도 뛰어나 전투기인 제로기나 뇌격기인 97식 함상공격기는 당시 동급 기종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엄청난 경쟁율을 보이는 지원자 중에서 까다롭게 뽑아 혹독한 훈련을 거친 다음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일본해군의 조종사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에서 최초로 여러 척의 항공모함을 뭉쳐 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한마디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세계 최강이었으며 진주만 기습을 비롯하여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의 놀라운 성공은 강력한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 힘입은 바 컸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군축조약 시기 만들어진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조약이 실효한 후 대규모 개장을 실시했다.

개장으로 배수량이 30% 가까이 늘었으나 기관 출력 또한 증가하여 속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미국 중순양함들보다 훨씬 컸으며 속력은 비슷했다.

무장은 8인치 주포 10문을 갖추어 9문인 미국 중순양함보다 화력이 강했으며 미국 중순양함들과 달리 어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순양함들은 10,000 톤에 육박하는 미국 경순양함의 절반 정도 크기였으며 대부분 구축대의 기함을 맡았다.

 

여러 임무를 소화하는 만능함의 성격이 강한 미국 구축함에 비해 일본 구축함은 대함 전투에 특화된 경향이 있었다.

일본 구축함의 50구경장 5인치 양용포는 미국 구축함의 38구경장 5인치 양용포보다 대공포로서는 열세였으나 함포로서는 우수했다.

일본해군은 구축함의 주포인 5인치 함포의 배치 방식에서 미해군을 앞서갔다.

1928년에 취역한 후부키 급에서 5인치 양용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을 채택한 이래 일본 구축함들은 흔들림없이 5인치 양용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이라는 기조를 이어갔다.

미국은 1935년에 취역한 포터 급에서 5인치 함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을 채택했으나 당시의 5인치 포는 양용포가 아니었으며 이후 미국은 연장포탑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단장과 연장 포탑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결국 미국이 구축함의 5인치 양용포를 폐쇄형 연장포탑에 장착하는 방식을 확정한 것은 1944년에 취역한 알렌 섬너 급부터였다.

 

일본의 잠수함 부대는 20톤짜리 잠수정부터 기준배수량 3,530톤에 3대의 수상기를 실을 수 있는 대형잠수함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주력은 I 형 잠수함이었으며 보다 작은 구형 Ro 형 잠수함이 보조 역할을 했다.

I 형 잠수함은 미국의 함대형 잠수함들보다 배수량이 크고 속력이 빨랐으나 수중 소음이 심한 편이었는데 이는 일본해군의 잠수함 운용 사상과 관련이 있었다.

잠수함을 통상파괴의 수단으로 사용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일본해군은 잠수함을  함대결전에 앞서 정찰을 하고 뇌격을 가하여 적의 전력을 깎아두는 역할을 하는 전투함대의 보조전력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전투함들과 합동작전을 펼 수 있도록 속력이 중요한 요소였으며 수중 소음 문제는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1931년 이전의 일본해군은 상륙작전 능력이 빈약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상륙작전 능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여 상륙주정, 소형 수송선, 초계정 및 포정을 다수 확충했다.

일본의 대형 상선들은 간단한 개조를 통하여 수송함, 급유함, 수상기모함 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러한 상선들은 만들 때부터 전시 징발을 조건으로 건조비의 상당 부분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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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나이 격침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외교적 수단을 통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사태는 외교로 해결될 단계를 넘었으나 미국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론은 중국을 지지했으나 부당한 침략을 당하여 고통받는 중국을 동정하는 것과 중국을 위하여 총을 잡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국민들이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쟁 상황이 존재했으므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립법에 의거해 일본에 고철이나 항공유를 포함한 전쟁 물자의 수출을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립법은 교전 중인 국가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므로 중국도 대상이 된다.

이럴 경우 원료만 수입하고 무기와 탄약은 자체 생산이 가능한 일본보다 무기와 탄약을 대부분 수입해야 하고 상선대도 빈약한 중국이 불리하다.

 

게다가 조셉 그루 주일 대사는 만약 일본이 교역을 통하여 원유, 고철, 고무, 주석 등의 전략 물자를 얻지 못하게 되면 이런 물자가 풍부한 영령 말레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할 것이라고 국무성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남진을 막을 힘이 없었다.

1935년에 118,000 명이었던 미육군은 2년 동안 30% 이상 팽창했음에도 1937년 현재 15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효과도 없는 외교적 노력에 매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1937년에 다른 18개국과 함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모여 중일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회의를 열었으나 일본은 불참했다.

나머지 19개국은 일본도 조인했던 9개국 조약을 재확인하고 일본이 9개국 조약의 정신에 따라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처리해 주길 요청했다.

일본은 지나사변은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대답했다.

 

일본 외무성은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도록 군대에 요청했으나 일선 부대에서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미국인이 세운 교회나 학교 등은 성조기를 달고 있었고 일본군이 가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세운 교회나 학교는 200회 이상 일본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이 희생되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공습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미국인이 세운 교회라고 생각했다.

미국 정부와의 충돌을 두려워하는 외무성과 달리 현지의 일본군은 미국인을 위협하여 중국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파나이 격침이었다.

 

파나이는 미해군이 발주하여 중국의 강남조선소에서 건조한 흘수가 낮은 하천용 포함이었다.

1928년 10월 10일에 취역한 파나이는 미국 아시아 함대의 양쯔강 포함대(Yangtze River Gunboat Flotilla) 소속으로 4척의 동료 포함들과 함께 양쯔 강을 운항하는 미국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PR-5 파나이. 길이 : 58m, 폭 : 8.8m, 배수량 : 482톤, 흘수 : 1.6m, 속력 : 15노트, 승무원 : 59명, 무장 : 3인치 대공포 2문, 7.62mm 기관총 8정,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nay_(PR-5)

 

1937년 11일 21일에 일본군이 수도인 난징에 접근하자 국민당 정부는 미국 대사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다음날인 22일에 미국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 및 가족 대부분이 미군함정 루손을 타고 난징을 떠났으며, 대사관 직원 3명이 남아서 마지막 업무를 처리하고 일본군의 난징 함락이 임박한 12월 11일 저녁에 파나이를 타고 난징을 떠났다.

당시 파나이에는 승무원 59명, 대사관 직원 3명, 그리고 민간인 10명이 타고 있었다.

파나이는 스탠더드 석유회사 소속의 소형 유조선 3척(메이안, 메이핑, 메이시아)와 함께 떠났는데 여기에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중국인 종업원과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파나이 선단의 바로 뒤에는 영국 포함 레이디버드와 비가 호위하는 소규모 선단이 뒤따랐다.

이들의 출항은 주일대사 조셉 그루에 의하여 며칠 전에 일본정부에 통지된 상태였다.

 

양쯔 강의 물살을 거슬러 느리게 항해하던 선단은 다음날인 12일 새벽에 안개 속에서 하시모토 포병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포병의 포격을 받았다.

파나이 선단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뒤따르던 영국선단에서는 포함 레이디버드와 비가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일본 정부는 이 일에 대하여 영국정부에 사과했다.

 

하시모토 대좌는 안개 속에서 표적을 잃어버리자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해군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중지나방면군 사령부에 파견나와 있던 아오키 다케시 해군소좌는 12일 오전에 육군 측으로부터

 

"난징 상류 19km 지점에 중국군 패잔병을 가득 실은 상선 10척이 상류 쪽으로 도주 중이니 해군항공부대로 공격해달라."

 

는 전화를 받았고 정오 경에는 다시

 

"수많은 중국군을 실은 선단이 난징 상류 35km 지점에서 도주 중"

 

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오키 소좌의 연락을 받은 제2연합항공대 제12항공대장 미키 대좌가 항공모함 카가로부터 95식 함상 전투기 10대, 94식 함상폭격기 6대, 96식 함상폭격기 6대, 96식 함상공격기 3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12일 오전 11시, 파나이 선단은 난징에서 상류 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정박했다.

날씨는 맑았으며 미풍이 불고 있었다.

파나이 선단에서는 모두들 점심식사를 했으며 대공포에는 인원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오후 1시 30분에 일본기들이 파나이 선단 상공에 나타났다.

 

먼저 폭격을 가한 것은 96식 함상공격기 3대였다.

함상공격기들은 2,500m 높이로 선단 상공을 가로지르면서 60kg 짜리 폭탄 18발을 떨어뜨려 2발을 파나이에 명중시켰다.

1발은 전방 3인치 대공포에 명중했고 다른 1발은 전방 선실에 명중했다.

 

(96식 함상공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Yokosuka_B4Y)

 

이어서 함상폭격기들도 달려들어 급강하 폭격을 실시했고 전투기들은 저공으로 내려와 기총소사를 가했다.

 

(95식 함상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최초의 폭격에서 2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파나이는 치명적 타격을 입고 곧 침몰했다.

승조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승조원 43명과 민간인 5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승조원 중 11명은 중상이었다.

함장 휴이 소령도 부상을 입었다.

유조선 3척도 공격을 받아 메이안이 침몰하고 나머지 2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메이안의 선장과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파나이에는 촬영기사 2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 과정과 파나이가 침몰하는 광경을 필름으로 남겼다.

 

(침몰하는 파나이의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nay_incident)

 

미국 아시아 함대는 12일 오후에 파나이와의 통신이 끊어지자 상하이에 정박 중이던 일본 제3함대의 기함 이즈모에 연락장교를 파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해군은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13일 오전에 제3함대사령관 하세가와 키요시 해군중장은 아시아 함대의 기함인 순양함 오거스타 호에 참모장을 파견하여 아시아함대사령관 야넬 해군대장에게 사과하는 한편 뉴욕타임즈 지국장을 이즈모로 초청하여 파나이를 격침했음을 시인하고 사죄와 배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세가와 중장은 오후에는 직접 오거스타 호를 방문하여 야넬 대장에게 사과했다.

 

일본정부도 발빠르게 대응했다.

히로타 고키 외상은 13일에 미국 대사관에 찾아와 조셉 그루 주일대사에게 사과했다.

워싱턴에서는 사이토 히로시 주미대사가 라디오 중계료를 지불하고 3분 52초짜리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사이토 주미대사는 다음날 코델 헐 국무장관을 만나 다시 사과했다.

13일 오후 5시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차관이 성명을 발표하여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에 대해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14일에 미국무부는 그루 주일대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으며 상하이에서는 미해군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오후 9시에 일본해군은 공식발표를 통해 파나이 격침은 오폭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사후 처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5일에 일본정부는 제2연합항공대 사령관 미나미 소장을 경질하여 소환했으며, 17일에는 공격을 실시했던 4명의 공격대장을 질책했다.

다만 이것은 미국에 보이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 미나미 소장은 곧 제2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공격대장들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17일에 헐 국무장관은 사이토 대사를 불러 파나이 격침이 고의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나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당시 미해군이 함재기와 카가 사이의 통신을 방수했지만 극비 사항이었으므로 헐 장관이 보고를 받고서도 사이토 대사에게 공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3일 오후 5시에 야마모토 해군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이 미대사관을 방문하여 2시간 30분 동안 설명회를 가졌다.

여기서 일본 측은 파나이가 중국군을 수송하는 중이라고 오인하여 폭격했다고 다시 한번 변명했다.

 

24일 히로타 외상은 그루 주일대사에게 일본정부의 공식답변문서를 전달했다.

여기서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충분한 배상을 실시하고 앞으로 중국에서 일본군이 미국인을 공격하지 않도록 단속할 것이며 사건 관계자들을 추가로 처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파나이 격침이 고의는 아니고 오폭이었다는 변명은 빼놓지 않았다.

반면 같은날 오후 8시(현지시각) 워싱턴에서 발표된 미해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파나이 격침이 고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26일 미국정부의 공식답변이 그루 주일대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전달되었다.

답변에서 미국정부는 파나이 격침이 실수였다는 일본 측의 해명을 인정하지 않으며 고의였다는 미해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일본정부의 공식답변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파나이 격침으로 발생한 미일간의 외교적 위기는 2주 만에 일단락되었다.

 

일본정부가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동안 일본인들도 범국가적으로 미국에게 사죄의 제스처를 보였다.

주일 미대사관과 일본 각지의 미국 영사관에는 파나이 격침에 사죄하는 일본인들의 편지가 쇄도했으며 8세 - 13세 사이의 여자초등학생 37명이 워싱턴의 미해군성으로 영어로 사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사죄편지와 함께 주일 미대사관과 영사관, 그리고 신문사에는 파나이 격침의 사망자와 부상자에게 보내는 성금이 답지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은 만나는 일본인마다 파나이 격침에 대해 사과하는 바람에 당황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일본국민의 움직임에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없었으며 현지의 미국인들도 일본인의 태도가 결코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으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사죄하고 있다고 느꼈다.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해명과 함께 일본국민이 보여준 진심어린 사죄의 태도는 미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걸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당장 일본을 응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미국정부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적당한 선에서 물러설 수 있었다.

당시 미군 장교들 중에서는 일본을 응징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자국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일기장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도였다.

파나이 격침에 대해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은 220만 달러 정도였는데 징벌적 배상이 아닌 실제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산출한 액수였다고 한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당시 일본기들의 통신 내용을 근거로 파나이 격침을 오폭이 아닌 고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일본정부나 중지나사령부 또는 제3함대사령부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며 그 이하의 단위 부대에서 극단주의적인 장교들이 중국에서 미국인들을 몰아내려 저지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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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4)-2.26사건  (0) 2018.01.17
폭풍전야(3)-만주사변  (3) 201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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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일전쟁 발발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이 성립되었지만 관동군의 군사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병력이 크게 증강된 관동군은 1933년 초까지 만주국 내의 항일 게릴라들을 소탕했고 이후로는 남쪽 리허 성으로 진격하여 1933년 3월 말에는 만리장성에 도달했다.

 

관동군은 1933년 5월 7일에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베이징과 텐진 북방 50km 지점까지 진격했다.

위협을 느낀 중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5월 31일 텐진의 외항인 탕구에서 협정이 성립되었다.

탕구협정에서 만리장성과 일본군이 진격한 선 사이를 비무장 지대로 설정했으나 일본은 1935년 11월 비무장 지대에 기동방공자치정부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을 만들자 이번에는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항일 게릴라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논리로 화북 5성(허베이, 산뚱, 산시, 차하얼, 쑤이위안)을 중국에서 분리하여 괴뢰정부를 세우려는 화북분리공작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당연히 중국이 반발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이러던 중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30분 경에 일본 지나주둔군 제1연대 제2대대 제8중대가 베이징 외곽의 루거오차오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는 중일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나 제8중대장이었던 시미즈 세츠로 대위의 주장에 의하면 훈련 도중 갑자기 중국군이 사격을 가하여 급히 병사를 집결시켜 점검해 보니 1명이 행방불명이었다고 한다.

시미즈 대위는 즉시 제2대대장 이치기 기요나오 소좌에게 보고했고 이치기 소좌는 대대 주력을 출동시켜 부근의 중국군과 대치했다.

사실 그 병사는 설사가 난 것으로서 20분 뒤 돌아왔으나 이미 일이 커졌으므로 시미즈 대위는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8일 오전 4시 20분에 다시 중국군이 3발의 총격을 가하자 이치기 소좌는 제1연대장 무다구치 렌야 대좌에게 보고했고 무다구치 대좌가 오전 5시에 공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은 8일 오전 5시에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중국군의 발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며칠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루거오차오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지나주둔군의 숫자는 약 5,800 명으로 대치 중이던 중국 제29군의 10만명에 비하여 크게 열세했으며 중국군 또한 일본군과 충돌을 지속하여 일본정부에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충돌이 일어난 지 4일 만인 7월 11일에 중국군이 크게 양보하는 내용으로 현지의 양군 사이에 협정이 맺어지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렇게 해결되는 듯하던 루거오차오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끌고간 것은 일본의 고노에 내각이었다.

고노에 내각은 11일에 각의를 열어 중국군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도전행위로 규정하고 관동군의 혼성 제1 및 제10여단,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20사단, 그리고 일본본토로부터 제5, 제6, 그리고 제10사단을 화북에 파견한다는 스기야마 육상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북지사변으로 명명했다.

 

1936년 말의 서안사변으로 공산당과의 내분을 봉합한 국민당 정부도 일본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강경하게 나왔다.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에서 중국 내의 유력한 정치 세력들이 참가한 회의를 가진 후 1937년 7월 19일에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하는 루산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병사 1명의 설사로 시작된 루거오차오 사건은 8년 간의 처절한 대전쟁인 중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닌 루거오차오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의 초기 흐름은 일본에게 유리했다.

제20사단, 제1 및 제10여단과 임시항공병단으로 강화된 지나주둔군은 1937년 7월 30일에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했다.

 

남쪽 상하이에서도 1937년 8월 13일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75만명에 달하는 중국군과 30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상하이 부근에서 3개월 간 처절하게 싸웠다.

결국 11월 5일에 8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상하이 남쪽의 항조우 만에 상륙하여 중국군의 배후를 찌르자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철수했고 상하이는 11월 12일에 함락되었다.  

 

일본은 1937년 11월 21일에 러일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본영을 설치했으며 1945년 패전까지 유지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후 일본정부는 소련을 의식하여 전선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으나 현지 부대는 이를 무시하고 300km 떨어진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정예병력 30만명을 잃은 국민당군은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국민당 정부는 한커우로 이동했고 일본군은 12월 13일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군은 난징에서 7주간 무려 30만명에 달하는 포로와 민간인을 강간 및 살해하는 난징학살을 저질렀다. 

 

중국군은 1938년 2월에 쉬저우 부근에서 벌어진 타이얼좡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사상자 16,000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면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1938년 10월 21일에 광둥을 점령했으며 26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한커우를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는 다시 양쯔강 상류의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다.

 

한커우 점령을 전후하여 일본군도 힘이 다했다.

드넓은 중국에서 끝없는 소모전에 휘말리자 대본영은 소련을 의식하여 1938년 11월 18일에 전선을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0년 현재 일본의 점령 지역.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Sino-Japanese_War)

 

중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은 소련군과 대규모로 2번 충돌했다.

1938년 8월 초에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19사단이 만주국, 조선, 그리고 소련의 국경선에 접한 장고봉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여 사단의 22% 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했다.

 

1년 후에는 관동군이 훨씬 큰 규모로 소련군과 격돌했다.

1939년 8월 말에 만주국과 몽고의 변경에 있는 노몬한에서 제23사단을 중심으로 한 관동군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과 대결하여 17,0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했다.

노몬한 사건을 통하여 일본육군은 자신들의 실력이 소련군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절감했으며 이후 육군 내에서도 남진론이 세력을 넓히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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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26사건

 

만주사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사이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1935년에 실효된 런던 군축조약에 이은 제2차 런던 군축조약에 불참함으로써 15년에 걸친 군축 시대가 끝나고 세계는 다시 건함경쟁 시대로 들어섰다.

 

일본에서는 1936년 2월 26일에 커다란 정변이 발생했다.

도쿄에 주둔 중이던 제1사단 소속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1,483명의 반란군이 수상관저, 국회의사당, 경시청, 육군성, 육상 관저, 참모본부 등 정부와 군부의 주요 기관을 점거하거나 포위했다.

반란군들은 육군 대위였던 노나카 시로, 코다 기요사다, 안도 데루조 등의 지휘에 따라 26일 오전 4시에 병영을 빠져나와 6개로 나뉘어 오전 5시부터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기요 대장대신, 사이토 마고토 내대신, 와타나베 죠다로 육군교육총감,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등을 습격했다.

다카하시 대장대신, 사이토 내대신, 그리고 와타나베 교육총감은 피살되었으며 스즈키 시종장은 중상을 입었다. 

(2.26 사건에 참가한 반란군들. https://en.wikipedia.org/wiki/February_26_incident)

반란군이 들이닥칠 당시 오카다 수상은 자고 있었으며 대신 비서관이자 처남인 마츠오 렌조 대좌가 반란군에게 수상 행세를 하다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들이 마츠오 대좌를 수상으로 착각한 덕분에 수상은 반란군의 눈을 피하여 벽장에 숨을 수 있었다.

수상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숨어 있다가 다음날인 27일 정오경 헌병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문상객으로 가장하여 반란군에 포위된 수상 관저를 탈출했다.

당시 일본육군 내에서는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제1사단은 황도파의 본거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2월 22일에 제1사단에게 만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19 및 제20사단이 붙박이로 배치된 조선주둔군과 달리 관동군에는 사단이 돌아가면서 파견되었으며 제1사단의 만주 파견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사단은 러일전쟁 이후 해외로 파견된 적이 없었으므로 황도파인 제1사단의 장교들은 통제파가 자신들을 만주로 쫓아내려 한다고 판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 수괴 중 1명인 고다 대위는 1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육상 관저를 포위한 후 육상 가와시마 요시유키 대장에게 자신들의 8개조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쇼와 유신의 실현을 요구했다.

8가지 요구사항은 유신회천을 바라는 자신들의 뜻을 천황에게 전달할 것, 자신들이 지목한 통제파 장교들을 체포할 것,​ 황도파의 수장인 아라키 사다오 대장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등이었다.

당시 육군 요직에는 황도파가 많아서 반란군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다.

육상 가와시마도 황도파에 가까웠다.​

반란이 실패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 때문이었다.

천황은 오전 5시 40분에 첫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오전 9시에 가와시마 육상이 들어와 반란군들의 요구사항을 보고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내각을 만들 것을 요청하자 천황은 반란군을 당장 진압하지 않고 자기에게 그들의 요구사항이나 읊어대느냐며 역정을 내었다.

​이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 중장은 천황의 의중을 알게 되자 반란을 진압할 부대를 도쿄로 불러들이는 안을 천황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천황을 만나고 나온 가와시마 육상은 궁중에서 육군수뇌부를 소집하여 군사참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 중장은 토벌을 주장했으나 황도파로서 반란군에게 동정적인 군사참의관 아라키 사다오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 등이 반대했으며 특히 토벌을 책임져야 할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 중장도 황도파였으므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26일 오후에는 미사키 대장이 주도하여 가와시마 육상 이름으로 5개 항을 작성하여 고시했다.

나중에 미사키 대장은 반란군의 투항을 권고하는 의도였다고 변명했는데 고시의 내용은 반란군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 반란군들은 이 소식을 듣고 거사가 성공했다고 기뻐했다.

더구나 오후 3시에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중장이 제1사단에게 반란군들이 장악한 지역을 포함한 전시 경비 명령을 내리면서 반란군들을 제1사단 보병 제1연대 지휘 하에 두었다.

이로써 반란군들은 임지를 이탈한 상태에서 벗어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26일 오후 8시 40분에 살아남은 각료들이 궁중으로 들어와 회의를 열고 계엄령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경시청과 해군은 육군이 전권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하여 계엄령에 반대했으나 조속한 진압을 원하는 천황의 뜻에 따라 계엄령 발동이 결정되었다.

계엄령은 27일 오전 3시에 발령되었는데 쇼와 시대 들어와서 첫 계엄령이었다.

이제 계엄사령관이 된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중장은 여전히 토벌을 망설였다.

실제로 가시이 중장은 계엄명령 제1호에서 반란군들을 단지 '26일 새벽에 출동한 부대' 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들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사태의 진전이 느리자 천황은 짜증을 내었다.

27일 오전 8시 20분에 천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반란군의 토벌을 명령하는 봉칙명령을 재가했다.

황도파인 시종무관장 혼조 시게루 대장은 반란군으로 낙인찍혀 소탕되는 상황만은 막으려고 천황에게 상주했으나 거절당했다.

27일 하루동안 천황은 혼조 시종무관장을 13번이나 불러 왜 빨리 토벌하지 않느냐고 닦달했다.​

27일 오후 12시 45분에 천황은 가와시마 육상을 불러 육군이 계속 미적거린다면 자신이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토벌하겠다고 말했다.

천황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황도파는 27일 오후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다.​

마사키 대장을 비롯한 황도파 군사참의원들은 반란군이 점거하고 있던 육상관저에 들어가 원대복귀를 권했다.

28일 새벽에 반란군들은 천황이 직접 자신들을 토벌하라는 봉칙명령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28일 오후에 장교는 모두 자결하고 부사관과 병은 원대복귀시키겠다면서 자결 장소에 천황의 칙사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혼조 시종무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천황은 칙사 파견을 거절했고 화가 난 반란군들은 자결 및 원대복귀 결정을 번복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천황의 봉칙명령이 계엄사령부에 정식으로 도착한 것은 28일 오전 5시였다.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은 계속 토벌을 미루면서​ 반란군과 접촉했다.

그는 일본군끼리 전투를 벌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천황에게 쇼와유신을 받아들이도록 상주하겠다고 말했으나 스기야마 참모차장과 계엄참모가 된 전략과장 이시하라 간지 대좌가 반대하고 즉각 토벌을 주장했다.

어쩔 도리가 없게 된 가시이 중장은 마침내 28일 오후 4시에 토벌을 표명했으며 토벌 시간은 29일 오전 5시로 결정했다. 

​근위 사단을 중심으로 전차까지 포함한 약 2만명의 토벌군이 전개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반란군을 포위하고 주위 교통을 차단했다.

계엄사령부는 29일 오전 5시 10분에 토벌 명령을, 오전 8시 30분에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일선에서는 발포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반란군에게 기회를 주었다.

오전 8시 55분에 라디오에서 '병사에게 고함' 이라는 제목으로 간곡하게 투항을 권유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반란군 지도부는 항복을 결정하고 오후 2시까지 부사관과 병들을 원대복귀시켰다.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는 자결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오후 5시에 육상 관저에서 체포되면서 4일에 걸친 반란이 끝났다.

2.26사건의 처리는 엄격했다.

군사법원은 반란에 참가한 장교 중 자결한 노나카 대위를 제외한 19명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은​ 종신금고형, 1명은 금고 4년형을 받았다.

기타 잇키를 포함한 민간인 5명도 처형되었다.​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제3연대장은 29일 새벽에 권총자살했다.​

황도파는 몰락했다.

아라키, 마사키 등 육군참의관이던 대장 4명이 한꺼번에 옷을 벗었고, 육상 가와시마, 시종무관장 혼조도 예편되어 대장 6명이 모두 군에서 쫒겨났다.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도 예편되었으며 반란군이 소속된 제1사단장과 근위사단장을 포함하여 3,000 명에 달하는 황도파 장교들이 강제로 예편당했다.

2.26사건 당시 관동군 헌병사령관이던 도죠 히데키는 관동군 내의 황도파 장교들을 모두 체포했다.​

황도파에서 살아남은 인물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 정도가 유일했다.

이제 육군은 통제파의 천하가 되었다. ​

2.26사건은 군부의 쿠데타가 실패한 사건이었으나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군부는 세력을 잃지 않았다.

몰락한 것은 황도파 뿐으로 군부의 세력은 더 커졌다.

군부의 광기를 목격한 일본정치가들은 이후로는 감히 군부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2.26사건으로 무너진 오카다 내각의 뒤를 이어 1936년 3월 5일 히로타 내각이 성립되었다.

히로타 내각에서 육군은 1호 군비를 승인받았다.

이는 1937년 - 42년까지 6년 동안 41개 사단과 142개 항공중대를 증강한다는 야심찬 것이었다.

런던 군축조약의 실효로 군축의 짐을 벗어던진 해군 또한 제3차 보충계획을 결정하여 향후 4년 동안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포함한 함정 66척을​ 건조하고 기지항공대 14개 항공대를 증강하기로 했다.

1935년까지만 해도 20억엔대 초반이었던 국가 예산은 군사비의 급증으로 1937년에는 30억엔을 넘어섰다.

이렇듯 2.26 사건은 일본군부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군비확장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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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사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특수를 누리던 일본경제는 1920년대 들어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사회 일각과 군부 내에서 일본판 파시즘이라고 부를만한 급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경향이 일어나 시간이 갈수록 세력을 키웠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에 대한 분노, 백인과 그들의 물질문명에 대한 혐오, 강력한 군대의 재건과 주변 국가에 대한 팽창 욕구를 대변하는 이러한 일본판 파시즘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 중 한 명이 기타 잇키였다.

 

기타 잇키는 1919년에 '일본개조법안대강' 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일본의 급진세력,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분노하고 있던 청년장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기타 잇키는 의회를 폐지하고 천황이 친정을 해야 하며 모든 정치적 비판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간 산업을 국유화하고 개인 재산의 한도를 설정하며 토지 분배로 자영농을 육성하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으로 진출하여 인도, 중국, 필리핀을 비롯하여 백인들의 압제에 신음하는 7억 아시아 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타 잇키는 1936년의 2.26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육군 내에서 이러한 급진사상에 경도된 장교들은 천황의 친정을 원한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황도파(皇道派)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빗대어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를 따 쇼와 유신(昭和維新)이라고 불렀다.

육군에서 황도파가 세력을 키우자 여기에 반대하는 장교들이 통제파(統制派)를 결성했으며 이후 양 파벌은 1936년의 2.26사건으로 황도파가 몰락할 때까지 사사건건 대립했다.

 

통제파는 기존의 법을 통하여 군 내부를 통제한다는 의미로서 문민통제를 비롯한 현존 질서를 존중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통제파는 온건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황도파라는 강력한 파벌이 등장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황도파 장교들이 급조한 파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나아가 황도파와 통제파 사이의 대립은 이념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며 똑같은 군국주의자들끼리 진급이나 보직같은 육군 내부의 잇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파벌을 만들어 이전투구를 벌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죠 히데키 수상도 통제파 출신이다.

 

1920년대 들어 침체되는 경제와 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일본인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일본판 파시즘이 점차 세력을 키웠으며 군축조약이나 미국의 이민법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부의 문민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던 군부는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예전의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로부터 뺏은 랴오뚱 반도에 관동주를 설치했다.

이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를 지키기 위하여 파견된 군대가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1928년에 일본의 후원을 받으면서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쭤린을 폭사시키는 월권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쭤린의 폭사는 실책이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투항해 버렸고 이로써 국민당 정부는 세력을 만주까지 뻗치게 되었다.

이대로 두면 만주에 일본의 영향력을 끼칠 기회는 사라질 것이었다.

또한 일본육군은 소련이 경제건설과 군대 강화 그리고 시베리아 개발 등을 목표로 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1928년부터 시작하자 위협을 느꼈다.

관동군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소련보다 먼저 만주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마침내 1931년에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와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시하라 간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류타이호의 만주 철도 조차장을 고의로 폭파하고는 이를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병력을 동원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일본정부는 물론 대본영도 관동군의 계획을 전혀 몰랐으며 관동군이 출동한 이후에야 보고를 받았다.

정부는 다음날인 19일에 각의를 열어 사건 불확대를 결정하고 조선주둔군의 만주 진격을 금지했으나 관동군이 21일에 지린으로 진격하자 조선주둔군의 만주 진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관동군은 남만주를 점령한 후 잠시 숨을 고르고는 11월에 군벌인 마점산의 군대가 만주철도 관리 하의 철교를 폭파했다는 구실로 진격을 재개하여 11월 19일에 치치하얼을 점령함으로써 북만주 점령에 나섰다.

관동군은 이후 순조롭게 진격하여 32년 1월에는 금주를, 2월에는 하얼빈을 함락함으로써 만주 전역을 장악했으며 3월 1일에 청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교로 푸이를 수반으로 하는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국은 완전한 괴뢰국으로 푸이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관동군 사령관이 통치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킬 당시 관동군 병력은 1만명 남짓했다.

관동군은 이러한 소수 병력을 결정적인 시점과 장소에 집중하여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20만명이 넘는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을 물리치고 일본본토의 3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의 만주를 점령했다.

물론 공산당과 대치 중이던 국민당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북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 또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대공황으로 서구 열강이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만주사변의 결과 일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을 깔보게 되었고 이것이 중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만주사변의 외교적 후폭풍은 엄청났다.

미국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즉시 일본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만주국이 성립되기도 전인 1932년 1월 7일에 후버 행정부의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이 미국은 향후 만주에 들어서는 어떠한 정권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중국은 만주사변 발발 직후 국제연맹에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근거하여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9월 30일에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하에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에서 리튼 보고서와 이에 근거하여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일본의 전체주의화와 맥이 닿아 있었다.

대공황으로 인하여 살림이 더욱 팍팍해진 일본인들은 정당정치에 염증을 내고 전체주의에 경도되고 있었으며 군국주의자들은 여기에 용기를 얻어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던 75세의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1932년 5월 15일에 암살되면서 정당정치인이 수상이 되는 정당내각 시대가 8년 만에 끝났고 동시에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 시대도 막을 내렸다.

만주사변은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거쳐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인들이 말하는 15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만주사변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 내의 항일운동이 거세어졌고 상하이 조계 내의 일본인들과 주변의 중국인들 사이도 험악해졌다.

이러던 와중에 1932년 1월 18일부터 양국 민간인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나왔는데 열강들의 관심을 만주사변으로부터 돌리기 위하여 일본 측이 고의로 충돌을 야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소요 사태가 확대되면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상하이 주변에 주둔하던 중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으며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군이 고전했다.

 

그러자 일본은 병력을 증파하기 시작하여 총 3개 사단을 투입하고 해군도 증강했으나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결국 1932년 3월 1일에 일본군의 일부가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군 후방에 상륙하자 마침내 중국군이 상하이 주변에서 철수했고 3월 3일자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이후 중일양국은 열강의 주재로 상하이에서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서 일본군은 큰 대가를 치르고 점령한 상하이 주변 지역에서 철수하고 중국군은 앞으로 상하이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져 1932년 5월 5일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기간 중인 1932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행사에서 단상의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사망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이 왼쪽 눈을 실명했으며, 주중공사 시게미츠 마모루가 중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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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군부와 대외정책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되어 1945년 패전과 함께 사라진 일본제국에서 군대는 대다수 민주국가와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는 내각보다 권위가 높았으며 1920년대를 제외하고는 외무성을 제치고 일본의 대외정책을 사실상 결정했다.

원칙적으로 일본의 모든 남성들은 현역 2년, 예비역 10년, 합계 12년의 병역을 이수해야했다.

현역 입영률은 높지 않았으나 군대는 국민개병제를 매개로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75년 당시 일본군의 복장. http://en.wikipedia.org/wiki/Imperial_Japanese_Army)

 

일본의 하층 계급에게 군대는 신분 상승의 통로이기도 했다.

1927년에 일본 장교의 30% 가 중산층 이하 계층 출신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비율이 높아졌다. 

병사들은 가난한 농촌 출신이 많았다.

 

일본군 내부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상명하복의 신분사회였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국가에 봉사한 기간에 따라 획득하는 계급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는 군대는 하층민 출신에게는 신세계였다.  

군대는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면서 일본제국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국민개병제를 통해 근대적인 사상과 문물, 사고 방식을 사회로 전파했다.

주로 생선과 밥을 먹던 일본인들이 고기와 빵을 먹기 시작한 것도 군대에 가서 이런 음식들을 먹어본 예비역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소개한 것이 계기였다.

일본제국 시기 군대는 가장 강력할 뿐 아니라 근대적이고 혁신적이며 선진적인 집단이었다.

 

당연히 군대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군대의 위상이 너무 높아서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나라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어 군대의 비리나 모순 또는 어리석은 짓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리거나 개그의 소재로 삼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1889년에 제정된 일본제국 헌법에서 군대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군의 규모와 전력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정부가 아닌 천황에게 주어졌다.

이는 일본제국의 설계자들이 강력한 군대를 근대화된 정부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로 서구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군대가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국가의 특성상 정부에 의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군대가 정부를 제압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일본군은 정부를 사실상 쥐락펴락했다.

 

20세기 초까지 일본군은 자신이 휘두르던 막대한 권한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했고, 10년 후에는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 싸워 이김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들의 말석에 자리를 얻었다.

1910년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군부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이 야심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독일 영토를 차지할 속셈으로 영국 및 프랑스 편으로 참전했다.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산뚱반도의 칭타오,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및 마셜 제도를 장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1915년 1월에 일본은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

중국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러한 요구에 굴복했으나 중국인들은 5.4운동으로 대표되는 격렬한 배일운동을 벌였다.

 

또한 21개조는 광범위한 지역과 분야에 걸쳐 일본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미국 외교의 원칙으로 유럽 열강은 물론 일본도 동의하고 있던 문호개방(Open Door)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문호개방원칙은 중국에 진출하려는 국가들은 중국의 통일과 주권을 존중해야 하며 그 바탕 위에서는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원칙이 위협받자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도 반발했다.

 

중국인들과 서구 열강의 반발에 직면한 일본정부는 워싱턴 조약에서 21개조 요구를 거두어 들였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에서 서구 열강들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었으며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적도 이북의 태평양에 있던 독일영토들을 신탁통치하게 되었다.

미국의 윌슨 행정부는 국제연맹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본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전에 이 섬들을 점령했으며 자신의 전리품을 지킬 각오였다.

전쟁을 통해서만 일본을 저지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태평양에서 실리를 거둔 일본군은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로 눈을 돌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함께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이때 일본정부가 군부에 통렬한 일격을 가했다.

1922년에 정부는 군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거부해 버렸고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병해야 했다.

 

5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정부의 예산안 거부는 일본제국을 통틀어 유일했던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가능했던 시절을 상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으며 종전 이후 국제연맹이라는 집단안전보장체제가 마련되자 일본인들은 서구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군부에 대한 민간 부문의 우위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양당제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나타나고 군사비는 삭감되어 민간 부문으로 돌려졌으며 일본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유화적으로 행동했다.

일본은 1921년 - 22년에 걸친 워싱턴 조약에서 5-5-3 이라는 주력함 비율을 받아들였으며 산뚱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었다.

1922년 2월 6일에는 9개국 조약에 서명했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 및 다른 7개국과 함께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고 문호개방원칙을 지지하며 특권적 지위를 요구하지 않고 중국이 부당한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국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1928년에는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서명했다.

 

돌이켜보면 태평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부에 대해 문민통제를 유지하면서 양보와 타협의 정신으로 일본을 이끌던 당시의 자유주의적인 정치 세력을 고무하고 지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구 열강에게는 그만한 지혜와 관대함, 그리고 요령이 없었으며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에 미국은 3년 전의 법을 더 강화한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다.

1921년의 이민제한법은 1890년 이후에 이민이 급증한 동유럽, 남유럽 및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을 제한하기 위하여 매년 이민을 1890년 당시 각국 출신의 3% 이내로 제한한 것이었다.

1924년의 이민법은 이 제한을 2%로 강화하면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아예 이민을 금지했는데 여기에 일본이 포함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최소한의 숫자만이라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이민법에 일본을 예외로 두어 매년 200 명 정도만 허용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1년에 200명이라는 한 줌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법의 실효성에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일본정부는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이 전면 금지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남유럽이나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은 꼴이 되었다.

비록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자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격이 다른 열강의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본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일본인들은 분개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협조하는 대외 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이로써 미국은 전해인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미국 여론이 보여준 특기할만한 동정과 재정 지원으로 우호를 돈독하게 만들었던 효과를 간단히 날려먹었다.

 

워싱턴 군축조약도 일본군부를 자극하고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군부도 서구 열강, 특히 경제력이 월등한 미국과의 건함경쟁보다 군축조약이 일본의 안보에 이익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체결한 군축조약에 의하여 건조 중이던 함정이 폐기되고 해군의 전력이 제한되는 상황은 헌법이 보장해 준 군부의 특권, 즉 군대의 규모와 전력에 대하여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제 정부는 필요하면 외국과의 조약을 통하여 군대의 규모와 전력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셈이었고 군부는 칼자루를 쥔 정부에 끌려다니게 되면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좋은 시절은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었다. 

군부내 강경파인 군국주의자들, 특히 워싱턴 군축조약과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육군까지 군축조약에 대하여 그토록 반발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군축조약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열등한 상태로 묶어두려는 음모에 정부가 가담한 것이라고 선동하면서 일본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에 호소했다.

군부의 이런 시도는 다른 요인들과 맞물려 일본인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면서 정부를 약화시켰고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정부에 의한 문민통제가 끝나게 된다.

길게 보았을 때 군비 감소를 위하여 미국과 영국이 추진한 군축조약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절호의 선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약화시키고 군부가 다시 권력을 차지하는데 일조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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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었던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현지 시각), 6척의 일본항공모함에서 출격한 360대의 함재기들이 미태평양함대의 모항인 진주만을 공격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이루어진 기습으로 미태평양함대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일본군은 태평양함대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말레이, 싱가포르, 필리핀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석권함으로써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완수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2년 3개월에 걸친 중립을 깨고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서유럽을 거쳐 소련,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국에서 진행되던 전쟁은 이제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틀 전에 소련군이 모스크바의 코 앞까지 다가온 독일군을 저지함으로써 조국을 구했다.

미국의 참전과 소련의 생존은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부는 1941년 12월 첫째주에 결정되었다.  

 

1. 팔굉일우(八紘一宇)

 

미국은 1853년에 페리 제독을 보내어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이래 250년간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을 개항시켰다.

일본은 개항 이후 미국이 남북전쟁에 휩쓸리고 다른 열강들이 중국에 집중하면서 생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근대화에 성공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확장에 나섰으며 1905년에는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 맞붙어 승리함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들의 말석에 자리를 얻었다. 

 

(쓰시마 해전 당시 기함 미카사 함상에서 지휘하는 도고 제독.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tsushima)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다.

러일전쟁 때 미국 여론은 압도적으로 일본을 편들었으며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하자 시의적절하게 종전을 주선하여 국력의 한계에 달해있던 일본의 패배를 막아주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묵인 하에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미국과 같은 편에서 싸웠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처리를 두고 일본과 미국은 대립했으나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얻은 산뚱반도를 포기하고 미국은 일정기간 준비를 거쳐 필리핀을 독립시키기로 타협점을 찾았다.

워싱턴 군축조약과 그에 따른 태평양의 비요새화 협정도 양국의 해군장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과 일본의 충돌 가능성을 줄이고 태평양의 긴장을 완화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과 일본은 이해가 일치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의 수출품인 명주실을 좋아했으며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고철과 공작기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석유를 수입했으므로 교역은 양국에게 모두 이익이었다.

미국 내에는 일본과의 전쟁을 바라는 유력한 세력이나 이해관계가 없었으며 일본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열강 중에서 미국을 가장 친근하게 생각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상대와의 충돌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으나 일반 국민들의 정서는 달랐다.

적어도 1920년대까지 평균적인 미국인이나 일본인들 중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처절한 3년 8개월 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여 미국이 폭격을 가하여 일본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키고 원자폭탄을 2발이나 떨어뜨리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사이가 좋았던 미국과 일본을 틀어지게 만든 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였다.

미국은 중국의 통일과 주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으나 일본은 중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태평양전쟁에 패한 후 일본은 좁은 국토에 인구 과잉이라 식량과 공간이 부족하여 식민지로서 중국을 원했다고 변명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분명히 일본은 캘리포니아 주만한 국토에 7,300만에 달하는 인구를 품고 있었으며 산지가 많아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된 공업국가였으며 공업국이 식량을 수입하여 충당하는 일은 흔한 일로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는 사실이 식민지를 원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과밀에 따른 공간 부족도 마찬가지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국을 만든 이후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6년간 만주국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30만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은 대부분 교사, 기술자, 상인, 철도 관리자 등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었다.

일본보다는 오히려 중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만주국으로 이주했다.

 

다른 식민지도 비슷하여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이나 기술 또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당시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중산층 이상의 기반을 가진 사람들로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식민지로 이주하여 지배층을 형성했다.

일례로 1945년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미군이 진주했던 남한 지역의 내과의사 3,000 명 가운데 150명만 한국인이었고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변명대로 과밀한 본토에서 고생하던 일본인들이 숨 쉴 구멍을 찾아 식민지를 획득했다면 과밀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하층민들이 대량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이 점령했던 자바 섬의 인구 밀도는 일본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을 보아도 과밀로 인한 공간 부족 때문에 식민지가 필요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일본은 인구 밀도와는 상관없이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또 하나의 제국주의 국가로서 서양 열강들이 지난 몇 세기에 걸쳐 했던 것처럼 자국의 산업을 위한 원료 생산지이자 자국 상품의 소비처로서 식민지를 원했던 것이다.

문제는 일본이 중국을 식민지로 삼고자 했을 때에는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충분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유럽 열강들과 본토 안에 광대한 미개척지와 거대한 시장을 가진 미국은 새로운 식민지를 만드는 대신 현지 주민을 대표하는 정부와 주권을 인정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의 막차를 탄 일본은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를 들먹이며 더 이상의 식민지 건설을 막으려는 서구 열강의 논리에 반발했다.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서구 열강의 논리에 분개한다고 한들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무리였다.

만일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의 뜻이 정치에 잘 반영되는 체제였다면 식민지를 획득하려고 서구 열강과 부딪히는 대신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진로를 모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920년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 일본은 식민지를 얻기 위하여 서구 열강과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보기에는 태생부터 군부의 입김이 너무 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력을 잃었다가 1920년대 후반에 회복한 일본군부는 1931년에 팔굉일우(八紘一宇)를 기치로 내걸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설했다.

이로써 일본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순응하여 진로를 모색하는 대신 군부에 이끌려 식민지 획득을 위하여 서구 열강과 전쟁을 불사하는 길로 들어섰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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