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석유 문제

 

1941년 7월 26일에 전면적 금수 조치가 떨어지기 전까지 일본에 대하여 수출이 금지되고 있던 석유 제품은 1년 전인 1940년 7월 26일에 금수 품목으로 묶인 항공기용 고옥탄가 휘발유와 항공기용 윤활유가 모두였다.

정부의 눈치를 보던 미국 해운사들은 자율 규제 형식으로 중유나 원유를 포함하여 모든 석유 제품을 일본으로 운송하지 않고 있었으나 일본은 자국이나 중립국의 유조선을 사용하여 막대한 양의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해 갔다. 

이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도 곧 미국을 따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고 자산을 동결했다.

다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현찰 지급을 조건으로 이미 계약한 물량의 선적은 허용했다.

그러나 많은 현금을 미국 은행에 예치하고 있던 일본 기업들은 자산이 동결되면서 석유 대금을 결제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결국 선장이 일본에 가서 힘들게 현금을 구해오는 동안 일본 유조선들은 보르네오나 수마트라의 항구에 몇 주씩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석유 금수 조치가 발동되면서 미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국가가 물러서지 않는 한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미국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과의 교역을 허락하고 자산을 풀어주어 일본의 침략을 방조할 생각이 없었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정부가 군부를 설득하여 중국에서 철수할 준비를 시작하는 동시에 남방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본군부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영국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고전 중이고, 네덜란드는 항복하여 동인도 제도가 고아 신세가 되고,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격파하여 만주에 대한 위협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석유가 펑펑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차지하여 일본의 숙명적인 아킬레스 건인 석유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기회로 보았다.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은 일본군부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파국을 막자는 일각의 목소리는 앞으로 정복에 나설 때마다 미국에게 허락을 구하자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들렸다.

 

일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석유 수입이 끊긴 상태로 시간을 끌다보면 경제가 망가질 뿐 아니라 연료가 없어서 막상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함대는 항구에 머물러야 할 것이고 비행기는 뜰 수 없을 것이었다.

석유금수조치 이후 일본은 자신의 꼬리를 잘라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조달하기 위하여 곳곳에 시추를 하고 1937년부터 인조 석유 생산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941년에 일본이 채굴한 석유는 190만 배럴, 합성한 석유는 120만 배럴로 합계 310만 배럴이었는데 이것은 소비량의 12% 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88% 는 수입했는데 수입 물량의 약 80%를 미국으로부터 들여왔다.

 

일본은 전쟁을 앞둔 몇 해동안 가능한 한 많은 석유를 수입했다.

석유 수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40년 4월 1일 - 1941년 3월 31일 사이의 1년 동안 일본은 원유 2,285만 배럴과 각종 정제유 1,511만 배럴을 수입했는데 이는 일본이 1년간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이 비축한 석유의 양은 해군 650만톤, 육군 120만톤, 민간 70만톤으로 합계 840만톤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약 1년 6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원유 톤수에 7을 곱하면 대략적인 배럴이 나온다. 중유는 6.7, 휘발유는 8.5를 곱하변 대략적인 배럴을 구할 수 있다.)

 

고무, 고철, 주석, 텅스텐 등의 전략물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석유는 필수적이었다.

부족한 인조 석유 생산 능력을 고려할 때 석유 수입이 끊긴 일본은 석유를 찾아 침략을 강행할 도리 밖에 없었는데 루스벨트 행정부는 석유를 끊어버렸다.

미국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일본을 석유와 고철로 달래는데 지쳤고,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대중들은 석유 금수 조치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석유 수입이 끊긴 일본은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할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그걸 막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든지 아니면 손쉽게 산유 지대를 손에 넣어 엄청나게 강력해진 일본과 마주해야 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설명할 수 없었으나 석유금수조치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미국과 일본은 전쟁준비에 한층 열을 올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 금수 조치를 발표한 당일인 1941년 7월 26일에 필리핀 군을 정식으로 미군에 편입시키고 필리핀 육군 원수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현역 미육군대장의 계급으로 극동지역미군사령관(Commanding General United States Army Far East)에 임명했다.

전쟁에 대비한 산업계의 동원도 더욱 빨라졌다.

 

일본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본영과 연합함대에서는 군사 전략가들이 말레이 반도, 필리핀, 홍콩, 북부 보르네오, 괌, 웨이크,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진주만에 대한 공격계획을 작성하고 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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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경제 제재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은 극동 지역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정복에 필요한 물자들을 팔면서 극동에서의 침략에 반대하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방대한 양의 강철, 석유, 그리고 전략 물자들을 구매하여 미군에 대항할 전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군사력을 키울 시간을 벌기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었다.

미국이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수출을 중단하면 일본은 영령 말레이 반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할 것이 분명했는데 미국은 군사력을 충분히 키우기 전에 그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최초의 경제 제재는 1938년 7월부터 실시된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 로서 민간인을 폭격하는 국가에 대한 항공기와  관련 부품의 수출을 금지한 것이었다.

1940년 들어서면서 미국 내에서 일본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라는 압력이 높아졌다.

1940년 2월 초에 네바다 출신의 피트먼 상원의원은 일본에 대한 전쟁 물자의 수출 금지를 요구했는데 이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2월 14일에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75%가 무기, 항공기, 휘발유 및 기타 전쟁물자에 대한 금수조치에 찬성했다.

그러나 과격한 금수조치가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금수 조치를 실시하되 점진적으로, 또한 일본을 덜 자극하는 방식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미의회는 7월에 "국가 방위의 강화를 촉진하기 위한 법안"("Act to Expedite the Strengthening of the National Defense"), 줄여서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별다른 전제 조건 없이 단지 국가 방위에 필요하다는 판단만으로 특정 국가에 대해 군사장비나 탄약 뿐만 아니라  전쟁물자의 생산에 필요한 기계나 공구, 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나 보급품 등 광범위한 물품의 수출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가방위법이 부여한 권한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영연방, 중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그리고 유럽의 저항세력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모두 대상에 넣어 버렸다.

따라서 실제로는 일본에게 금수조치를 취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몇몇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금수조치를 실행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체면을 세워 주어 반발할 여지를 최소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단행된 금수조치는 다음과 같다.

 

1940년 7월 5일 : 다양한 금속과 화학물질, 항공기의 엔진, 부품 및 장비

1940년 7월 26일 : 항공기 연료와 윤활유, 일부 종류의 고철

1940년 9월 30일 : 모든 종류의 고철

 

이러한 금수 조치는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10월 20일에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의 90%가 정부의 조치에 찬성했으며 더 나아가 96% 가 모든 전쟁물자에 대한 완전한 금수조치를 요구했다.

 

일본은 금수조치가 지난 수년간 미국 고철의 중요한 소비자였던 일본에 대한 비우호적인 행동이라고 항의했다.

일본대사가 국무성에 찾아와 구두로 이런 의사를 전달하자 헐 국무장관은 다음과 같이 맞받아쳤다고 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있는데 중립을 지키는 또다른 나라가 침략국에게 열광하면서 정복에 필요한 물자를 팔지 않았다고 해서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소."

 

(코델 헐 국무장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0년 12월 10일과 1941년 1월 10일에 미국이 추가로 금속, 철광석, 그리고 공작기계에  대하여 금수 조치를 단행하자 일본의 반발이 심해졌다.

조셉 그루 주일 대사는 1941년 1월 말에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만일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도쿄 시내에 돌아다닌다고 적었다.

국무성은 이 내용을 해군에 통보했으나 해군 정보기구는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다.

사실 이때는 야마모토 제독이 진주만 기습 계획을 짜기 시작할 때였다.

 

일본은 급속히 진행되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도를 다소나마 늦추고자 1941년 1월 말에 미국 측에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외상을 맡은 적이 있는 거물급 외교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을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노무라 대사의 임명과 동시에 마셜 제도와 캐럴라인 제도에 비행장, 수상기 기지 및 요새 등을 지으면서 급속히 군사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일본은 타이를 끌어들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타이 정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빼앗긴 자신들의 영토를 돌려달라면서 분쟁을 일으켰고 일본은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끼어들었다.

그 결과 1941년 3월에 타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일부를 가져갔고 일본은 나머지 지역들을 타이로부터 지켜 주었다는 공을 내세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쌀에 대한 독점 수입권과 함께 사이공 비행장을 얻었다.

사이공 비행장을 출격한 일본기는 싱가포르를 폭격할 수 있었다.

 

일본이 계속 남진하자 미국의 여론은 전쟁 불사를 외칠 정도로 악화되었다.

1941년 3월 10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들 중 일본과의 전쟁을 지지하는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는 51%로 나타났다.

전쟁 반대는 31%였으며 18% 는 대답을 유보했다.

다음날 최초의 렌드리스 안이 법률로 성립되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은 계속 나빠져 5월 초에는 70%의 유권자가 전쟁에 찬성하고 18%가 반대하여 전쟁 지지율이 최고를 기록했으며 이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진주만 기습 3주 전인 1941년 11월 12일의 여론조사에서 전쟁 지지율은 다소 떨어져 64% 였고 반대는 다소 올라가 25% 가 되었다.

 

1941년 4월 13일에 일본외상 마츠오카와 소련외상 몰로토프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던 스탈린은 배후의 위험을 없앴으며 일본 또한 만주에 주둔시킬 병력을 남방작전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전반기 동안 일본은 북부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증강시켜 여차하면 인도차이나 전역을 석권할 태세를 갖추었다.

7월 2일, 일본정부는 100 만명 이상의 병력을 징집하고 대서양에 나가있던 자국의 상선들을 불러들이는 등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1년 7월 25일, 일본 외무성은 그루 주일대사에게 비시 정부가 일본군에게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허용했다고 통보했다.

일본군이 곧 남부 인도차이나로 쏟아져 들어가 인도차이나 전역을 차지함으로써 이제 일본은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필리핀의 코 앞까지 도달했다.

 

북부 인도차이나 진출 때까지만 해도 중일 전쟁의 연장선이라고 자위하며 억지로 참았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하자 인내심이 바닥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

 

미국의 반응은 재빨랐으며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된 바로 다음날인 1941년 7월 26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를 포함한 미국과 일본 사이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미국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은 8월 1일 이전에 모든 화물을 내려놓고 항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일본의 모든 선박은 화물을 싣거나 내리기 위하여 미국 항구에 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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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미해군의 움직임

 

1941년 4월에 싱가포르의 ADB 회의가 끝났을 때 미해군참모총장과 국무성은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국무성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움직여서 태평양함대의 함정들로 하여금 영연방 국가인 뉴질랜드, 호주, 피지, 타히티를 순방하도록 했다.

당시 이들 나라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잊혀진 채 일본의 위협에 노출되어 고립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들 나라에 미국함정들이 순방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 미국이 챙겨줄 것이라는 신호인 동시에 일본에게는 이들을 겁박할 경우 미국이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경고였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훈련 일정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이런 순방임무를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존 뉴튼 소장의 지휘 아래 중순양함 2척(시카고, 포틀랜드), 경순양함 2척(브루클린, 서배너), 그리고 제3구축함전대를 파견했다.

 

순방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환영이 얼마나 열렬했던지 역사학자 새뮤얼 모리슨 제독이 영관장교로서 경순양함 브루클린에서 근무하던 1942년 말까지도 장교와 수병들이 특히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얼마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는지를 자주 화제로 삼았다고 한다. 

게다가 뉴튼 사령관이 꼼꼼하게 준비하여 순방 도중에도 열심히 훈련을 실시, 훈련이란 면에서도 지장을 받지 않았으므로 스타크 총장도 불평할 수 없었다.

 

문제는 순방이 너무나 성공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순방 성공에 들뜬 국무성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바람을 넣었고 대통령은 스타크 총장을 불러 보다 많은 함정들을 이리저리 내보내어 일본에게 위압감을 주라고 말했다.

스타크 총장은 엉뚱한 요구에 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대통령을 들쑤신 것이 국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스타크 총장은 이번 기회에 국무성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기로 마음먹었다.

 

스타크 총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하와이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파견하여 일본 근해에서 훈련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작성한 다음 국무성에 흘렸다.

예상대로 국무성은 대경실색했다.

헐 국무장관이 백악관에 달려가 일본을 크게 자극할 해군의 무모한 계획을 막아달라고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이후로는 태평양함대의 함정들을 이리저리 내보내어 일본을 겁주라는 소리는 쑥 들어갔다.

 

(미해군 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 http://en.wikipedia.org/wiki/Harold_Rainsford_Stark)

 

1941년 초에 미영 양국의 참모들이 워싱턴에서 회담할 때 미국의 참전이 임박하면 태평양함대의 일부를 대서양 함대로 증원하고 대신 영국은 일부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원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송선 호위 임무를 맡은 대서양 함대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새로 건조되는 함정의 숫자가 필요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조레스 제도 점령같은 몇몇 작전을 위하여 함정이 필요해졌다.

 

독일의 유보트들은 대서양의 중앙으로 옮겨와 항속거리가 짧은 캐나다와 영국의 호위함들이 호위해 주지 못하는 영역에서 수송선을 공격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1941년 4월 3일-4일 사이에 독일 유보트로 이루어진 이리떼가 캐나다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SC-26 선단을 덮쳤다.

유보트들은 캐나다의 호위함정들이 돌아간 후 마중나온 영국의 호위함정들을 만나기 전의 공백 지대에서 선단을 공격하여 22척의 수송선 중 10척을 격침했다.

이 사태로 영국과 대서양 함대 모두 충격을 받았고 입을 모아 태평양 함대의 일부를 대서양 함대로 증원하라고 요구했다.

 

태평양 함대 역시 일본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의 여유가 없었지만 대서양의 상황이 너무 엄중했다.

3일 간의 치열한 토론을 거친 후 스타크 총장은 주저하면서 전함 3척(아이다호, 미시시피, 뉴멕시코), 항공모함 1척(요크타운), 경순양함 4척(브루클린, 필라델피아, 서배너, 내쉬빌), 그리고 제8 및 제9구축함전대를 태평양함대에서 대서양함대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동은 5월말까지 끝났다.

여름이 되자 아조레스 제도 상륙을 위하여 급유함 3척(시마론, 생가몬, 산티), 수송함 3척 그리고 보조 함정 일부가 다시 대서양 함대로 빠져 나갔다.

아조레스 제도 상륙은 나중에 아이슬랜드 점령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식으로 대서양 함대로 빠져나간 전력은 태평양함대 전력의 20% 에 달했으며 그 결과 태평양함대는 모든 전투함 부문에서 일본에 비하여 열세에 빠졌다.

 

1941년 5월 1일 당시 태평양과 인도양에 있던 연합군과 일본해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미해군

 영국해군

 네덜란드해군

 연합군 합계

 일본해군(12월 7일 현재)

 태평양함대

 아시아함대

 항공모함

 3

 0

 1

 0

 4

 10

 전함

 9

 0

 1

 0

 10

 10

 중순양함

 12

 1

 4

 0

 17

 18

 경순양함

 9

 2

 13

 3

 27

 17

 구축함

 67

 13

 6

 7

 93

 111

 잠수함

 27

 28

 0

 15

 70

 64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58)

 

물론 미국은 함정을 대규모로 건조하고 있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넘어지면서 독일이 대서양에 도달하고 영국이 침공 위협에 노출되자 미해군 전략의 근간이 흔들렸다.

지난 3세기 동안 해양을 지배해 온 영국해군을 믿고 미해군은 1922년 이후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해군의 주력을 태평양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제 대서양이 안전한 장벽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일본의 위협 때문에 함대 주력을 다시 대서양으로 옮기기도 어려웠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모두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5월 17일에 통과된제2차 빈슨법에 의하여 미해군은 당시 전력의 25% 에 해당하는 함정들을 발주하여 건조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1940년 7월 19일에 미의회는 "양대양 해군법"(""Two-Ocean Navy Bill")을 통과시켰다.

법안의 내용은 40억 달러를 투입하여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및 잠수함 1,325,000 톤, 보조함정 100,000 톤을 건조하고, 5,000만 달러를 투입하여 해안경비대를 위한 경비정, 호위함 및 각종 함정들을 건조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에 의거하여 에섹스 급 항공모함들, 아이오와급 전함 4척, 대형순양함 알래스카와 괌, 볼티모어급 중순양함들,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대부분, 아틀랜타 급 대공경순양함 대부분, 1,700톤 짜리 브리스톨 급 구축함 대부분과 새로운 세대인 2,100톤짜리 구축함 플레처가 건조되었다.

평시 같으면 건조에 6년이 걸릴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으며 전시를 맞아 건조 시간을 대폭 줄였음에도 대부분 1943년 후반기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대부분 건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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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DB 계획

 

1941년 1월 29일부터 3월 27일까지 워싱턴에서 미해군, 미육군, 그리고 영국군의 대표들이 모여 매일 비밀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는 1941년 3월 27일에 "ABC-1 참모 동의안"(ABC-1 Staff Agreement)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미국이 참전할 경우 기본 전략에 대한 합의사항이 담겼다.

보고서에서는 대서양 및 유럽 전역이 결정적인 전역이며 다른 전역에서 미국의 노력은 이 전역의 승리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여 독일우선원칙을 확정했다.

극동 방면에서는 방어 전략을 취하여 일본이 남진하더라도 미국은 태평양에 전력을 추가배치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물론 이 합의가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의 역할을 전적으로 현상유지에만 한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합의에 따르면 태평양 해역(The Pacific Ocean Area)에서 미태평양함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 해역은 적도 이북에서 동경 180도의 동쪽, 적도 이남은 동경 140도의 동쪽, 그리고 일본을 의미한다.)

 

1. 일본의 해상교통로와 마셜 제도를 비롯한 거점들을 공격하여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말레이를 방어하는 연합군의 작전을 지원한다.

2. 적도 이남, 동경 155도 동쪽의 영국함대를 지원한다.

3. 태평양의 연합군 지역과 해상교통로를 방어한다.

4.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점령을 준비한다.

 

미육군은 해군 및 육군항공대와 협력하여 다음의 임무를 맡았다.

 

1. 오아후 섬을 방어한다.

2. 파나마 운하, 미국 및 캐나다의 서해안과 알래스카를 방어한다.

3. 남아메리카 서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을 지원한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태평양 해역에서 영국과 협의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미육군과 해군의 합동위원회는 레인보우5 작전을 짜면서 개전과 동시에 마셜 제도를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무산되었다.

 

참모 동의안은 또한 극동 지역(Far East Area)에서 연합군의 작전을 다음과 같이 명문화했다.

(극동 지역이란 동쪽으로는 동경 141도, 서쪽으로는 버마의 아이카브를 지나는 동경 92도, 북쪽으로는 양쯔강 하구인 북위 30도, 남쪽으로는 남위 13도를 경계로 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도와 호주는 제외되었는데 미국은 인도 방어에 개입하기 싫어했고 호주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 전투에 병력 파견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 전략 수립에 각국이 협조한다.

2. 각국은 자국 영토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진다.

3. 영국군인 중국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China)이 지역 내의 영국, 미국 및 네덜란드 해군의 전략 수립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미해군은 7월에 이 조항에서 미국아시아함대를 빼달라고 영국에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따라서 아시아함대 총사령관은 독자적으로 필리핀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지도. http://harunarcom.blogspot.kr/2011/04/perpisahan-2008.html)

 

이어서 극동 방어를 위한 회의가 1941년 4월 21일 - 27일에 걸쳐 1주일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회의는 영국극동총사령관(British Commander of Chief Far East)인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이 주재했는데 그는 명목상 중국총사령관인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의 직속상관이었다.

참석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참모총장인 하인 텔 푸어텐 소장과 호주, 뉴질랜드, 인도군 대표 등이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함대 참모장인 윌리엄 퍼넬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소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회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대서양 및 유럽 방면에서는 미국의 참전 여부를 제외한 모든 상황이 명확했다.

영국은 18개월째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미국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따라서 명확한 계획 수립이 가능했다.

 

극동의 상황은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뿐 싱가포르 회의에 참가한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회의 참가국들 모두 전쟁은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꿍꿍이는 알 수 없었다.

 

일본은 지금처럼 중국과의 전쟁만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과의 전쟁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남진할 것인가?

만일 남진한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공격할 것인가?

마닐라? 홍콩? 말레이 반도? 태국? 아니면 보르네오를 비롯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포르투갈령 티모르?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회의 참가자 중 누구도 진주만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참가국들은 일본이 한번에 1곳, 또는 잘해야 2곳을 공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문제의 복잡성은 선전포고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만일 일본이 영령 말레이 반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면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야 할 것인가?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말레이 반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이 이들 지역을 점령하여 주석, 고무 및 원유와 같은 전략물자를 얻게 되면 엄청나게 강력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회의 선전포고를 이끌어 낼 확신이 없었다.

당장 평화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를 지켜주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끌고 간다고 비난할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반대로 필리핀이 공격당할 경우 영국과 네덜란드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을 돕는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은 의회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었으나 브룩포팸 대장이나 텔 푸어텐 소장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싱가포르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영국은 미태평양함대를 분리하려는 시도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싱가포르에 집착했다.

그들은 영국극동함대, 네덜란드 해군, 그리고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미국함정들을 모아 인도양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항해하는 수송선 호위 임무에 투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호주와 뉴질랜드는 자국 근해 방어에 전념하고 싶다는 뜻을 명확히 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또한 연합 사령부에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및 잠수함 2척 이외에는 내놓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 대표인 퍼넬 대령은 영국의 수송선 호위 전략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자국 근해 방어 전략이 모두 패배주의에서 나온 소극적인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말레이 방어에 기여하는 가장 좋은 전략은 태평양함대를 동원하여 마셜 제도를 공격함으로써 일본 해군을 말레이 부근에서 끌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좋은 전략이긴 했으나 일본은 12월 7일 아침에 이 전략을 무력화시켰다. 

 

싱가포르 회의는 1주일 간의 격론 끝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취할 연합방어계획을 힘들게 타결짓고 1941년 4월 27일에 'ADB 계획'('ADB Plan') 이라고 불리는 합의에 도달했다.

ADB 는 미국(America), 네덜란드(Dutch), 그리고 영국(British)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이 계획에서는 각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경우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도록 요청했다.

 

1. 일본군이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 영토에 대하여 직접적인 전쟁행위("the direct act of war")를 취할 때

2. 일본군이 태국에 진입하여 방콕 서쪽이나 크라 지협 이남으로 진출할 때

3. 일본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나 연합국에 충성하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를 점령할 때

 

미군 수뇌부는 ADB 계획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과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1941년 7월 3일에 공식적으로 ADB 계획을 거부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싱가포르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스타크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요구하여 아시아 함대를 영국군의 지휘에서 빼내었다.

 

그래도 미국은 ADB 계획이 권고한 선전포고를 위한 3가지 요건은 받아들였다.

1941년 11월 5일에 미국참모본부는 3가지 경우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방안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올려 재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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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가포르 방어문제

 

1940년 9월 27일에 체결된 삼국동맹 조약으로 독일과 일본은 동맹국이 되었다.

삼국동맹 조약은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미국과 충돌할 경우 독일의 지원을 기대한다고 전 세계에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일본은 손발이 맞지 않았다.

독일은 1940년 7월에 영본토항공전을 치르면서 영국의 뒤통수를 치기 위하여 일본에게 영령 말레이 침공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1941년에 들어서면서 소련 침공을 계획하던 독일은 마음이 바뀌어 일본이 시베리아를 공격해 주길 바랐으나 남방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은 반대로 1941년 4월 13일에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버렸다.

 

1941년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일본에게 시베리아를 침공해달라고 미친듯이 요청했으나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도쿄의 독일대사관은 1941년 후반기 미국과 일본의 교섭 과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독일은 미국만큼이나 놀랐다.

 

일본의 남방 진출에 대응하기 위하여 연합국이 협의를 시작한 것은 실제로 독일에 대응하기 위하여 협의를 시작한 것보다 더 빨랐으나 진전이 느렸다.

대서양에서는 미해군과 영국해군이 독일의 대미선전포고 이전부터 이미 사실상의 동맹군으로서 긴밀하게 협력한 반면 태평양에서는 진주만 기습 때까지 실효성있는 협력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1937년에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0월에 독일, 이탈리아 및 일본사이에 방공협정이 체결되자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은 앞으로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동시에 싸워야 할 것으로 보고 해군참모총장 레이히 대장에게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레이히 제독은 미국이 일본 및 독일과 싸우려면 반드시 영국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인식 하에서 미국의 전쟁계획국장 로열 잉거솔 대령이 영국해군의 톰 필립스 대령과 1938년 1월에 런던에서 만났다.

여기서 양국은 만일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경우 영국함대를 싱가포르에 , 미함대를 진주만에 전개하여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유럽의 전운이 짙어가던 1939년 5월에 영국은 전쟁계획국에 장교를 파견하여 지중해 문제 때문에 싱가포르에 함대를 파견할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미해군이 영령 말레이 방어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이후 미육군과 해군의 합동계획위원회는 일본과의 개전시 태평양에 영국해군이 없다는 전제 하에 레인보우1 작전을 짰다.

 

1940년 9월과 1941년 1월-3월에 걸친 미국과 영국 간의 군사회담에서 양국은 싱가포르 문제를 두고 격돌했다.

영국은 싱가포르가 영령 말레이의 방어와 인도양을 거쳐 호주로 연결되는 연락선을 확보하는데 필수적인데 영국해군이 함대를 투입할 여력이 없으므로 미태평양함대가 싱가포르에 강력한 분견대를 파견하든지 아니면 아시아 함대를 크게 증강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은 일본이 싱가포르를 폭격할 수 있는 거리에 비행장을 확보하면 함대를 가지고 싱가포르 방어가 불가능하며 태평양함대를 분산시켰다가는 일본에게 각개격파될 뿐이라고 반박했다.

 

미해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리치먼드 켈리 터너 소장은 영국해군이 1939년 말과 40년 초반에 독일공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전함 바함과 워스파이트, 그리고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의 수리를 미국에 요청한데 대해 왜 그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보내어 수리하지 않는지 물었다.

영국 측은 싱가포르에는 주력함의 수리에 필요한 인력, 예비 부품 및 수리 설비가 없다고 대답했고, 터너 소장은 그렇다면 미해군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싱가포르를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리치먼드 켈리 터너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Richmond_Kelly_Turner)

 

교섭에 참가했던 호주 대표단은 자국의 미미한 해군 세력에서 일부라도 싱가포르 방어에 차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태즈매니아 해 방어에 전념하게다는 뜻을 피력했다.

실제로 영국을 따라 대독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호주는 독일 통상파괴함의 공격을 막는데 진력하고 있었다.

독일의 통상파괴함 쉬프45호는 소련 북해안을 따라 항해한 다음 1940년 9월 5일에 베링해를 통하여 태평양에 진입한 후 호주 근해에서 60,000톤의 선박을 격침하고는 아프리카를 돌아 독일로 돌아갔다.

쉬프16호는 1940년과 41년에 걸쳐 인도양에서 145,000 톤의 선박을 격침했으며 쉬프41호(코모란)는 동인도양에서 호주해군의 경순양함 시드니와 싸워 격침되었으나 전투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시드니도 호주도 돌아가는 도중 침몰했다.

 

교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41년 2월 10일에 양국 대표단의 보고서에서 영국은 싱가포르의 확보를,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입장 차이를 확인했다.

 

교섭이 결렬될 위기에 빠지자 결국 영국이 물러섰다.

영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면 미해군이 지중해 방면에서 도와주는 것을 전제로 최소한 6척의 주력함을 싱가포르에 파견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은 이 모든 것을 다 헝클어뜨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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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삼국 동맹

 

미함대의 훈련이 진행되던 1940년 4월에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해 석유 수출을 포함한 통상 조약을 맺자고 추근대면서 압력을 넣었다.

미국의 헐 국무장관이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하자 일본은 조약 체결에서 물러서는 대신 고압적인 태도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구매 사절단을 보냈다.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에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랑스는 6주 만인 6월 22일에 항복했다.

유럽 제일의 육군 대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프랑스의 어이없는 참패는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장 일본이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려고 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진 6월 7일,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하와이에

 

'서쪽에서 대양을 건너오는 호전적인 국가의 공격'

 

에 주의하라고 경고했고 리처드슨 제독은 오아후 서쪽 해상에 대하여 항공초계를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육군의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력만 간신히 빼내온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던 영국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1940년 7월 18일에 중국으로 통하는 버마로드를 폐쇄했다.

이로써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는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의 하노이 항만이 남게 되었다.

영국본토항공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은 버마로드를 재개통했다.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석권하자 일본에게는 손쉬운 정복의 기회가 열렸다.

중일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본국이 함락되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이제 독일이 자신의 강력함을 증명하자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던 일본해군의 고위 장교들 사이에서도 연합국과의 충돌 가능성을 무릅쓰고 남방으로 진출하고픈 욕망이 커졌다.

 

프랑스가 항복한 1940년 6월 22일에 일본에서는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었다.

육상으로 도조 히데키 중장이 입각했고 외상은 친독파인 마츠오카 요스케가 맡았다.

10대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마츠오카 외상은 당시 일본인 중에서는 영어가 능숙했고 미국과 미국인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한정된 경험으로 미국과 미국인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마츠오카가 아는 미국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노에 내각 아래에서 일본의 전체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정부는 경제의 큰 부분을 이루는 재벌에게 특혜를 주면서 유착하여 거의 지배했다.

정당은 해체되어 대정익찬회로 통합되었고, 노동 운동은 탄압을 받았으며, 국민들은 근검절약을 강요받았다.

 

1940년 8월 30일, 프랑스의 페탱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북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의 진주를 용인했다.

일본군의 북부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이 주장하던 동남아시아의 현상유지 정책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은 대단히 불쾌했지만 남방으로의 진출이라기보다는 중국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의도라고 보았기 때문에 즉각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장제스 정권은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항구인 하노이 항을 잃었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추축진영에 가담했다.

일본은 독일 주도의 '유럽 신질서'를 지지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 주도의 '대동아 신질서'를 지지했다.

 

또한 삼국 중 누군가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돕기로 했는데 이는 공공연히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조항이 나중에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양면전쟁의 위협을 가하여 미국을 중립상태로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일본 또한 삼국동맹으로 미국의 배후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미국이 일본의 팽창정책에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비록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태생을 보나, 정치 형태를 보나, 국민들의 정서를 보나 추축진영을 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삼국동맹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추축 진영으로서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한배를 타게 되었고 이제 미국으로부터는 확실한 적으로 분류되었다.

 

(삼국동맹조약 조인식. http://en.wikipedia.org/wiki/Tripartite_Pact)

 

고노에 수상은 삼국동맹을 내켜하지 않았으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마츠오카 외상에게 밀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지 못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삼국동맹을 반대했다.

그는 삼국동맹조약 체결 직후 고노에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는 만일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6개월이나 1년은 마음껏 설칠 자신이 있으나 2년, 3년째는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삼국동맹은 이미 체결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총리께서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대장은 위에서 시킨다고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건 말건 아시아 문제는 미국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으며 미해군은 본토를 지키는데 집중해야 했다.

 

리처드슨 대장은 보급과 정비 문제 때문에 진주만을 싫어했다.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는 함대에 보급하기 위해서 수송함들이 미서해안으로부터 3,000km 넘는 거리를 쓸데없이 왕복해야 했다.

연료의 비축량이 모자라서 함대는 마음껏 훈련할 수 없었으며 장비와 보급품의 수급에도 지장을 받았고 수병을 모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 근무하게 된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호놀룰루에는 백인 여성이 거의 없고 상점이나 식당의 여자 종업원들도 미본토의 예쁜 백인 여자 종업원들보다 못 생긴데다가 불친절해서 수병들이 싫어했다.

리처드슨 제독이 생각하기에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할 경우 함대는 진주만보다는 시설이 좋고 수병들의 충원이 용이한 미본토 서해안에서 전쟁준비를 더 잘 갖출 수 있었다.

 

진주만으로 옮긴 직후부터 리처드슨 제독은 해군 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에게 함대를 미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러자 그는 1940년 7월과 10월에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무부와 의회를 포함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함대가 미본토 서해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0월 8일에 리처드슨 제독을 불러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함대가 하와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 견해는 헐 국무장관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리처드슨 제독이 계속 의원들을 만나 함대의  서해안 철수를 주장하고 다니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해임해 버렸다.

 

뻣뻣한 리처드슨 제독의 태도에 화가 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투부대를 태평양함대로, 정찰부대를 대서양함대로 만들고 상징성이 큰 명칭인 미함대 사령관직을 폐지해 버렸다.

미함대 사령관직은 전쟁이 터진 이후에 부활한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젊은 장성 중에서 뽑기로 했다.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소장파 장교 중에서 유능하다고 손꼽히는 2명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항해국장 체스터 니미츠 소장과 전투부대 순양함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소장이었다.

녹스 장관은 니미츠 소장을 염두에 두고 의사를 타진해 보았으나 뜻밖에도 사양했다.

이유는 50명이 넘는 선배들을 제치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가게 되면 질시에 휩싸이고 그러면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 사령관 자리는 니미츠 소장의 3년 선배인 허즈번드 킴멜 소장에게 돌아갔다.

킴멜 소장은 1941년 2월 1일에 임시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사령관으로 취임했고 킴멜 제독의 취임과 함께 전투부대는 태평양함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허즈번드 킴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만일 전투부대를 진주만에서 미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키자는 리처드슨 제독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기습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야마모토 제독이라도 미본토 서해안까지 항공모함들을 끌고 와서 미함대를 기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리처드슨 제독이 진주만을 싫어한 까닭이 적의 항공공격에 대한 우려라기보다는 주로 보급과 후방지원 문제였기 때문에 그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진주만에 전진배치된 일은 전쟁 초반에 기습을  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덕분에 진주만의 급속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0년 5월부터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이래 1년 만에 진주만의 해군공창에 근무하는 민간인의 수가 2배로 늘었고 해군 소속의 인원은 몇 배로 늘었다.

공창을 확장하기 위하여 드넓은 땅을 매입하는데 예산이 아낌없이 투입되었다.

공창에서 일하는 해군과 민간인의 숙소가 건설되고 새로운 건선거가 만들어지고 넓은 대지에 주물공장, 기계공장 및 공구공장이 들어서면서 진주만은 본토의 대기지와 맞먹는 함선 수리 및 정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의 복구 과정이나 미드웨이 해전 당시 요크타운의 수리를 비롯하여 전쟁의 여러 국면에서 진주만의 뛰어난 함선 수리 및 정비 능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진주만이 짧은 시간에 대규모로 개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태평양 함대가 미본토 서해안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진주만의 개발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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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진배치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6개월 전인 1939년 4월 초부터 일본과 이탈리아에 향후 어떤 전쟁에서든 같은 편으로 싸운다는 내용의 군사동맹을 체결하자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이타가키 육상은 이 제안에 찬성이었으나 요나이 해상은 반대했다.

결국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한 시라누마 총리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1939년 8월 23일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는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36년에 추축 3국 사이에 체결되었던 방공협정을 배반하는 독소 불가침 조약은 일본에게 충격과 함께 골칫거리를 안겨 주었다.

당장 노몬한 사건에서 소련의 입장이 강력해지면서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협상의 여지도 없이 사실상 소련의 의향에 따라 협정을 맺어야 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독일의 외교적 배신행위로 인하여 새삼 일본과 독일의 국익이 불일치하는 면이 부각되었다.

독일은 일본과 싸우는 중국군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훈련을 시켰으며 일본에게 중일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은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원칙을 지지했다.

독일이 유럽에서 승리한다면 제1차 대전 이후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태평양의 독일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6개월간 일본은 뚜렷하게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였다.

 

일본의 친서방 경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체주의적인 일본 지배층은 사상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독일의 나치즘에 이끌렸다.

육군 중심의 동맹파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이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하여 동아시아에서 일본에게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격파해버리면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그들의 식민지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해군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은 미국과 영국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반대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동맹파든 반대파든 연합국이 약화되는 것이 일본의 이익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분명했다.

미국은 일본의 남방 진출을 촉진할 유럽 추축세력과 일본의 결합을 막고 싶어했다.

주일대사 그루는 일본 각료를 만날 때마다 중립을 촉구했다.

일본 측은 중립을 원하면 미국은 중국에서 손을 떼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1940년 말까지 중국 해안이 거의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 외부 세계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길은 버마 로드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노이 항만이 남았다.

 

1940년 1월 16일에 성립한 요나이 내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중국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중국 문제를 바라보는 일본과 미국의 시각은 너무나 달랐고 이건 요나이 내각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1940년 3월 31일에 미국의 언론들이 제21차 함대훈련이 하와이 근해에서 실시될 것이라고 보도하자 일본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5년 전인 1935년에는 함대훈련이 일본에 더 가까운 곳에서 실시되어도 침묵했던 일본은 이번에는 강경하게 나왔다.

일본 언론들은 미국의 함대훈련이 일본을 윽박지르려는 의도라고 보도했으며 해군성 대변인은 4월 4일에 기자회견을 열어 만일 미함대가 날짜 변경선을 넘으면 일본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는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함대훈련을 계기로 짧게 지속되던 일본정부의 친서방 경향도 끝장났다.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4월 4일에 시작된 미함대의 함대훈련은 날짜변경선을 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훈련 종료를 이틀 앞둔 5월 7일에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대장에게 정찰부대의 출발을 2주간 미루고 전투부대는 앞으로 오아후 섬의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처드슨 제독이 이유를 묻자 스타크 총장은 전투부대가 진주만에 머무름으로써 일본의 팽창 야욕을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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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일 통상조약 실효

 

1937년 12월의 파나이 호 격침 사건 직후 일본군은 남경에서 30만명의 중국인을 강간 및 학살하는 난징사건을 일으켰다.

난징학살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일본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한 실질적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하는 잔학 행위는 미국의 여론을 점차 악화시켰다.

 

일본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에 소이탄 공격을 가하여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처음으로 경제제재 카드를 빼들었다.

1938년 6월 11일에 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민간인 폭격을 비난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3주 후인 7월 1일에 헐 국무장관은 미국정부는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는 국가에 비행기나 그 부품을 수출하는 행위를 강경하게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헐 장관은 일본을 겨냥한 이 무역제재 조치를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라고 불렀다.

 

비행기와 그 부품의 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치명타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석유나 고철의 수출을 금지한다면 이는 일본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

특히 석유는 일본이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계속했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석유와 고철 수출의 금지는 미일통상조약 위반이었다.

실질적인 고려로서 만일 일본이 석유를 수입할 수 없게 되면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공할 것이 확실했는데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며 전쟁을 의미했다.

 

미국은 석유를 수출하여 일본의 침략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침략을 막기 위해 수출을 끊으면 전쟁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 또한 침략을 할수록 석유가 더 많이 필요한데 비하여 수입선이 끊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안정적으로 석유를 얻으려면 침략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까지 확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인조 석유를 생산하고 만주국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전 영역에 걸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이면 모두 시추공을 뚫었다.

그리하여 1년에 약 300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었으나 이는 2,000 만 배럴이 넘는 소비량의 일부만을 충당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일본은 석유 수입이 끊기는 상황을 대비하여 국내에 대규모의 저유 시설을 건설하고 최대한 많은 석유를 수입하여 비축했다.

1940년에 일본이 수입한 원유와 각종 정제유는 3,716만 배럴에 달했다.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연말의 일본 석유 비축량은 4,890만 배럴이었다.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1938년 12월 22일에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의 점령지를 인정하며 경제적 특혜를 요구하는 강압적인 조건으로 중국에 화평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당연히 거부했다.

고노에의 뒤를 이은 히라누마 내각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히라누마 총리는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여 독일과의 군사협정 체결에 반대했다.

 

1939년 2월 26일에 사이토 히로시 주미대사가 현지에서 사망했다.

국무성은 화해의 제스처로 중순양함 애스토리아에 사이토 대사의 유골을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

애스토리아는 3월 18일에 아나폴리스를 출항하여 4월 17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함장 리치먼드 켈리 터너 대령을 비롯한 애스토리아의 승무원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타가키 육상이 그루 주일대사와 터너 대령을 초청한 만찬은 매스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그들이 중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짓에 대하여 미국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증거라고 선전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CA-34 애스토리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결론적으로 애스토리아의 항해는 효과가 없었다.

애스토리아가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일본군은 중국 남부의 하이난 섬을 점령했는데 그곳에는 철광산이 있었으며 말레이 점령을 위한 좋은 출발지였다.

일본은 이어서 인도차이나 근해의 스프래틀리 군도를 점령했다.

아리타 외상은 하이난 섬과 스프래틀리 군도의 점령은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939년에 중국전선은 소강상태였다.

일본 육군은 1938년 10월에 한커우를 점령한 이후 사실상 공세를 중단했으며 충칭의 국민당 정부는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은 체면이 깎이고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해군의 발언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본해군은 중일전쟁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희망은 바다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그들의 배를 아무 걱정없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양의 석유가 펑펑 나고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려면 네덜란드는 물론 영국 및 미국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보여준 태도는 그들이 싸우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1939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7월 6일에 충칭의 대사관 부근에 있던 미국인 교회가 폭격을 받고 다음날 정박 중이던 미국포함 투툴리아 부근에 몇 발의 폭탄이 떨어지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본격적인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1939년 7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미일통상조약의 실효를 선언했다. 

이로써 1911년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미일통상조약은 6개월 후인 1940년 1월 26일을 기하여 실효하게 되었다.

8월 25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민의 80% 가 통상조약의 폐기를 지지했으며 조약이 실효되는 즉시 일본에 대해 금수조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비율 또한 80% 를 넘었다.

그러나 만일 통상조약의 폐기와 뒤이은 금수조치가 사실상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정도의 지지가 나왔을지는 의문이다.

불과 1달 전의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걸려있는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민은 6% 에 불과했다.

 

일본정부는 미국의 통상조약 폐기 통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국 정부가 동아시아의 여건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한 새로운 통상조약을 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논평을 내면서 충격을 감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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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태평양의 미해군

 

1922년부터 미해군은 주력을 태평양에 배치했다.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미해군의 고위 장교 대부분이 다음 전쟁은 일본과 싸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31년 4월 1일 현재 미해군의 주력 전투함은 전함 15척, 항공모함 3척(랭글리, 새러토가, 렉싱턴), 순양함 18척, 구축함 78척, 잠수함 55척이었으며 이외에 포함, 구잠함, 예인선 및 각종 모함 115척이 있었다.

이들 함정들은 1923년 이래로 미국함대(United States Fleet)와 소규모의 아시아 함대(Asiatc Fleet)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국함대는 다시 4개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1. 전투부대(Battle Force) : 전함 및 항공모함 세력과 순양함전단 1개, 구축함전대 3-4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태평양에 전개했다.

1941년 2월 1일자로 태평양함대로 이름이 바뀐다.

 

2. 정찰부대(Scouting Force) : 전투부대에 포함되지 않은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대서양과 카리브 해에 전개했다.

구형전함 3척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훈련전단(Traing Squadron)을 포함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1일자로 대서양함대로 이름이 바뀐다.

 

3. 잠수함 부대(Submarine Force) : 태평양과 대서양에 양분되어 있었다.

 

4. 기지부대와 지원부대(Base Force and Train) : 역시 태평양과 대서양에 양분되어 있었다.

 

아시아 함대는 규모가 훨씬 작았으며 산뚱 반도의 옌타이에 기지를 두고 구축함 19척으로 이루어진 남중국 순찰대(South China Patrol), 상하이에 기지를 두고 강상포함들로 이루어진 양쯔강 포함대(Yangtze River Gunboat Flotilla), 잠수함 12척 및 약간의 지원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835년에 동인도전대(East India Squadron)로 시작한 아시아 함대는 100 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민과 그들의 재산을 해적을 비롯한 위협으로부터 지켰다.

임시로 대장 계급을 가지는 아시아함대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Asiatic Fleet)는 상하이 조계에 주둔하는 제4해병연대와 베이징의 미국공관을 지키는 해병여단도 지휘했다.

아시아 함대의 함정들은 1년에 몇 달은 필리핀에 정박했으며 싱가포르, 하노이, 홍콩, 바타비아와 일본의 항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항구들을 순방했다.

이러한 순방은 장교에게는 좋은 경력이 되었고, 수병에게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동아시아의 미국인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미국함대는 매년 봄에 모두 모여 훈련을 했는데 이것을 함대훈련(Fleet Problem)이라고 불렀다.

함대 훈련은 주로 태평양에서 실시하여 정찰부대가 파나마 운하를 통하여 태평양으로 이동했는데 1939년에는 카리브 해에서 실시하여 전투부대가 운하를 통과했다.

 

함대훈련은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이 만주국을 만든 1932년의 함대훈련 때는 기간이 통상의 7주 보다 2주 더 길어져 5월 28일까지 정찰부대가 대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평양에 머물렀으며 이어서 항공모함 3척이 동시에 훈련을 시작하여 여름 내내 함재기를 띄워대면서 태평양을 돌아다녔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1932년의 경우를 제외하면 함대 훈련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실시했다.

웨이크, 괌, 그리고 필리핀이 서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짜변경선을 넘는 경우는 없었으며 매년 일본해군의 참관을 허용했다. 

 

미해군과 일본해군은 1930년대 말까지 꾸준히 교류했다.

매년 미국함정이 요코하마나 나가사키를 방문했으며 일본함정도 일본인이 많이 사는 호놀룰루나 샌프란시스코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미해군 장교는 일본해군 장교가 대체로 신사이며 무식한 육군 장교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다.

일본해군 장교 중 많은 수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도 이런 우호적인 평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해군은 일찌기 장교 일부를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정통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하는 정책을 써 왔다.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좋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적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큰 공을 세운 로슈포트 중령이나 태평양 함대 내의 대표적인 일본통인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이 이러한 정책에 따라 일본에 파견된 경력이 있다.

그러나 배출된 인원은 20년 동안 겨우 36명으로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1941년 10월에 해군언어학교(Navy Language School)를 설립하여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인원들을 대량으로 길러내어 수요를 맞출 수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미해군은 조약의 제한에다가 정부와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필수 인원을 확보하고, 함정과 무기를 정비할 예산을 따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미해군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였다.

 

1933년 6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불황 타개용 긴급 자금의 일부를 해군에 배정했다.

덕분에 기능을 멈추었던 미국의 조선산업이 전해의 패러것 급 구축함 8척에 더하여 요크타운 급 항공모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20척, 그리고 잠수함 4척의 주문을 받으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34년 3월에 미의회는 제1차 트라멜-빈슨 법을 통과시켜 미해군을 런던 조약이 허용하는 한계까지 키울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의회는 인력 충원을 위한 예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35년 현재 미해군은 8,063명의 장교와 82,500명의 부사관 및 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선 함정들의 승조원 충원율은 81% 에 지나지 않았다.

 

미해군은 1935년부터 군축조약 실효에 대비해 신형 함정들의 설계에 들어갔다.

노스캐롤라이나 급 전함의 설계가 1935년에 시작되어 1937년에 완성되었고, 이어서 38년에는 사우스다코타 급, 39년에는 아이오와 급의 설계가 완성되었다.

대공경순양함 애틀랜타 급의 설계도 1937년에 완성되었다. 

 

1938년 5월 17일에 미해군 세력을 20% 증강하는 내용의 제2차 빈슨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신형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이 추가로 건조되기 시작했다.

6월에는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가 전함의 배수량을 35,000톤에서 45,000톤으로 늘리기로 합의함으로써 아이오와급 전함의 건조가 가능해졌다.

물론 일본은 이미 64,000톤짜리 야마토와 무사시를 건조하고 있었다.

 

1939년이 되자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가 취역했으며 와스프와 호넷은 건조 중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급 전함 2척도 건조 중이었으며 사우스다코타 급 3척이 새로 건조에 들어갔다.

이외에 구축함 31척과 잠수함 6척도 건조 중이었다.

 

(CV-5 요크타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해군은 이제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해군 관계자들의 눈에는 성장이 너무 느렸다.

1933년 7월 1일부터 1939년 6월 30일까지 6년간 새로 취역한 전투함은 항공모함 2척, 순양함 16척, 구축함 53척, 잠수함 20척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로 1943년 한해 동안 취역한 함정 숫자는 항공모함 6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항공모함 24척, 전함 2척, 순양함 11척, 구축함 129척, 호위구축함 221척, 잠수함 66척이었다.

 

1939년 7월 1일 현재 미해군은 전투함 수는 증강되었으나 수송함들은 부족했다.

당시 미해군이 보유한 수송함은 병력수송함 2척, 화물수송함 3척, 급유함 3척, 탄약수송함 1척이 전부였다.

신형의 시마론 급 고속급유함 2척과 수상기모함, 잠수모함, 그리고 구축함모함을 합쳐 5척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병력도 39년 9월 8일 현재 126,418명으로 여전히 모자랐으며 훈련상태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미해군의 가장 큰 문제는 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미해군은 태평양에서 항상 기지가 모자랐으며 덕분에 함정들의 해상작전 지속능력이 긴 편이었으며 해상보급에도 일찌기 눈을 떴다.

하지만 어쨌든 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공격을 받았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근거지가 없어 후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의회는 1938년 5월에 해군장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만들어 미본토와 해외 영토에 추가적인 해군기지와 잠수함 및 해군항공기지를 만들 필요성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헵번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12월 1일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이후 미국이 해군기지를 정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헵번 보고서의 내용 중 태평양과 관련된 주요 권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알래스카 : 코디액 섬과 더치 하버에 잠수함 기지와 비행장을 만들고, 시트카에 비행장을 만든다.

오아후 섬 : 진주만의 포드 섬 비행장을 확장하고, 카네오헤에 비행장을 만든다.

미드웨이와 웨이크 :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초호에 커다란 모함이나 급유함이 들어갈 수 있도록 준설한다.

괌 :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대공포와 해안포를 배치하며 전면적인 공격에 대항하여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킨다.

 

이외에도 햅번 보고서는 존스턴 섬, 팔미라 섬, 칸톤 섬, 그리고 사모아의 끝자락에 있는 로즈 섬에 유사시 수상기 모함이 전개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설비를 갖추고 대서양 지역의 기지들도 개발하라고 권고했다.

 

의회는 가급적 헵번 보고서의 권고를 따랐으나 괌의 개발에는 반대했다.

 

해군 전략가들은 일본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오면 필리핀 전토를 방어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미군에게 있어 최선은 바탄 반도에 들어가 일본군이 마닐라 만의 항구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때 괌은 반격의 출발점이 될 것이었다.

괌이 강력한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갖추고 주변의 사이판을 제압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일본군은 필리핀 동쪽의 항로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며 미해군은 미드웨이와 웨이크를 징검다리 삼아 괌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필리핀을 구원하러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의회는 생각이 달랐다.

괌의 위치 때문에 일본도 전력을 다하여 괌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지탱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아프라 항을 준설하기 위한 500만 달러의 예산이 1939년 2월 23일에 하원에서 205대 168로 부결되자 미해군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괌은 무방비로 내버려졌고 개전과 동시에 점령되었다.

 

해군 관계자들은 의회가 일본을 자극할까봐 두려워 괌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만약 괌이 건재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초기 진행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며 아위숴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일본군의 전면적 침공에서 괌을 지키려면 대규모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했을 것이며 그렇게 해도 점령을 면할 뿐 고립되어 무력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키고자 했던 웨이크에도 방어병력을 충분히 배치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이 괌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능력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가능하다고 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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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본해군(2)

 

어뢰는 일본해군이 거둔 뛰어난 공학적 업적이었다.

일본해군은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주력함의 비율이 제한을 받게 되자 화력을 보충할 방법으로 어뢰에 눈을 돌려 1933년에 수상함용 산소어뢰의 개발에 성공했다.

93식 어뢰라고 불린 직경 610mm(24인치) 짜리 어뢰는 490kg 짜리 탄두를 매달고 49노트로 20,000m, 37노트로는 무려 40,000m 를 항주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발사하면 명중율이 떨어졌으므로 1943년에 개발된 3형에서는 탄두를 780kg 으로 늘리는 대신 사정거리를 줄였다.

그래도 49노트로 15,000m, 37노트로 30,000m 를 항주했다.

 

(93식 산소어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31년부터 미국의 수상함과 잠수함에 쓰이던 21인치(533mm) 짜리 Mk 14 어뢰는 292kg 의 탄두를 달고 46노트로 4,100m, 31노트로 8,200m 를 달릴 수 있었다.

미군어뢰에 사용된 토펙스 폭약이 일본폭약보다 60% 정도 강력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93식 어뢰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93식 어뢰는 접촉신관을 사용했으며 일선에서 신관의 감도를 조절할 수 있었는데 불발을 없애기 위하여 지나치게 민감하게 조절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산소어뢰가 명중하기 전에 함정이 만드는 물결에 부딪혀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2년 후인 1935년에는 잠수함용 산소어뢰를 개발했다.

95식으로 불린 잠수함용 어뢰는 직경이 21인치(533mm)였으며 400kg 짜리 탄두를 달고 50노트로 9,000m, 46노트로 12,000m 를 항주할 수 있었다.

 

91식 어뢰라고 불린 직경 450mm 짜리 항공어뢰는 산소어뢰는 아니었으며 205kg 짜리 탄두를 장착하여 토펙스 262kg 을 장착한 미국의 22.4인치(569mm)짜리 Mk13 항공어뢰보다 위력이 약하고 사정거리가 짧은 대신 더 빨랐다.

하지만 91식 어뢰의 가장 큰 장점은 투하 조건으로 460 km/hr 이상의 속력으로 날면서 300m 높이에서 투하할 수 있었다.

반면 Mk13 어뢰는 200km/hr 의 속력으로 15m 높이에서 투하해야 했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증명되듯 준비를 갖춘 적에게 이런 속도와 고도로 다가간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이후 미해군은 Mk13 어뢰의 투하조건을 완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여 종전에 즈음해서는 760km/hr 의 속력으로 730m 높이에서 투하할 수 있었다.

 

어뢰 이외에 일본해군이 가진 뛰어난 장비로는 조명탄과 쌍안경이 있었다.

일본군의 조명탄은 미군 것보다 밝고 신뢰성이 좋았으며 쌍안경 또한 미군 것보다 뛰어났는데 특히 야간에 그러했다.

그리하여 미해군 장교들과 수병들은 일본군 포로를 잡으면 쌍안경을 뺏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일본해군장교들은 항해술이 뛰어났다.

따라서 솔로몬 제도와 필리핀 근해의 복잡한 해역에서 대규모 함대가 야간에 고속으로 기동하면서도 좌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본해군은 인력충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실제로 1932년 당시 일본해군은 전함 6척과 순양전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해군 병력은 83,822명으로 전함 15척을 보유한 미해군보다 불과 1,000 명 정도 적었다.

미국 중순양함에 평균 517명이 탄것에 비하여 일본 중순양함의 승조원은 평균 692명이었다.

당시 양국이 일선에 투입하고 있던 구축함은 공히 72척이었는데 미국 구축함 승조원이 합계 7,773명인 반면 일본 구축함 승조원은 9,547명이었다.

일본 함정 승조원들의 체력 조건은 까다로웠고 함정 생활은 미해군이나 영국해군보다 힘들었다. 

 

평화시 일본해군의 장교 충원은 미국의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히로시마 만의 에타지마 병학교에서 담당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해군도 미해군과 마찬가지로 장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고 장교의 질적 저하가 심각했다.

그래도 일본해군의 경우는 육군보다는 사정이 나았다고 한다.

 

일본해군의 훈련은 철저하고 실전적이었다.

훈련은 대부분 먼바다에서 실시되었으며 악천후와 관계없이 실전과 비슷한 환경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훈련을 1달 이상 실시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함정이 바다에 나가있는 동안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도 없는 고된 일과가 지속되었다.

혹독하고 실전에 가까운 훈련의 효과는 태평양 전쟁의 초기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훈련 도중 사상자가 발생해도 언론에 의하여 보도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미해군은 평화시에는 가급적 따뜻한 남쪽 바다에서 좋은 날씨를 가려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 도중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예상되는 언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해군 당국은 훈련 내용이 실전과 동떨어지더라도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해군의 맹렬한 훈련은 매년 4월이 되면 일단락되고 이후 6월까지 2달간 연합함대는 휴식을 취하면서 중국 해안을 따라 짧은 항해를 다녔다.

이후 후반기 들어서면 다시 전대 및 함종별로 훈련을 시작하여 함대 훈련으로 이어졌으며 연말에는 연합함대가 모두 모여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

 

일본의 함대 세력은 중국 작전을 책임진 지나방면함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연합함대 소속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연합함대는 9개의 함대와 지상발진항공기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상세는 아래와 같다.

 

* 연합함대 직속(사령관 :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 본토근해의 방위를 담

기함 : 나가토, 기지 : 하시라지마

 

제 1전대 : 전함 나가토(長門), 무츠(陸奧)

제 24전대 : 특설순양함 호코쿠마루(報國丸), 아이코쿠마루(愛國丸), 세이토마루(淸燈丸)

제 11 항공전대 : 수상기모함 미즈호(瑞穗), 치토세(千歲)

수상기모함 : 치요다(千代田)

구축함 : 야카제(矢風)

표적함 : 셋츠(攝津)

공작함 : 아카시(明石)

 

* 제 1함대 (사령관 : 다카스 시로 중장) - 전함주축의 본토방어 주력함대

기함 : 이세​, 기지 : 하시라지마

 

제 2전대 : 전함 이세(伊勢), 휴가(日向), 후소(扶桑), 야마시로(山城)

제 3전대 : 전함 콘고(金剛), 하루나(捧名), 키리시마(霧島), 히에이(比叡)

제 6전대 : 중순양함 아오바(靑葉), 키누가사(衣笠), 후루타카(古應), 카고(加古)

제 9전대 : 경순양함 키타카미(北上), 오오이(大井)

제 3 항공전대 : 항공모함 호쇼(鳳翔), 즈이호(瑞鳳), 구축함 미카즈키(三日月), 유우카제(夕風)

제 1 수뢰전대 : 경순양함 아부쿠마(阿武猥)

I

제 6 구축대 : 구축함 이가즈치(雷), 이나즈마(電), 히비키(響), 아카즈키(曉)

제 17 구축대 : 구축함 우라카제(浦風), 이소카제(磯風), 야카제(谷風), 하마카제(浜風)

제 21 구축대 : 구축함 하츠하루(初春), 네노히(子日), 하츠시모(初霜), 와카바(若葉)

제 27 구축대 : 구축함 아리아케(有明), 유구레(夕暮), 시라츠유(白露), 시구레(時雨)

 

제 3 수뢰전대 : 경순양함 센다이(川內)

I

제 11 구축대 : 구축함 후부키(吹雪), 시라유키(白雪), 하츠유키(初雪)

제 12 구축대 : 구축함 무라쿠모(叢雲), 시노노메(東雲), 시라쿠모(白雲)

제 19 구축대 : 구축함 이소나미(磯波), 우라나미(浦波), 시키나미(敷波), 아야나미(綾波)

제 20 구축대 : 구축함 아마키리(天霧), 아사키리(朝霧), 유키리(夕霧), 사기리(狹霧)

 

* 제 2함대 (사령관 : 곤도 노부타게 중장) - 중순양함 주체의 남방전술함대

기함 : 다카오, 기지 : ​하이난

 

제 4전대 : 중순양함 다카오(高雄), 아타고(愛宕), 쵸카이(鳥海), 마야(摩耶)

제 5전대 : 중순양함 나치(那智), 하구로(羽黑), 묘고(妙高)

제 7전대 : 중순양함 모가미(最上), 쿠마노(熊野), 스즈야(鈴谷), 미쿠마(三猥)

제 8전대 : 중순양함 도네(利根), 치쿠마(筑摩)

제 2 수뢰전대 : 경순양함 진쯔(神通)

I

제 8 구축대 : 구축함 아사시오(朝潮), 미치시오(滿潮), 오오시오(大潮), 아라시오(荒潮)

제 15 구축대 : 구축함 쿠로시오(黑潮), 오야시오(親潮), 하야시오(早潮), 나츠시오(夏潮)

제 16 구축대 : 구축함 하츠카제(初風), 유키카제(雪風), 아마츠카제(天津風), 도키즈카제(時津風)

제 18 구축대 : 구축함 카스미(), 아라레(), 카게로(陽炎), 시라누이(不知火)

 

제 4 수뢰전대 : 경순양함 나가(那珂)

I

제 2 구축대 : 구축함 무라사메(村雨), 유다치(夕立), 하루사메(春雨), 사미다레(五月雨)

제 4 구축대 : 구축함 아라시(嵐), 하기카제(萩風), 노와키(野分), 마이카제(舞風)

제 9 구축대 : 구축함 아사쿠모(朝雲), 야마쿠모(山雲), 나츠쿠모(夏雲), 미네쿠모(峯雲)

제 24 구축대 : 구축함 우미카제(海風), 야마카제(山風), 카와카제(江風), 스즈카제(凉風)

 

* 제 3함대 (사령관 :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 - 필리핀 공략지원함대

기함 : 아시가라, 기지 : ​타이완

 

제 16전대 : 중순양함 아시가라(足柄), 경순양함 나가라(長良), 쿠마(球磨)

제 17전대 : 부설함 이츠쿠시마(嚴島), 야에야마(八重山), 설비함 신쿠마루(辰宮丸)

제 5 수뢰전대 : 경순양함 나토리(名取)

I

제 5 구축대 : 구축함 아사카제(朝風), 하루카제(春風), 마쓰카제(松風), 하타카제(旗風)

제 22 구축대 : 구축함 사츠키(皐月), 미나즈키(水無月), 후미즈키(文月), 나가즈키(長月)

 

제 6 잠수전대 : 잠수모함 쵸게이(長鯨)

I

제 9 잠수대 : 잠수함 伊 123, 伊 124

제 13 잠수대 : 잠수함 伊 121, 伊 122

 

제 1 근거지대 : 부설함 시라타카(白應), 아오타카(蒼應), 소해정, 구잠정, 수뢰정 일부.

 

* 제 4 함대 (사령관 :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 - 남양군도 방위함대

기함 : 연습순양함 가시마(鹿島), 기지 : ​트럭

제 18전대 : 경순양함 텐류(天龍), 타츠다(龍田)

제 19전대 : 부설함 오키노시마(沖島), 해방함 도키와(常磐), 쓰가루(津輕)

제 6 수뢰전대 : 경순양함 유바리(夕張)

I

제 29 구축대 : 구축함 오이테(追風), 하야테(疾風), 아사나기(朝), 유나기(夕)

제 30 구축대 : 구축함 무츠키(睦月), 키사라기(如月), 야요이(彌生), 모치즈키(望月)

제 7 수뢰전대 : 잠수모함 진게이(迅鯨)

I

제 26 잠수대 : 잠수함 呂 60, 61, 62

제 27 잠수대 : 잠수함 呂 65, 66, 67

제 33 잠수대 : 잠수함 呂 63, 64, 68

항공기 : 96식 함상전투기​ 36대, 육상공격기 38대, 비행정 24대, 수상기 54대

 

* 제 5함대 (사령관 :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 - 북방열도 방위함대

기함 : 다마, 기지 : 마이즈루

 

제 21전대 : 경순양함 타마(多摩), 키소(木曾)

제 22전대 : 특설순양함 쿠리타마루(粟田丸), 아사카마루(淺香丸)

제 7 근거지대 : 소해정, 구잠정 일부.

 

* 제 6함대 (사령관 : 시미즈 미츠미 중장) - 하와이방면 잠수함대

기함 : 연습순양함 카토리(香取), 기지 : 콰절린

 

제 1 잠수전대 : 특설잠수모함 야스쿠니마루(靖國丸), 잠수함 伊 9

I

제 1잠수대 : 잠수함 伊 15, 16, 17

제 2잠수대 : 잠수함 伊 18, 19, 20

제 3잠수대 : 잠수함 伊 24, 25, 26

 

제 2 잠수전대 : 특설잠수모함 산토스마루(さんとす丸), 잠수함 伊 7, 伊 10

I

제 7잠수대 : 伊 1, 2, 3

제 8잠수대 : 伊 4, 5, 6

 

제 3 잠수전대 : 특설잠수모함 다이게(大鯨), 잠수함 伊 8

I

제 11잠수대 : 잠수함 伊 74, 75

제 12잠수대 : 잠수함 伊 68, 69, 70

제 20잠수대 : 잠수함 伊 71, 72, 73

 

* 제 1 항공함대 (사령관 : 나구모 주이치 중장) - 북태평양 공략을 담당한 항모기동부대

기함 : 아카기, 기지 : 구레​

 

제 1 항공전대 : 항공모함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I

제 7 구축대 : 구축함 아케보노(曙), 우시오(潮), 사자나미(漣)

 

제 2 항공전대 : 항공모함 소류(蒼龍), 히류(飛龍)

I

제 23 구축대 : 구축함 키쿠즈키(菊月), 유즈키(夕月), 우즈키(卯月)

 

제 4 항공전대 : 항공모함 류조(龍駿), 다이요(大應)

I

제 3 구축대 : 구축함 시오카제(汐風), 호카제(帆風)

 

제 5 항공전대 : 항공모함 쇼가쿠(翔鶴), 즈이가쿠(瑞鶴)

I

부속 구축함 : 오보로(朧), 아키쿠모(秋雲)

 

함재기

정규항모 6척 : 제로기 108대, 99식 함상폭격기 129대, 97식 함상공격기 144대

경항모 2척 : 96식 함상전투기 24대, 97식 함상공격기 24대

* 남파함대 (사령관 :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방함대. 말레이 작전을 지원.

기함 : 가시이, 기지 : 요코스카

 

경순양함 : 가시이(香椎), 해방함 시무슈(占守)

제 9 근거지대 : 소해정, 구잠정 일부.

제 4 잠수전대 : 경순양함 키누(鬼怒)

I

제 18잠수대 : 잠수함 伊 53, 54, 55

제 19잠수대 : 잠수함 伊 56, 57, 58

제 21잠수대 : 잠수함 呂 33, 34

 

제 5 잠수전대 : 경순양함 유라(由良)

I

제 28잠수대 : 伊 59, 60

제 29잠수대 : 伊 62, 64

제 30잠수대 : 伊 65, 66

 

지상발진 항공기 세력

 

제 11 항공함대 (사령관 : 츠카하라 니시조 중장) - 타이완

구축함 : 미네카제(峯風), 오키노카제(沖風)

제 21 항공전대

제 23 항공전대

항공기 : 제로기 90대, 96식 함상전투기 33대, 육상공격기 122대, 수송기 25대, 98식 육상정찰기 12대, 비행정 24대, 수상기 38대

 

제22항공전대 - 인도차이나

항공기 : 제로기 25대, 96식 함상전투기 12대, 육상공격기 99대, 98식 육상정찰기 6대, 수상기 31대

 

북태평양 : 전투기 27대, 공격기 20대, 수상기 8대

일본본토 : 전투기 약 100대, 폭격기 및 공격기 약 70대, 훈련기 약 450대, 기타  약 60대

예비기 : 전투기 약 70대, 폭격기 및 공격기 약 50대, 연습기 약 60대, 기타 약 40대

 

제11및 제12 수상기모함 전대 : 수상기모함 8척, 수상기 약 70대

전함 및 순양함의 수상기 : 약 90대

 

(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Redirect=Log&logNo=110072963049&from=postView ,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Japanese naval Force Fighter Units and Their Aces 1932-1945, The Organization and Order of Battle of Militaries in World War 2, Vol.4 - Japan)

 

전반적으로 보아 일본해군은 막강한 상대였으며 미해군은 1814년에 영국해군과 겨루어 본 이래 이렇게 강력한 해군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일본해군의 약점은 가난한 나라의 해군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해군도 강력한 산업의 뒷받침없이 오래 버틸 수는 없었으며 일본의 산업 역량은 미국에 비해 치명적으로 허약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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